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쿠구구구구!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발밑의 거친 암반이 잘게 조율된 악기처럼 파르르 떨리더니, 이윽고 뇌성(雷聲)과도 같은 폭음이 협곡의 벽을 타고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남궁휘의 손짓 하나에 매설되어 있던 벽력탄들이 일제히 화망(火網)을 터트린 것이다.

"미친놈이……!"

남궁철이 비틀거리며 비명을 질렀으나, 정작 수신호를 내린 남궁휘의 얼굴에는 광기 어린 희열만이 가득했다. 가슴팍의 깊은 자상에서 뿜어져 나온 선혈이 백색 도포를 붉게 적시고 있었음에도, 그는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하하하! 지켜보아라, 설백현! 네놈이 아무리 천하제일의 무력을 가졌 한들, 이 도도히 흐르는 영천의 수마(水魔)를 검 한 자루로 막아서진 못하리라!"

폭발은 영맥의 흐름을 뒤흔들었고, 협곡 상류에 둑처럼 고여 있던 거대한 영천(靈泉)의 수류가 무너진 제방 방벽 사이로 무섭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흙탕물과 부서진 바위 더미가 한데 뒤섞인 거대한 진흙의 파도가 백화곡 전체를 집어삼킬 기세로 밀려들었다.

이대로라면 백화곡 깊숙이 자리한 낙루암은 물론이고, 미처 피신하지 못한 백화문의 마지막 전각들까지도 흔적 없이 수장될 터였다.

절체절명의 위기. 그러나 밀려드는 수마의 포호 앞에서도 설백현의 안광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얼음판처럼 차갑게 내려앉은 그의 안면근육은 공포나 경악 따위의 감정을 일절 비치지 않았다.

스윽.

설백현이 피 묻은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걸려 나온 것은 오래되어 모서리가 닳아빠진 흑색 가죽 주머니였다. 그 안에서 한 장의 양피지 지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과거, 남궁세가의 밀수 행렬을 격파하고 그들의 가신들로부터 빼앗았던 남궁세가의 극비 보급로 지도였다.

"그것은……!"

남궁휘의 웃음소리가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그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설백현의 손에 들린 양피지 지도를 향해 굳어졌다. 가죽 표면에 선명하게 음각된 남궁세가의 쌍검(雙劍) 문양. 그것은 가문에서도 오직 가주와 후계자만이 소지할 수 있는 밀거래의 물증이자, 몰락해가는 남궁세가를 지탱하는 유일한 젖줄의 좌표였다.

"적령화(赤靈花)."

설백현의 입술이 열리며 묵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남궁의 전 재산을 털어 장강의 수로맹과 밀거래한 가공되지 않은 영초. 그것이 숨겨진 비고의 위치가 여기에 적혀 있더군."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남궁휘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가슴의 통증도 잊은 듯, 그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이 협곡을 수장시켜 백화문을 지운다 한들, 너희의 목숨줄인 적령화가 사라진다면 남궁세가는 어찌 될 것 같나? 방계들의 칼날이 네 목을 겨누고, 장강의 수로맹은 밀수 대금을 회수하기 위해 너희 세가의 기둥뿌리를 뽑아 갈 것이다."

설백현의 어조에는 감정의 고저가 없었다. 마치 정해진 미래를 낭독하는 서기(書記)처럼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그 무감각한 음성이야말로 남궁휘의 심장을 가장 잔인하게 꿰뚫는 창끝이었다.

"선택해라, 남궁휘. 여기서 협곡과 함께 몰사할 것인가, 아니면 가문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해 무릎을 꿇을 것인가."

"이, 으으윽……!"

남궁휘의 이가 뿌리째 흔들릴 정도로 맞물렸다.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거품이 되어 흘러내렸다. 오만했던 세가의 소가주가 처한 현실은 참혹했다. 가문을 살리기 위해 정파의 위선자들과 손을 잡고, 사파의 끄나풀과 밀거래를 트며 발버둥 쳤던 모든 노력들이, 단 한 장의 지도 앞에 무력하게 저울질당하고 있었다.

"폭파를…… 멈춰라."

남궁휘가 마침내 피를 토해내듯 명령했다.

"가주님! 하지만 저놈을 살려두면 어차피 가문은……!"

"멈추라고 했다!"

남궁휘의 안광에 핏발이 섰다.

그 순간을 설백현은 놓치지 않았다. 타협을 전제로 한 대화 따위는 애당초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적이 흔들리는 찰나야말로 검을 찔러 넣을 유일한 적기(適期)일 뿐.

타앗!

설백현의 신형이 벼락처럼 지면을 박찼다. 신마역천결의 보법, 역천마보(逆天魔步)가 기형적인 각도로 허공을 갈랐다. 잔상마저 남기지 않는 신속(神速)의 도약이었다.

"막아라!"

남궁철이 경악하며 검을 치켜세웠으나, 설백현의 검끝은 이미 그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간 뒤였다.

사각!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남궁세가의 정예 무인 세 명의 목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분수처럼 뿜어지는 혈우(血雨) 속에서, 설백현은 단숨에 벽력탄의 도화선이 연결된 기폭 장치 앞으로 착지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흑색 검이 무형의 검기를 발산하며 대지를 내리쳤다.

쿠르릉!

영맥 제어 장치의 핵심 톱니바퀴들이 단칼에 두 동강 나며 불꽃을 뿜었다. 굉음과 함께 울리던 폭파 기폭음이 거짓말처럼 멈추었고, 흘러내리던 흙탕물의 기세가 꺾이며 협곡 하류로 완만하게 분산되었다.

"크아아아학!"

남궁휘가 절망적인 비명을 질렀다. 속임수였다. 설백현은 협곡의 파괴를 막기 위해 지도를 미끼로 던졌을 뿐, 처음부터 남궁세가와 타협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남궁철, 가주를 데리고 퇴각해라!"

남궁세가의 늙은 가신이 피눈물을 흘리며 남궁휘의 덜미를 낚아챘다. 그러나 설백현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가죽 지도가 가리키는 서쪽, 백화곡 너머의 은밀한 암굴을 향해 있었다.

"혜우 누님."

어느새 그림자처럼 다가온 혜우가 설백현의 뒤에 섰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설백현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핏빛으로 물들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천의 무공을 무리하게 가동할 때마다 찾아오는 심마의 전조였다.

"이곳의 잔당들을 정리해 주십시오. 저는 남궁의 목숨줄을 끊어놓고 오겠습니다."

"백현아, 네 몸이……."

"시간이 없습니다."

설백현은 대답 대신 신형을 날렸다. 그의 몸이 한 자루의 흑색 화살이 되어 숲속으로 사라졌다. 혜우는 잡지 못한 그의 흔적을 바라보며, 품속에 감춰둔 빙백한령주의 파편을 꾹 쥐었다. 차가운 한기가 그녀의 손끝을 타고 흘렀으나, 떠나간 사제의 뒷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완전히 완전히 침잠해 있었다.

***

백화곡 서쪽 경계, 험준한 절벽 틈새에 숨겨진 천연 암굴.

이곳은 철저히 베일에 싸인 남궁세가의 야적장이자, 천하에서 단 한 곳에서만 자생한다는 천년 적령화(赤靈花)가 보관된 비밀 비고였다. 정문의 거대한 철문 앞에는 십여 명의 초일류 무인들이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의 도포에는 남궁세가의 문양이 아닌, 정체불명의 흑색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남궁세가가 사적으로 고용한 사파의 청부 살수들이자, 장강 수로맹의 정예들이었다.

사각.

자갈이 밟히는 소리와 함께 낙엽 타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겼다.

"누구냐!"

경계를 서던 살수 중 한 명이 도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은 목소리가 아닌 검은 바람으로 돌아왔다.

파앗!

흑색의 신형이 허공을 가르며 하강했다. 설백현의 검이 반원을 그리며 낙하하자, 기괴한 진동과 함께 검은 검기가 부채꼴로 퍼져 나갔다.

피할 틈조차 없었다. 맨 앞에 서 있던 세 명의 살수가 비명 한 마디 지르지 못하고 허리가 잘려 나갔다. 단면에 서린 검은 내력이 그들의 상하체를 순식간에 부식시키며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치이이익!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쳐라! 본진에 신호를……!"

수령으로 보이는 사내가 품속에서 신호탄을 꺼내려 했으나, 설백현의 손가락 끝에서 발사된 지풍(指風)이 그의 미간을 관통했다.

퍽!

뇌수가 사방으로 튀는 잔혹한 광경 속에서도 설백현의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그는 한 걸음씩 걸어 나갔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미려한 선이 그려졌고, 그 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오직 시체와 피의 강만이 남았다.

동작에는 추호의 낭비도 없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울대를 꿰뚫고, 심장을 파고드는 극도의 살상 병기. 그것이 신마역천결을 익힌 설백현의 검로였다.

쿵!

마침내 비고의 거대한 철문 앞에 도달한 설백현이 내력을 실어 오른발로 문을 걷어찼다.

콰아앙!

강철로 주조된 문이 찌그러지며 안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동굴 내부에서 새어 나오는 자욱한 먼지 사이로, 붉은색 광채가 설백현의 시야 가득 들이쳤다.

"……적령화로군."

동굴 사방의 석벽에 매달린 목각 상자들마다 가공되지 않은 붉은 꽃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붉은 보석을 깎아 만든 듯한 꽃잎에서는 농밀한 화양지기(華陽之氣)와 함께 정신을 아늑하게 만드는 영약 특유의 향취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남궁세가가 가문의 몰락을 막기 위해 모든 자금을 쏟아부어 확보한 최후의 자원줄이었다. 무림의 어떤 문파도 이 정도 규모의 영초를 단번에 독점할 수는 없었다.

설백현이 천천히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 소리가 동굴 벽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남궁세가의 생존을 위한 제단이, 결국 내 손에 부서지는구나."

스으으읍.

설백현이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신마역천결의 구결이 그의 뇌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체내의 마기가 요동치며, 동굴 내부에 가득 찬 적령화의 화양지기를 강제적으로 끌어당겼다.

역천의 공능이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수천 송이의 적령화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 영기가 실타래처럼 엉키며 설백현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우웅!

설백현의 전신이 붉고 검은 기류로 휘감겼다. 내단이 요동치고,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극통이 밀려왔다. 기연을 흡수하는 과정은 결코 달콤하지 않았다. 그것은 온몸의 뼈를 깎아내고 혈맥을 재배치하는 가혹한 형벌과 같았다.

"크윽……!"

설백현이 검자루를 꽉 쥐었다.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소중한 기억의 한 자락이 힘없이 바스러져 내렸다.

어린 시절, 사부 천살신마의 거친 손을 잡고 백화곡의 흐드러진 백색 꽃밭을 거닐던 기억. 사부가 건네준 투박한 목조 조각상을 보며 지었던 작은 미소. 그 따스했던 온기가 차가운 암반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흔적도 없이 증발해 버렸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기괴한 상실감. 그러나 설백현은 그 고통을 비웃듯 더욱 거세게 영기를 빨아들였다.

"사부……."

사부의 얼굴조차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유지, 백화문을 천하 정상에 세우겠다는 그 지독한 집착만은 심장에 더욱 깊이 각인되었다. 정을 잃어갈수록 광기는 더욱 선명해졌다.

화아아악!

순식간에 수천 송이의 적령화가 백색의 재가 되어 바닥으로 허망하게 흘러내렸다. 남궁세가의 백 년 대계가, 설백현의 내력을 키우는 자양분으로 철저히 가동되어 소멸한 것이다.

설백현의 눈이 떠졌다. 그의 안광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붉은 혈사(血絲)가 기괴하게 얽혀 있었다.

"끝났다."

그가 손을 뻗어 비고 내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인화 물질에 검기를 튕겼다.

화르르륵!

순식간에 번진 불길이 동굴 전체를 집어삼켰다. 남궁세가의 자금줄이자 영지 기지가 송두리째 불타오르며 잿더미로 변해갔다. 이로써 남궁세가는 단순한 자금 손실을 넘어, 장강 수로맹에 지불해야 할 막대한 채무와 신용 파탄이라는 파멸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

천하를 뒤흔들 거대한 명성의 파란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아아…… 아아아……!"

불타오르는 비고의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 모습을, 멀리 떨어진 언덕 위에서 바라보던 남궁휘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그의 무릎이 흙바닥에 사정없이 꺾였다. 명문 세가의 가주로서 품었던 모든 오만과 긍지가, 저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가주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일단 본가로 퇴각하여……!"

남궁철이 그를 부축하려 했으나, 남궁휘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퇴각? 어디로 퇴각한단 말이냐! 방계 놈들이 내 목을 노리고 있고, 수로맹의 살수들이 가문을 포위할 것이다! 저곳이 불탔으니, 우리 남궁은 이제 끝장이다!"

남궁휘의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비장한 좌절은 지독할 정도로 입체적이었다. 그는 개인의 영달이 아닌, 오직 가문의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무인이었기에 그 절망의 깊이는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저벅. 저벅.

자욱한 연기를 헤치고,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설백현이었다.

그의 옷자락은 여전히 피로 물들어 있었으나, 표정만은 기이할 정도로 평온했다. 아니, 평온하다기보다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잘 깎아 만든 석상과도 같았다.

"설백현…… 네놈은 악마다. 천살신마의 핏줄다운 저주받은 마물이야!"

남궁휘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설백현은 그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분노도, 승리자의 희열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인과율의 집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무관심뿐이었다.

"악마라……."

설백현이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 불러도 상관없다. 사부의 유해를 조사당에 합사하는 날, 강호 전체가 나를 그리 부른다 해도 내 행보는 멈추지 않을 테니."

검날이 청명한 울림을 토해내며 남궁휘의 목덜미를 향해 호선을 그렸다. 남궁세가의 마지막 불씨가 꺼지기 직전의 찰나였다.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스―

사방의 온도가 급격히 빙점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날씨가 추워지는 수준이 아니었다. 살을 깎아내는 듯한 지독한 음기(陰氣)와 함께, 사방의 나뭇잎들이 핏빛으로 물들며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설백현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이 지독한 혈향은……."

어둠이 내려앉은 숲속, 다섯 개의 거대한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나타나 그들을 포위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남궁세가의 고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전장에서 가공된 절대적인 마기(魔氣)였다.

"남궁의 조무래기들이 결국 일을 그르쳤구나."

어둠 속에서 흘러나온 기괴한 음성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사마혈 맹주께서 보내신 우리를 이렇게 맞이하다니, 예의가 도를 넘었군. 천살신마의 유일한 제자여."

적혈맹 최정예, 오마(五魔) 군단이 마침내 백화곡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것이다.

피로 얼룩진 협곡에 새로운 적혈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설백현은 차갑게 가라앉은 안광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검자루를 더욱 굳게 쥐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