"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성은 낙루암의 얼어붙은 바위틈을 타고 흐르는 지하수보다 차가웠다.
혜우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설백현의 소맷자락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그의 손끝은 이미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거두어진 뒤였다. 맥박을 짚어 기맥을 안정시켜 준 것은 오직 문파의 생존 자산을 보전하기 위한 도구적 조치에 불과했다는 듯, 설백현의 안광에는 그 어떤 온기도, 안도의 기색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새까만 심연.
빛을 집어삼키는 암흑만이 그의 동공 속에서 넘실거렸다. 사부를 향한 그리움과 동문들을 지키고자 했던 비장한 의지가 서려 있던 눈동자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살상과 효율만을 위해 벼려진 숫돌 같은 무정함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다. 신마역천결 3성의 돌파. 그 가혹한 인과율은 설백현이 지니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자애심을 송두리째 앗아 가 버렸다.
"백현아…… 너의 눈이…… 어찌하여……."
혜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설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혜우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시선을 돌려 어둠이 짙게 깔린 백화곡의 초입을 응시했다.
"아직 찌꺼기들이 남아 있군."
그의 어조는 사물의 개수를 세는 것처럼 무미건조했다.
화염이 걷힌 계곡의 바위 그늘 사이로, 적혈맹의 잔당들과 남궁세가에서 파견한 무인들이 숨을 죽인 채 퇴로를 찾고 있었다. 그들은 설백현이 발산하는 압도적인 마기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면서도, 기회를 보아 빠져나가려 발버둥 치는 중이었다.
"괴, 괴물 같은 놈……!"
바위 뒤에 숨어 있던 적혈맹의 이류 살수 하나가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왔다. 그는 소매 안에서 암기인 독침 수십 개를 사방으로 뿌려대며 신형을 뒤로 날렸다. 허초와 실초를 뒤섞어 시야를 가린 뒤 도망치려는 비열한 수법이었다.
설백현의 발끝이 지면을 가볍게 스쳤다.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미 살수의 눈앞에 그의 검은 도포 자락이 일렁이고 있었다.
설백현의 눈동자는 독침의 궤적을 쫓지 않았다. 침이 날아오는 방향의 기류 변화를 온몸의 촉각으로 감지한 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은 채 검 손잡이를 가볍게 튕겼다.
츠자작!
검집에서 반쯤 뽑혀 나온 검신이 반월을 그리며 독침들을 모조리 튕겨냈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예리한 마찰음이 계곡에 울려 퍼지기 전, 설백현의 오른손이 허공을 갈랐다.
"사, 살려……!"
살수의 애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설백현의 손바닥이 살수의 정수리를 가볍게 내리눌렀다.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내력이 두개골을 관통했다. 살수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그대로 바닥에 무너졌다. 외상 하나 없이, 뇌수가 완벽히 파괴된 즉사였다.
"남아 있는 자들은 열둘."
설백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발걸음이 다음 먹잇감을 향해 움직였다.
"이악마 같은 놈! 다 함께 덤벼라! 어차피 도망치지 못한다!"
남궁세가의 하급 무사들이 무기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들은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각자의 병장기로 설백현의 급소를 겨눴다. 검기가 종횡하고 도풍이 대지를 찢으며 다가왔다. 기세만큼은 강호를 뒤흔들 만한 연합 공격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의 눈에는 그 모든 초식이 느린 그림자 연극에 불과했다.
그는 검을 완전히 뽑지도 않았다. 검집째로 쥔 왼손을 가볍게 휘두르며 적들의 검진(劍陣)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서걱!
검집의 끝이 남궁가 무사의 목울대를 타격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사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설백현은 신형을 반 바퀴 돌리며 오른발로 대지를 굴렀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흙먼지가 강력한 기운을 머금고 화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비명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커헉!"
"내 눈이, 눈이……!"
적들의 초식은 설백현의 소맷자락 하나 스치지 못했다. 그들의 허초와 심리전은 설백현의 무아(無我)의 경지 앞에서는 한낱 어린아이의 장난과 같았다. 설백현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생명이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는 완벽한 살육의 기계. 그것이 지금 백화곡을 지배하는 무신의 실체였다.
혜우는 주저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온몸이 떨려왔다. 적들을 물리치고 문파를 구했다는 기쁨은 단 한 줌도 솟아나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극보다, 그것을 행하는 설백현의 메마른 표정이 더 끔찍한 공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에 거칠고 차가운 감각이 닿았다.
'빙백한령주(氷魄寒靈州)'.
과거 백화문의 전성기 시절, 문파의 정화(淨化)를 위해 전해 내려오던 신비로운 영물이었다. 지금은 반으로 쪼개져 차가운 파편의 상태로 혜우의 품에 잠들어 있었다.
혜우는 그 파편을 움켜쥐었다. 뾰족한 단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백현아…… 기어이 네가 마(魔)의 길로 완전히 들어서는구나. 사부님이 너를 지키고자 했던 그 마음마저 잊은 채…….'
그녀는 직감했다. 설백현이 경지를 돌파할 때마다 잃어버리는 감정의 대가. 그것이 종국에는 그를 파멸로 이끌 것이며, 이 빙백한령주의 파편만이 그의 마지막 이성을 붙잡아둘 유일한 닻이 되리라는 것을. 그녀의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흙바닥에 떨어져 얼룩을 남겼다.
마지막 적의 목뼈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백화곡은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계곡 한가운데, 설백현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의 흰 도포 자락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품속에서 낡은 가죽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지난 전투에서 남궁세가의 밀거래 현장을 덮쳐 탈취했던 비밀 지도였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궁휘가 몰락해 가는 가문의 재정을 일으켜 세우고, 방계들의 반란을 잠재우기 위해 비고의 마지막 자금까지 털어 밀수하려 했던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은밀한 보관소와 수송 경로가 적힌 지도였다.
"사문의 생존을 위해서는 자원이 필요하다."
설백현의 마른 목소리가 낙루암의 밤공기를 갈랐다.
"남궁세가의 목줄을 쥐어야 백화문이 바로 선다."
그는 지도를 천천히 접어 품에 넣었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남궁휘의 절박함을, 설백현은 사정없이 짓밟아 붕괴시킬 생각이었다. 동정심이나 자비 따위는 그의 뇌리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인과율에 따른 계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 *
사흘 뒤.
백화곡의 참변은 호북성 무림을 넘어 강호 전체로 빠르게 퍼져 나갔다.
적혈맹의 정예 선봉대와 남궁세가의 가신 정진이 이끄는 무인들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남기지 못한 채 몰살당했다는 소식은 군소 가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백화문이 완전히 멸망하여 산문이 닫힐 것이라 믿고, 남궁세가와 적혈맹의 눈치를 보며 백화문을 압박하던 주변의 가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백화곡 입구.
수십 명의 무인들이 차가운 대지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들은 백화곡 인근에서 세력을 유지하던 황룡장(黃龍莊)의 장주와 철검문(鐵劍門)의 문주를 비롯한 정파의 군소 방파 수장들이었다.
"백 소협! 저희의 아둔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황룡장주가 이마를 흙바닥에 찧으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생존을 향한 처절한 비굴함이 묻어났다.
"저희는 그저 남궁세가의 강압에 못 이겨 백화문의 영천을 감시했을 뿐입니다! 결코 백화문을 해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철검문주 역시 사르르 떨리는 손으로 상자 하나를 앞으로 밀어냈다.
"이것은 저희 문파가 대대로 보관해 온 영약과 황금입니다! 백화문의 재건을 위해 기꺼이 바치겠으니, 부디 저희 문파의 명맥만은 살려 주십시오!"
그들의 눈앞에 선 설백현은 그 어떤 표정 변화도 없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과거의 설백현이었다면, 정파라는 허울을 쓰고 비겁하게 굴었던 이들의 위선에 분노했을 것이다. 혹은 사문의 명예를 더럽힌 대가로 그들의 목을 베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설백현은 달랐다. 분노도, 혐오도 없었다. 오직 쓰임새만이 있을 뿐이었다.
설백현은 품에서 적령화의 지도를 꺼내 황룡장주의 앞에 던졌다.
"이 지도를 보아라."
황룡장주가 떨리는 손으로 지도를 펼쳤다. 지도를 확인한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이것은…… 남궁세가의 극비 수송로가 아닙니까? 이곳은 남궁가가 가문의 사활을 걸고 확보하려는 적령화의……."
"사흘 뒤, 남궁세가의 수송대가 이 경로를 통과할 것이다."
설백현의 어조는 단호했다.
"너희 가문의 모든 인맥과 무력을 동원해 이 자리를 선점해라. 그리고 적령화를 단 한 뿌리도 남김없이 회수하여 백화곡으로 가져와라."
"하, 하지만 소협! 남궁세가의 자금을 건드린다면 저희 가문은 무사하지 못합니다! 가주 남궁휘가 직접 나선다면 저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황룡장주가 울상을 지으며 애원했다.
설백현은 천천히 허리를 숙여 황룡장주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빛이 없는 검은 동공이 황룡장주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황룡장주는 숨이 턱 막히며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남궁세가가 무서운가, 아니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너희 가문의 대가 끊기는 것이 무서운가?"
극도의 살기가 계곡 전체를 지배했다.
군소 문파의 수장들은 더이상 그 어떤 변명도 올리지 못했다. 그들은 설백현의 눈에서 타협이나 자비의 여지가 눈꼽만큼도 없음을 깨달았다. 남궁세가에 죽든, 지금 이 자리에서 설백현의 검에 목이 날아가든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하, 행하겠습니다! 반드시 적령화를 회수하여 바치겠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뒤걸음질 쳤다. 백화문의 주도권이 이 압도적인 위세와 공포 속에서 인근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는 순간이었다. 몰락해가던 문파가, 설백현이라는 단 한 명의 무신에 의해 강호의 세력 판도를 뒤흔드는 괴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설백현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사부의 유해를 당당히 조사당에 안치하고, 백화문을 최고의 신화로 세우겠다는 집념만이 기계적인 명령어로 남아 작동할 뿐이었다. 정감(情感)이 거세된 자리에는 오직 목표를 향한 차가운 집착과 연산만이 지배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남궁세가의 정청.
바닥에는 수십 개의 깨진 찻잔과 집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정진이 죽었다고? 정예 무사 오십 명이 흔적도 없이 몰살당했단 말이냐!"
남궁휘의 외침은 가문의 명예만큼이나 처절하게 찢어지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극도로 파리했고, 눈밑에는 어두운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었다. 방계 고수들의 끊임없는 견제와 가문의 재정 파탄 속에서, 이번 백화곡 침탈은 그가 가주로서의 입지를 지키고 혈족들을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처참한 패배와 정예들의 죽음뿐이었다.
"가주님, 그뿐만이 아닙니다. 황룡장과 철검문을 비롯한 인근 군소 방파들이 백화문에 굴복하여…… 저희가 밀수하려던 적령화의 수송로를 차단하고 자원을 탈취하기 시작했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무사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남궁휘는 비틀거리며 의자 손잡이를 짚었다. 적령화마저 잃는다면 방계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고, 남궁세가는 강호의 이류 세가로 전락하여 멸망의 길을 걸을 터였다.
그때, 정청의 어둠 속에서 스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크크크…… 남궁 가주, 참으로 보기 딱한 몰골이구려."
어둠을 가르고 모습을 드러낸 자는 붉은 관을 쓰고 혈색 도포를 입은 중년인, 적혈맹의 맹주 사마혈(司馬血)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간교함과 잔인함이 번득이고 있었다.
"사마혈……!"
남궁휘가 이를 갈며 검자루를 쥐었다.
"네놈들이 백화곡에서 우리 가신들을 방패막이로 삼아 도망친 것을 모를 줄 아느냐!"
"오해하지 마시오, 남궁 가주."
사마혈은 유유히 걸어 나와 남궁휘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은밀한 내력이 남궁휘의 기맥을 자극하며 그의 이성을 흐트러뜨렸다.
"그 설백현이라는 애송이는 보통의 존재가 아니오. 천살신마의 괴물 같은 무공을 그대로 이어받았지. 저대로 백화문이 일어서게 둔다면, 다음 차례는 어디겠소? 몰락해 가는 남궁세가가 가장 먼저 그들의 제물이 될 것이오."
"……!"
남궁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마혈의 목소리는 절박한 그의 심리적 틈새를 정밀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지닌 무공은 하늘을 거스르는 역천의 힘. 하지만 그 대가로 놈은 감정을 잃어가고 있소. 지금 쳐부수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무정(無情)의 괴물이 되어 강호를 피로 물들일 것이오. 무림맹의 이름으로 연합 살육단을 구성하십시다. 남궁세가의 총력을 쏟아부으시오. 내가 뒤를 받치겠소."
사마혈의 간교한 가스라이팅은 남궁휘의 마지막 이성을 무너뜨렸다. 가문의 생존이라는 족쇄에 묶인 남궁휘에게는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백화문을…… 완전히 멸하겠다."
남궁휘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리고 반나절 뒤.
백화곡을 둘러싼 산맥 위로 먹구름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사방의 협곡 입구에서 수백 명의 무인들이 살기를 뿜어내며 좁혀오기 시작했다. 무림맹의 깃발을 앞세운 남궁세가의 최정예 철혈무사들과 적혈맹의 잔혹한 살수들이 연합한 대규모 살육단이었다.
그들의 발걸음이 대지를 흔들며 백화곡을 포위해 들어갔다. 그 규모는 이전의 습격과는 차원이 다른, 문파의 사활을 건 총력전의 기세였다.
낙루암 앞마당.
설백현은 대지를 메우는 살기를 느끼며 천천히 검을 쥐었다. 그의 검은 동공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일렁이지 않았다.
거대한 폭풍우가 백화곡을 향해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