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환구단(圜丘壇)의 높은 제단 위로 푸른 번기(幡旗)가 가을바람을 맞아 장엄하게 펄럭입니다. 제단 주위로는 황금색 보갑을 입은 시위 친군(侍衛親軍)들이 신식 맥심 기관총과 황동제 레버액션 소총을 굳건히 쥐고 도열해 있으며, 수만 명의 백성이 숨을 죽인 채 역사적인 순간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 황금빛 광채를 뿜어내는 황룡포를 입고 천단(天壇)의 가장 높은 제단 위에 서 있습니다.

불과 십여 년 전, 서방의 조병창에서 시작된 미약한 철의 울림이 강토 전체를 뒤흔들고 마침내 천하의 격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평양성 앞벌을 붉게 물들였던 청국 10만 대군의 시신과, 강화도 외해에서 아군 화포의 무자비한 궤적을 보고 돛을 돌려 달아났던 영국 동양함대의 오만함이 모두 이 순간을 위한 초석이었음을 조정의 완고한 사대부들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구축한 철과 무연화약의 질서는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열강들의 탐욕을 잠재우고 사직을 지켜낸 가공할 만한 대도(大道)였습니다.

청국의 사신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항복의 조서를 올립니다. 만주 벌판을 지켜주던 조공의 맹약은 깨어졌고, 이제 대륙의 지배 세력은 황해를 건너온 조선의 총구 아래 굴복했음을 자인한 것입니다. 서양의 공사들 역시 더 이상 조선을 가난하고 연약한 동방의 은둔국으로 다루지 못합니다. 영국과 러시아의 전권공사들이 차례로 허리를 굽혀 신생 제국의 황제인 당신에게 동등한 국격으로서 알현의 예를 갖춥니다. 제단의 연기 너머로 보이는 가을 하늘은 무기 공학자로서 당신이 처음 이 땅에 눈을 떴을 때보다 훨씬 더 높고 푸릅니다.

"천지가 개벽하고 일월이 새로이 밝았으니, 국호를 대조선제국(大朝鮮帝國)이라 하고 원년을 광무(光武)라 선포하노라."

당신의 목소리가 백성들과 군사들의 함성 속에 녹아들어 온 도성에 울려 퍼집니다. 만조백관이 일제히 엎드려 천세를 외치고, 도성 바깥의 신식 대포들이 제국의 탄생을 축하하는 예포를 쏘아 올립니다.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우는 듯한 그 포성은 과거의 두려움이 아닌, 조선이 움켜쥔 압도적인 과학과 힘의 상징입니다.

당신은 가만히 손을 뻗어 황제의 백옥인을 쥡니다. 차가운 옥새의 감촉 뒤로, 당신이 설계하고 이 땅의 민초들이 두드려 만든 수만 자루의 총기와 화포가 조선의 국경을 철통같이 호위하고 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위정자들의 논쟁은 화력 앞에서 종식되었고, 백성들의 불안은 제국의 권세 뒤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마침내 당신은 역사의 거장으로서, 이 대지를 영원한 대조선제국의 번영으로 이끌어갈 절대적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하늘 아래 오직 우리만의 화력과 의지가 온 세계의 질서를 재편해 나갈 찬란한 신세기, 그 첫날의 해가 당신의 머리 위로 장엄하게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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