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신호탄이 밤하늘의 장대비를 가르며 솟구쳐 올랐다. 콰르릉! 뇌성보다 더한 폭음이 협곡을 뒤흔들고, 절벽 위를 수놓은 수십 개의 횃불이 일제히 요동쳤다. 사나운 빗줄기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특제 유지(油脂)의 불꽃이 설백현의 창백한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가주님께서 네놈들이 흑혈표식을 역이용해 이쪽으로 올 것을 진작에 예측하셨다. 감히 남궁의 포위망을 우습게 보고 기어 나오다니, 오늘이 바로 네놈의 제삿날이다!"

남궁세가의 정예 호위대장 남궁철의 사나운 고함이 협곡 사이에 메아리쳤다. 사방이 깎아지른 듯한 절벽, 퇴로는 이미 차단되었고 위에서는 서른 명이 넘는 철혈봉쇄대의 검날이 빗물을 받아 번득이고 있었다.

그러나 설백현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다. 그는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의 힘을 툭 빼며, 젖은 머리칼 사이로 남궁철을 건너다보았다. 그 시선의 끝은 남궁철의 뒤편, 어둠 속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던 한 사내에게 닿았다.

"예측(預測)이라."

설백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베어 나왔다.

"남궁세가의 영명함이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단 말인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남궁철이 검을 비껴 세우며 일갈했다. 그 순간, 절벽 뒤편의 숲속에서 기괴한 단침(斷沈)의 소리가 들려왔다.

끄으윽! 컥!

횃불을 들고 서 있던 철혈봉쇄대의 무인들 중 몇몇이 갑자기 목을 움켜쥐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들의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는 빗물에 씻기기도 전에 시커먼 검은색으로 변해 바닥을 적셨다.

"이, 이게 무슨 일인가! 주강의 독이 어찌하여……!"

남궁철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설백현은 품속에서 붉고 검은 기운이 서린 작은 패편을 꺼내 보였다. 사마혈의 최측근 첩자 주강이 백화곡 내부에 남겨 두었던 은밀한 독문 '흑혈표식(黑血標式)'. 그리고 그 표식에 깃든 파혈독(破血毒)을 제어하는 매개체였다.

"주강이 이 곡 내에 심어둔 흑혈표식은 단순한 길잡이가 아니다. 특수한 파혈독을 기화시켜 아군을 몰살하려던 적혈맹의 수작이었지. 허나, 독이란 흘러가는 물과 같아 길을 바꾸면 시전자를 삼키는 법."

설백현이 싸늘하게 속삭였다.

그는 이미 주강을 제압했을 때 파혈독의 성질과 해독법을 완벽히 간파했다. 단순히 독을 제거한 것이 아니었다. 흑혈표식의 독성 배열을 역으로 뒤틀어, 적혈맹과 결탁한 남궁세가의 매복 조들이 기화된 독을 마시도록 역류시켜 두었던 것이다. 배후에서 독을 주입하던 적혈맹의 공급망은 이미 그들이 뿌린 독에 중독되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중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감히 우리를 기만했구나!"

남궁철이 이를 갈며 신형을 날리려던 찰나였다.

"물러서라, 철(鐵)."

묵직하고도 격조 높은 목소리가 절벽 위를 무겁게 가라앉혔다.

횃불의 붉은 장막을 가르고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백색 도포에 청색 띠를 두른 사내. 빗속에서도 한 터럭의 흐트러짐 없는 기품을 유지하고 있는 자, 남궁세가의 차기 가주 남궁휘였다.

그의 눈빛은 거만함 대신 가문의 사활을 짊어진 자 특유의 처절한 집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방계들의 끊임없는 암투와 자원 부족으로 몰락해가는 남궁세가를 구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온 생을 걸고 이 자리에 섰다.

남궁휘는 설백현의 품속에 있는 흑혈표식을 슬쩍 바라본 뒤, 나지막이 말했다.

"사마혈의 사냥개가 뿌린 독수마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놀리다니. 백화문에 이런 기재가 숨어 있었을 줄은 몰랐군. 허나, 잔꾀로 목숨을 연명하는 것도 여기까지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 사파의 독수까지 묵인하는 남궁세가의 가주가 할 소리는 아닌 듯싶은데."

설백현의 어조에는 비아냥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극도의 무미건조함만이 서려 있었다.

남궁휘의 눈썹이 꿈틀했다.

"세가의 생존은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대업이다. 명예 따위는 가문이 살아남은 뒤에 씻어도 늦지 않다. 네놈이 품고 있는 적령화(赤靈花)의 지도와 백화곡의 영맥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기꺼이 천하의 비난을 감수하리라."

적령화.

남궁휘가 몰락하는 세가를 지키기 위해 가문의 비고를 모두 털어 밀수하려 했던 가공되지 않은 신비의 영초였다. 설백현은 이미 그 밀거래 지도를 탈취하여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었다. 남궁휘의 가장 아픈 목줄을 쥐고 있는 셈이었다.

"그 지도가 가문의 구원이라 믿는가. 그것은 너희 남궁을 파멸로 이끌 족쇄일 뿐이다."

설백현이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검신이 칼집을 빠져나오는 순간, 빗방울이 칼날에 닿아 사방으로 튀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빙백한령주의 파편이 차갑게 진동하며, 그의 뇌해에 잠들어 있던 신마역천결(神魔逆天訣)의 폭력적인 진기를 일깨웠다.

사부와의 기억, 따스했던 추억들이 또 한 겹 마모되어 먼지처럼 사라지는 고통이 뇌리를 스쳤다. 사부의 얼굴이 흐릿해질 때마다 설백현의 심장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공동(空洞)이 생겨났다. 그 아픔을 메우기 위해, 그의 눈동자는 한층 더 차갑고 비정한 짐승의 빛으로 변해갔다.

"온다."

남궁휘가 검을 검집에서 반쯤 뽑아내며 신형을 낮췄다.

파아앗!

설백현의 신형이 빗줄기를 가르며 절벽 위로 쏘아 올려졌다. 그것은 무인의 도약이라기보다는, 먹잇감을 향해 짓쳐 드는 밤의 맹수에 가까웠다.

남궁휘 역시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공중에서 두 사내의 검이 격돌했다.

캉! 콰아앙!

기합 소리조차 없는 침묵의 충돌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전무공인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의 정묘한 검로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검기가 비바람을 찢으며 백색의 선을 그렸고, 설백현의 역천결 진기는 칠흑 같은 검은 광풍이 되어 그 백색 선들을 닥치는 대로 짓밟아 뭉개버렸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순간, 남궁휘는 설백현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것은…… 사람의 눈이 아니다.’

남궁휘의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그 눈동자에는 분노도, 살기도, 미움도 없었다. 오직 눈앞의 적을 소멸시키겠다는 절대적인 의지만이 기계적으로 번득이고 있었다. 얼어붙은 짐승의 눈.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무인의 극한.

"하압!"

전율을 떨쳐내기 위해 남궁휘가 기합을 지르며 검세를 더욱 넓혔다.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 방계들의 비웃음을 잠재우고 남궁의 깃발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그의 검 끝에 서린 검강이 대낮처럼 밝게 빛나며 설백현의 흉부를 향해 쇄도했다.

그때였다.

쉬이익!

절벽 뒤편, 횃불의 그림자 속에서 서너 명의 철혈봉쇄대 무인들이 설백현의 등 뒤를 노리고 기습적으로 장창을 내뻗었다. 치졸한 협공이었으나, 남궁휘의 맹렬한 검세에 막혀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는 설백현에게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청아한 검풍이 불어왔다.

서걱! 서거걱!

"아악!"

등 뒤를 노리던 무인들의 손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빗물 섞인 혈우(血雨)가 내리는 가운데, 백색 무복을 입은 여인이 검을 휘두르며 우뚝 섰다. 혜우였다.

"백현아, 뒤는 걱정하지 마라!"

혜우의 목소리는 비바람 속에서도 또렷하게 설백현의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설백현의 광기와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인간성을 잃어가는 절망적인 무공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거릴 때마다, 그녀는 기꺼이 그의 등 뒤를 지키는 닻이 되고자 했다.

설백현의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동문에 대한 신뢰, 전우로서의 희미한 유대감. 신마역천결의 차가운 진기 속에서 아직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는 마지막 온기가 그의 이성을 붙잡았다.

‘잃지 않는다. 아직은…… 지워지게 두지 않겠다.’

사부와의 추억은 흐려졌을지언정, 눈앞의 사문을 지키겠다는 집착만은 그의 전신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고맙습니다, 사형."

설백현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그의 검세가 완전히 바뀌었다.

고요하던 검풍이 일순간 폭풍으로 화했다. 신마역천결 2성의 진기가 검신을 타고 흐르며 역천(逆天)의 살상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남궁휘는 직감했다. 지금 막지 못하면 가문의 미래는 여기서 끝난다는 것을.

"제왕무형(帝王無形)!"

남궁휘가 남궁세가 최고의 비전 초식을 전개했다. 검의 형체가 사라지고, 오직 무형의 검기가 사방을 촘촘한 그물처럼 에워싸며 설백현을 압박했다. 절벽의 바위들이 무형의 검세에 깎여나가며 돌가루가 빗물과 함께 휘날렸다. 가문의 모든 염원과 생존의 갈망이 담긴, 남궁휘 일생일대의 절창(絶唱)이었다.

그러나 설백현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형의 검그물 속으로 정면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각, 사각.

옷자락이 찢겨 나가고 피부가 갈려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설백현의 발걸음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역수(逆手)―― 무량(無量)."

설백현의 검이 아래에서 위로, 기이한 궤적을 그리며 솟구쳤다. 남궁세가의 제왕무형검이 지닌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천살신마의 역천적 살상력이었다.

콰아아앙!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백색의 무형검기가 산산조각이 나며 공중으로 흩어졌다.

"크윽?!"

남궁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떠졌다.

그의 눈앞에서, 설백현의 검날이 남궁세가의 가보이자 명검인 창천검의 검 끝을 정면으로 타격했다.

쨍강!

맑은 쇠붙이 소리와 함께 창천검의 전반부가 동강 나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그 지독한 검세의 잔여 기운이 남궁휘의 신형을 그대로 관통했다.

푸하악!

남궁휘의 입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화려한 백색 도포가 붉은 혈사(血絲)로 엉망이 되며, 가슴팍에 깊고 붉은 자상이 새겨졌다. 남궁휘의 신형이 절벽 바닥을 쓸며 수십 보를 뒤로 밀려났다.

"가주님!"

남궁철이 경악하며 남궁휘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남궁세가의 정예 고수들이 일제히 설백현을 향해 검을 겨누었으나, 그들의 손은 이미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설백현은 검을 비스듬히 내린 채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옷자락에서는 적들의 피와 자신의 피가 섞여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생존은 여기까지다. 적령화도, 이 백화곡의 영맥도 너희의 것이 될 수 없다."

설백현의 목소리는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다.

가슴을 움켜쥔 채 피를 토해내던 남궁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붉은 피가 가득 묻어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입꼬리는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패배자의 절망 대신, 광기 어린 미소가 그의 얼굴에 가득 피어났다.

"하하…… 하하하!"

남궁휘가 광소했다.

"과연 괴물이군. 백화문에 이런 괴물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허나, 설백현……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가문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던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남궁휘가 피 묻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끝이 향한 곳은 설백현이 아니라, 협곡 깊은 곳, 백화곡의 모든 영기가 모여드는 영맥의 원천이었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 백화문과 함께 이 협곡 전체를 수장시켜라!"

남궁휘가 치켜든 손을 매섭게 아래로 내리치며 수신호를 보냈다.

그 순간, 협곡 깊은 곳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진동이 대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남궁세가가 미리 매설해 둔 벽력탄과 영맥 제어 장치가 기폭하는 소리였다.

쿠구구구구!

절벽의 바위들이 무너져 내리며, 백화곡의 거대한 영천(靈泉)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수장(水葬)의 거대한 파도가 그들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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