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가 꺼진 것도 아닌데 집 안의 온도가 급격히 내려앉는다. 입을 틀어막은 손끝에서부터 허연 김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섭씨 24도를 가리키던 거실의 벽걸이 조절기 온도가 기괴한 속도로 뚝뚝 떨어진다. 18도, 12도, 그리고 마침내 4도. 벽장 너머 콘크리트 깊은 곳에서부터 얼어붙은 흙냄새와 비린 구리 향이 배어 나온다. 도심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 이곳이 공동묘지이자 상여가 머물던 축축한 골짜기였다는 가문 고서의 기록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었다.
바로 옆, 잠긴 화장실 문틈으로 희미한 불빛과 함께 스마트폰 진동음이 가늘게 울린다.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액정을 확인한다. 동생 민아의 메시지다.
[오빠, 나 화장실인데 변기 물이 새까맣게 역류해. 물 내릴까? 아니면 그냥 둘까?]
이 와중에 물 내릴 걱정이라니. 기가 막히면서도 지독하게 현실적인 질문에 격하게 날뛰던 심박수가 기묘하게 진정된다. 당신은 떨리는 손으로 답장을 적어 보낸다.
[절대 내리지 마. 세면대에 얹어둔 소금 묻은 yellow 수건으로 변기 뚜껑부터 덮고 눈 감고 있어.] [알았어. 근데 밖에서 자꾸 문 두드려. 오빠야?]
답장을 확인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는다. 현관 안쪽, 얇은 중문 너머로 철썩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놈의 정체는 축축한 기운을 품은 잡귀다. 젖은 석회를 질질 끄는 듯한 눅눅한 마찰음이 복도를 지나 당신이 숨은 안방 문 앞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소리를 내선 안 된다. 놈은 눈이 없는 대신, 옷깃 스치는 소리마저 집어삼킨다.’
가문의 안살림 계율에 적힌 구절이 머릿속을 스친다.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놈이 마침내 당신이 숨어 있는 안방 문 바로 앞에 멈춰 선다. 삐걱거리는 마루판의 비명이 단 두 뼘 거리에서 뚝 끊겼다.
가느스름한 문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사람의 발이 아니었다. 검푸르게 늘어난 손가락 끝이 문고리를 향해 허공을 더듬으며 슥슥 긁는 소리를 낸다. 바스락거리는 옷깃 마찰음 한 번, 혹은 삼키지 못한 침묵의 침 한 모금만으로도 문짝은 단숨에 부서질 것이다. 숨이 가빠오고 허파가 찢어질 것만 같은 한계의 순간, 당신은 이 미치도록 고요한 대치 상태를 깨뜨릴 방법을 필사적으로 강구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