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五魔) 군단이 뿜어내는 기세는 남궁세가의 정예들과 궤를 달리했다. 살을 에어내는 듯한 지독한 음기(陰氣)가 사방을 짓눌렀고, 핏빛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바스러지며 허공을 부유했다.
설백현의 검 끝이 멈춘 자리에 기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의 안광은 한없이 가라앉아 냉혹한 심연을 이루고 있었다.
"남궁의 조무래기들이 결국 일을 그르쳤구나."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자는 기련산 오마의 수장, 혈염마(血炎魔)였다. 그의 등 뒤로 굳게 닫힌 협곡의 사방에서 붉은빛의 마기가 장막처럼 솟구쳐 올랐다. 대지를 피로 적실 듯이 붉게 타오르는 기운들이 허공에서 맞물리며 백화곡 전체를 가두는 거대한 결계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아수라혈진(阿修羅血陣).
도망갈 길은 없었다. 퇴로를 완전히 차단하고 사냥감을 압살하려는 사파 특유의 간계이자 잔혹한 함정이었다. 붉은 장막이 하늘을 가릴 때마다 백화곡의 영기가 급격히 억눌리며 사방의 공기가 탁하게 고여 갔다.
"사마혈 맹주께서 친히 우매한 제자 놈의 목을 거두라 명하셨다. 감히 천살신마의 이름을 팔아 무림에 기어 나오다니, 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화를 자초하는도다."
혈염마의 비웃음에 설백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주저앉아 핏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궁휘에게 향했다.
지독할 정도로 비장한 패배자의 얼굴. 가문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으나 결국 사파의 사냥개들에게 뒤를 밟혀 모든 기회를 상실한 무인의 절망이 그곳에 있었다.
설백현이 품 안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걸린 것은 해어지고 낡은 가죽 지도였다.
그는 지도를 천천히 꺼내 남궁휘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이것을 찾고 있었나."
남궁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팽창했다. 지도의 표면에 그려진 지형과 붉은 낙인은 다름 아닌 남궁세가가 가문의 사활을 걸고 밀수하려던 가공되지 않은 영초, '적령화(赤靈花)'의 극비 매장지였다. 5화에서 설백현이 우연히 손에 넣었던 그 지도가 마침내 남궁휘의 눈앞에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네, 네놈이... 어떻게 그것을..."
남궁휘의 목소리가 갈라져 터졌다. 가문을 몰락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릴 유일한 자금줄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그 영초만 확보할 수 있다면 방계들의 반란을 잠재우고 남궁세가를 다시 세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의 시발점이자 종착지인 지도가 이미 설백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남궁의 불씨를 살릴 유일한 동아줄이 이것이었겠지."
설백현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폭주가 아닌, 절대적인 무관심에서 비롯된 잔인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너희 세가의 보급선은 끊겼고, 적령화는 더 이상 남궁의 것이 아니다."
"아아아아...!"
남궁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가문을 지키겠다는 숭고하고도 처절한 신념이 단 한 장의 가죽 지도 앞에서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가치를 잃은 분노만이 그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적령화를 잃은 남궁세가에 남은 것은 사파의 침탈과 내부의 분열로 인한 완전한 파멸뿐이었다. 심리가 완전히 붕괴된 남궁휘는 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바닥을 기었다.
그 처참한 광경을 지켜보던 혈염마가 혀를 찼다.
"명문세가의 후계자라는 놈이 고작 풀때기 하나에 넋을 잃다니 가소롭구나. 남궁휘, 어차피 너희 세가는 끝났다. 마지막 자비로 제안하지. 저 천살신마의 제자 놈을 죽이는 데 손을 보태라. 그렇다면 네 목숨줄만은 살려 기련산으로 보내주마."
남궁휘의 흐려진 눈동자가 흔들렸다. 비열한 사파의 제안이었으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잡아야 하는 썩은 동아줄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제안이 떨어지기 무섭게, 설백현의 뒤편에서 묵묵히 상황을 주시하던 혜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백색 도포가 가라앉은 밤바람에 거칠게 휘날렸다.
"남궁 소가주, 귀를 기울이지 마시오."
혜우의 목소리는 맑고 단호했다. 강호를 피로 물들이는 사파의 무리 앞에서도 그녀의 기품은 꺾이지 않았다.
"백화문은 꺾일지언정 더러운 손을 잡지 않소. 가문의 존망을 핑계로 마도(魔道)의 주구(走狗)가 되려 한다면, 남궁의 가문은 영원히 무림의 수치로 기록될 것이오."
남궁휘는 혜우의 매서운 질타에 입술을 깨물었다. 명예와 생존의 기로에서 그의 검이 허공을 갈피 없이 헤맸다.
혜우는 남궁휘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설백현의 곁으로 다가섰다.
설백현의 안색은 이미 인간의 그것이 아니었다. 설백현은 신마역천결의 2성을 돌파하며 사부와의 소중한 기억 일부를 소실한 상태였다. 정을 갈구하면서도 정을 잃어가는 가혹한 인과율 속에서, 그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가웠다. 자신을 향한 혜우의 걱정 어린 시선조차 그에게는 먼지처럼 무의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비켜라. 누님이 설 자리가 아니다."
설백현의 무뚝뚝하고 냉랭한 축객령에도 혜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품 안에서 가늘고 긴 침통을 꺼내 들었다.
"네 맥락이 뒤틀리고 있다. 사부님의 무공을 이어받은 대가가 이리도 가혹할 줄이야...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네가 마물로 변하는 것을 보고만 있지는 않겠다."
스스스―
혜우가 손을 뻗어 설백현의 어깨를 짚었다. 그녀의 손길은 따뜻했으나, 설백현의 몸은 거부 반응을 일으키듯 차갑게 굳어졌다. 혜우는 지체 없이 은침 세 대를 뽑아내어 설백현의 백회혈(百會穴)과 대추혈(大椎穴)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윽...!"
설백현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역류하던 내력이 은침의 자극을 받아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혜우의 목덜미 아래, 옷자락 사이에 숨겨져 있던 빙백한령주(氷魄寒靈珠)의 파편이 푸른 비취색 안개를 미세하게 뿜어냈다. 9화에서 그녀가 설백현에게 건넸던 한령주의 기운이 설백현의 요동치는 심상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심마의 안개가 걷히고 이성이 돌아오는 감각. 설백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피어오르는 온기를 느꼈지만, 이내 그것을 억누르며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호위하는 혜우의 존재가, 그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이성의 닻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오마의 일원, 구천마(九天魔)가 광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꼴사납구나! 죽어가는 쥐새끼들이 서로를 감싸 안고 침장난을 치다니! 천살신마의 유일한 후계자라 하여 내심 긴장했거늘, 고작 가문 하나 지키지 못해 절절매는 애송이에 불과했단 말이냐?"
구천마가 한 걸음 내딛자 사방의 혈진이 요동쳤다. 그의 눈에 서린 살기는 실재하는 침묵처럼 무거웠다.
"과거 네 사부 늙은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느냐? 정파의 위선자들에게 쫓겨 이곳 백화곡에 숨어들었을 때, 우리 사마혈 맹주님께서 친히 선사하신 '천식혈령공(天息血靈功)'에 내장이 녹아내렸지. 하루하루 숨을 쉴 때마다 피를 토하며 개처럼 기어가던 그 늙은이의 꼴이라니! 그 천하제일인이라는 자가 가문 하나 구하지 못해 눈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었다!"
"닥쳐라."
설백현의 목소리가 지극히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구천마는 멈추지 않고 비웃음을 쏟아냈다.
"맹주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며 고통스럽게 죽어간 사부의 뒤를 이어, 오늘 너 역시 이 아수라혈진의 제물이 되리라. 사마혈 맹주님의 인과를 네놈의 피로 청산해주마!"
사마혈. 사부를 배신하고 독자적인 사파 적혈맹을 구축한 자. 사부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치명적인 내상을 남겨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의 이름이 나오자, 설백현의 뇌리가 번쩍였다.
쿠구구궁!
설백현의 단전에서 잠자고 있던 검은 내력이 폭발적으로 요동쳤다.
정이 깊을수록 심마에 취약한 그의 결함이, 사부의 억울한 죽음과 배신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한 것이다. 그의 안광이 검붉은 마기로 뒤덮였다. 분노는 이미 단순한 감정의 영역을 넘어, 그의 전신을 타고 흐르는 살인적인 무공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부를... 모욕하지 마라."
설백현의 목에서 짐승의 것과 같은 성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신형이 흔들리는 순간, 외적인 아수라혈진의 압박과 내적인 심마의 폭주가 한계점에서 맞물렸다.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
전투 중 내적인 심마와 외적인 위기를 동시에 극복할 때 비로소 한계를 뚫고 경지가 도약하는 역천의 무공이 그의 전신에서 깨어났다.
"죽여라!"
구천마와 혈랑마(血狼魔)가 동시에 신형을 날렸다. 붉은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설백현의 목과 심장을 노려왔다. 그들의 손끝에는 사람의 뼈를 녹이는 부식성 마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설백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역천(逆天)...!"
설백현이 오른손을 들어 허공을 향해 내뻗었다. 그의 구결이 떨어짐과 동시에, 그의 등 뒤로 거대한 암흑의 손길이 형상화되었다. 역천결의 비기, 연환 수인(連環 手印)이었다.
스아아아!
사방의 공기가 진공 상태로 빨려 들어가듯 응축되었다. 쇄도하던 구천마의 안면을 설백현의 연환 수인이 그대로 움켜쥐었다.
콰직!
"끄아아악!"
단 한 번의 움켜쥠이었다. 구천마의 안면 뼈가 완전히 함몰되며 머리뼈가 바스러지는 둔탁한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비명조차 온전히 지르지 못한 채 구천마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이 무슨...!"
옆에서 습격하던 혈랑마가 경악하며 신형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설백현의 왼손이 이미 그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연환 수인의 두 번째 격(擊)이 혈랑마의 흉포를 관통했다.
쿠웅!
둔중한 타격음과 함께 혈랑마의 등 뒤로 붉은 혈무와 바스러진 척추 뼈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내력이 신형을 관통하며 심장과 오장육부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턱.
혈랑마의 시신이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기련산 오마 중 두 명이 단 한 합, 찰나의 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사마혈이 자랑하던 최정예 살수들이 낙엽보다 가볍게 바스러진 광경에 살아남은 혈염마와 나머지 두 마도의 무리는 혼비백산하여 뒤로 물러섰다.
"괴, 괴물 놈...!"
혈염마의 얼굴이 공포로 하얗게 질려갔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아수라혈진마저 설백현이 뿜어낸 역천의 기운에 균열이 가며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압도적인 무력의 시위였다. 설백현은 흘러내리는 검은 손길을 거두며 냉혹하게 그들을 응시했다.
그러나 사파의 악귀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자멸의 위기에 처하자 그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이리 죽을 바에야 모두 함께 황천길로 가자! 독인(毒人)들을 풀어라! 백화곡을 통째로 멸하리라!"
혈염마가 품 안에서 붉은 호각을 불었다.
동시에 그들의 등 뒤에서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전신이 검붉은 독창으로 뒤덮인 독인들이 숲속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퍼엉! 퍼어엉!
가공할 만한 독인 장막이 협곡 전체를 덮쳤다. 살과 뼈를 녹이는 녹색과 붉은색의 독안개가 사방으로 급격히 살포되었다.
설백현은 즉시 내력을 끌어올려 자신과 혜우의 주변에 무형의 방어막을 형성하려 했다.
그러나 사방을 메운 독안개는 단순한 독기가 아니었다. 기련산의 비전 독인들이 목숨을 갈아 넣으며 터뜨린, 영기마저 부식시키는 천하의 악독이었다.
"백현아, 조심...!"
혜우가 설백현을 밀쳐내며 은침을 날려 독안개의 흐름을 바꾸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혜우의 방어벽을 뚫고 들어온 독기의 줄기가 그녀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타격했다.
"큭...!"
혜우의 입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그녀의 가녀린 신형이 낙엽처럼 흔들리더니 이내 설백현의 품으로 쓰러졌다.
"누님!"
설백현이 급히 그녀를 안아 들었다. 혜우의 하얗고 고운 안색이 순식간에 검푸른 독기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며 맥락이 끊어질 듯 요동쳤다.
"백... 현... 아..."
혜우가 흐려져 가는 눈으로 설백현을 바라보며 손을 뻗으려 했으나, 이내 힘없이 꺾였다. 그녀의 의식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아악!
백화곡 서쪽 깊은 곳, 사부의 유해와 가문의 역대 조사들의 위패가 모셔진 조사당 방향에서 하늘을 찌를 듯한 붉은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적혈맹의 또 다른 무리들이 백화곡의 심장부에 방화를 저지른 것이다.
"조사당이...!"
혜우를 품에 안은 채, 붉게 타오르는 가문의 하늘을 바라보는 설백현의 두 눈이 핏빛으로 뒤집혔다.
심마의 폭풍이 그의 영혼을 통째로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안식처이자 최후의 보루가 불타오르고, 자신을 지켜주던 유일한 혈육인 혜우가 사경을 헤매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설백현의 전신에서 검은 마기가 폭주하듯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