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안개가 허공을 찢으며 내려앉았다. 살을 찌르는 악취와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간 독인의 파편들이 백화곡의 흙바닥을 검게 부식시켰다. 품에 안긴 혜우의 가냘픈 신형이 한 차례 크게 움츠러들더니, 이내 차게 식어갔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검붉은 혈흔이 설백현의 소맷자락을 적셨다. 그 너머, 서쪽 하늘을 피비린내 나게 물들이는 거대한 화마가 한 줄기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솟구쳤다. 조사당. 사부의 유해와 백화문의 영혼이 잠든 안식처가 타오르고 있었다.
"죽어라, 마두의 후예놈!"
독무 속에서 기척을 죽이고 있던 기련산의 악귀들이 검을 뽑아 들고 쇄도했다. 사방에서 밀려드는 영기 부식의 독안개 속에서 설백현의 이성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비켜라."
설백현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살기는 대지를 얼릴 듯 매서웠다. 그는 혜우의 신형을 왼팔로 단단히 싸안은 채, 오른손으로 흑광이 서린 검을 움켜쥐었다.
쉬이익!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적혈맹의 살수 세 명이 사방에서 검망을 펼치며 목을 노려왔다. 설백현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발끝으로 땅을 박차며 앞으로 전진했다. 그의 신형이 환영처럼 흔들리는가 싶더니, 흑색의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벼락처럼 뻗어 나갔다.
콰아아앙!
정면에서 달려들던 살수의 검이 밑동째 부러져 나가며 비명이 협곡을 울렸다. 그러나 적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기련산 오마 중 살아남은 세 명의 괴수가 독인들의 파편을 방패 삼아 기습적인 연격관통을 시도했다.
"크하하! 한 손으로 계집을 안고 우리를 상대하겠다고? 오만방자한 놈!"
혈염마의 외침과 함께 붉은 채찍이 사납게 대기를 가르며 설백현의 등 뒤를 후려쳤다. 설백현은 신형을 급격히 비틀어 채찍의 궤도를 피했으나, 채찍 끝에 묻어 있던 가공할 독수가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치지직 소리와 함께 도포 자락이 녹아내리며 살갗이 타들어 갔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전신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광포한 마기였다. 혜우의 숨결은 점점 더 가늘어지고 있었다. 가슴팍을 정통으로 타격한 독기가 그녀의 심맥을 향해 시시각각 파고드는 것이 품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 빌어먹을 벌레 같은 놈들이……."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가래 끓는 듯한 목소리에 적들이 흠칫 뒤로 물러섰다. 그의 두 눈은 이미 백청색의 광채를 잃고 짙은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마기가 주위의 독무와 엉키며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더 이상 시간은 없다."
적혈맹의 무리들은 설백현의 기세에 압도당하면서도, 백화곡을 완전히 멸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금 검진을 좁혀왔다. 그들의 등 뒤로 조사당을 태우는 불길이 더욱 맹렬하게 타오르며 검은 연기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천재지변과도 같은 화재와 혜우의 중독. 설백현의 내면에서 깊이 잠들어 있던 '신마역천결'의 세 번째 구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내적인 심마가 뇌리를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지금 이 경지를 돌파하면, 네게 무엇이 남을 것 같으냐?'
차가운 사부의 환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것은 사부의 목소리를 빌린 역천결의 마성이었다.
'기쁨을 잃었고, 추억을 잃었다. 이제 이 선을 넘으면 너는 저 계집에 대한 온정마저 잃게 되리라. 동문들을 향한 생애 마지막 자애(慈愛)의 감정이 영구히 소멸할 것이다. 감정이 없는 괴물이 되어 사문을 살린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설백현의 전신을 엄습했다.
자애심. 타인을 불쌍히 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온기.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자신은 혜우를 살리고도 그녀를 남처럼 대하게 될 터였다. 사부의 유해를 합사하겠다는 맹목적인 집착만이 남은 껍데기가 될 것이 뻔했다.
'안 된다…….'
설백현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품에 안긴 혜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품속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설백현의 가슴팍을 적셨다. 그것은 혜우가 그에게 건넸던, 백화문의 잃어버린 정화 무구인 '빙백한령주'의 쪼개진 파편이었다.
파편에서 흘러나오는 빙한의 기운이 폭주하려는 설백현의 이성을 겨우 붙잡아 매고 있었다. 아직은 잃을 수 없다. 저 따스한 눈빛을,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봐 주던 누이의 온기를 스스로의 손으로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흐흐흐,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구나! 낙루암의 마두 녀석도 결국 이 독무 앞에서는 한낱 고깃덩어리에 불과했지!"
적혈맹의 살수가 비웃음을 흘리며 검을 꼬아 찔러왔다.
그 순간, 설백현의 뇌리에 번뜩이는 기억이 스쳤다.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남궁휘. 그 가문의 숨통을 쥘 수 있는 결정적인 패가 품속에 있었다. 지난날 밀거래 현장에서 가로챘던,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의 위치가 그려진 비밀 지도였다.
설백현은 공격을 피해 신형을 뒤로 날리며, 품 안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양피지 지도를 꺼내 들어 적들의 눈앞에 펼쳤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설백현의 벼락같은 필치에 적들의 움직임이 일순 멎었다. 가죽 지도에 그려진 기련산 북동쪽의 은밀한 계곡과, 그곳에 선명하게 박힌 남궁세가의 비고 인장. 적혈맹의 대장 격인 혈염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그것은…… 남궁세가가 가문의 사활을 걸고 밀수하려던 적령화의 산지 지도!"
"남궁휘가 이 지도를 잃고 얼마나 미쳐 날뛰고 있는지 너희도 잘 알고 있겠지."
설백현의 목소리에 서리가 내렸다.
"너희가 여기서 나를 죽인다 한들, 이 지도가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 남궁세가는 물론이고 그들과 결탁한 적혈맹의 자금줄 역시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남궁휘는 가문을 구하기 위해 너희 적혈맹의 목을 가장 먼저 칠 터."
"이, 이 간악한 놈이……!"
적들은 큰 충격을 받은 듯 안색이 하얗게 질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남궁휘가 몰락하는 세가를 지키기 위해 가문의 비고까지 털어가며 밀수하려 했던 적령화였다. 그것이 설백현의 손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은 대세를 완전히 뒤흔들 수 있는 치명적인 비수였다. 적들의 진형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심리적인 붕괴가 그들의 검 끝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설백현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혜우의 숨통을 끊으려 드는 독기를 제거하고, 저 타오르는 조사당의 불길을 잡지 못한다면 지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는 지도를 다시 품속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혜우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숨결이 이제 겨우 실낱처럼 가늘어져 있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자신의 영혼이 통째로 갈려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이 순간 힘을 얻어 적들을 멸하고 그녀를 구해야만 했다.
'사부님…….'
설백현은 눈을 감았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온기, 동문들을 향한 마지막 자애심이 영혼의 제단 위에서 불타 없어지는 환영이 보였다. 가슴 한구석이 도려내 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전신을 엄습했다. 영혼의 단절감은 육체의 고통을 아득히 초월하는 비장한 절망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은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내 영혼을 바쳐, 사문을 구하겠다.'
쿠구구구궁!
백화곡 전체가 들끓기 시작했다. 설백현의 발밑에서부터 검은 진각이 대지를 타고 뻗어 나갔다. 그의 단전에서 소용돌이치던 내력이 기경팔맥을 거칠게 뚫고 나오며 역천의 궤도를 그렸다.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 제3성(三星), 천화마겁(天火魔劫) 각성.]
설백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기가 단순한 기운을 넘어, 실체화된 어둠의 장막이 되어 사방을 뒤덮었다.
"무, 무슨 공능이 이따위란 말이냐!"
혈염마가 경악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설백현이 검을 하늘을 향해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구결이 백화곡의 대기에 묵직하게 울려 퍼졌다.
"역천(逆天)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만화(萬火)는 내게로 돌아오라."
화아아아악!
순간, 백화곡 서쪽 조사당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붉은 화염들이,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불뱀처럼 허공을 가르며 설백현의 검 끝으로 빨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이하고도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사문을 태우던 불길과 사방에 퍼져 있던 독무가 설백현의 무형검기로 흡수되며 핏빛과 흑색이 뒤섞인 거대한 화염의 폭풍을 형성했다.
"이것이 무슨……!"
적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방화의 불길이 오히려 자신들을 겨누는 무기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절망 어린 비명을 질렀다.
"가라."
설백현이 검을 내질렀다.
콰르르릉! 타아아앙!
검 끝에서 방출된 핏빛 화염 사슬이 허공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기련산의 고수 네 명을 칭칭 감아쥐었다. 불길은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설백현의 순수한 마기와 융합된 역천의 불꽃이었다.
"아아악! 뜨겁다! 몸이, 내력이 녹아내린다!"
"살려다오! 제발……!"
자멸을 부르짖던 적혈맹의 고수들은 비명횡사하며 그 자리에서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몸속에 흐르던 사파의 독기와 내력이 역으로 전도되어 스스로를 태워버리는 잔혹한 인과율의 형벌이었다. 단 몇 호흡 만에, 백화곡을 종횡하며 기세를 올리던 적혈맹의 수해 네 명은 형체도 남기지 못한 채 검은 숯더미와 잔해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거대한 화염 구름이 걷히며 백화곡에는 정적만이 내려앉았다. 조사당을 집어삼키던 불길은 완전히 꺼졌고, 대지를 메웠던 독무 역시 설백현의 마공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설백현은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검은 연기가 가라앉으며, 그가 품에 안고 있던 혜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는 손끝에 내력을 모아 혜우의 가슴팍에 서서히 주입하기 시작했다. 3성 돌파로 얻은 극양의 마기가 그녀의 체내에 남아 있던 미세한 파혈독의 찌꺼기를 깨끗이 태워 없애고, 끊어졌던 맥락을 한 땀 한 땀 이어 붙였다.
"음……."
혜우의 입술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검푸르게 죽어가던 그녀의 안색에 서서히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흡이 안정적인 궤도를 찾으며 맥박이 고르게 뛰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혜우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하던 그녀의 시야에 설백현의 얼굴이 들어왔다.
"백…… 현아……."
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의 뺨을 향해 손을 뻗으려 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가 치렀을 희생을 걱정하는, 따스하고 자애로운 눈빛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은 그녀의 손길을 피하지도, 그렇다고 맞잡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가만히 서서 혜우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혜우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깊은 경악과 슬픔이 서렸다. 설백현의 얼굴에는 그 어떤 안도감도, 분노도, 심지어 자신을 향한 따뜻한 염려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감정이 완전히 소멸한, 빛 한 점 통과하지 못하는 새까만 암흑의 심연 그 자체였다. 백화문을 구하고 혜우를 살려냈으나, 그 대가로 설백현의 영혼에서 타인을 향한 마지막 자애심이 영구히 지워져 버린 것이다.
"일어설 수 있겠습니까?"
설백현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차가운 얼음 송곳처럼 메말라 있었다. 혜우는 전율하며 그의 낯선 모습을 바라보았고, 백화곡의 깊은 어둠 속에서 새로운 폭풍의 전조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