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왕도를 진동케 한 격변의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서북의 강포한 화력으로 조정을 장악한 당신의 발밑으로 새로운 격랑이 밀려옵니다.

서해의 관문인 제물포 앞바다, 붉은 노을이 머무는 수평선 너머로 시커먼 석탄 연기를 뿜어내는 철갑 거함들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미합중국의 국기를 게양한 태서 제국(泰西諸國)의 연합 함대 여덟 척이 강화도 외해에 닻을 내렸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새로이 개편되던 어전회의는 순식간에 얼어붙습니다.

조정의 사대부들은 사색이 되어 웅성거립니다. "서북의 가당치 않은 군공과 괴력의 기계로 사직의 명맥을 흔들더니, 끝내 양이(洋夷)들의 거대한 포탄을 불러들여 파국을 자초하는구나!" 예조와 이조의 척화파 대신들은 일제히 엎드려 통곡하며, 당장 서북의 신식 무장력을 해체하고 황급히 머리를 숙여 서구의 요구를 전면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당신을 따르며 과학의 힘을 목도한 평안도 출신의 신진 관료들과 무장들은 분개하며 칼자루를 쥐어잡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서구 열강의 무력 시위가 조선의 주권을 찬탈하기 위한 야만적인 공갈로 보일 뿐입니다.

당신은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강화 요새의 임시 지휘소 보루 위에 섭니다. 가슴팍에 품은 회중시계의 초침 소리가 전장의 대고(大鼓)처럼 일정하게 고동칩니다. 서구의 함포가 뿜어낼 주포의 사정거리와 이편의 포강 능력을 비교한 비밀 보고서가 당신의 손 안에서 바스락거립니다. 저들은 조선의 정권 교체기라는 혼란을 틈타 압도적인 화력을 과시함으로써 이 땅의 이권을 통째로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저들이 자랑하는 잔혹한 '포함 외교(砲艦外交)'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외세의 제독들은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평양 기창(平壤器廠)의 용광로를 밤낮으로 가동해 완성한 비밀 병기, 조선의 험난한 조류와 만나 치명적인 위력을 발휘할 '해안 어뢰포'와 신형 '수중 기뢰'가 이미 경기 해역 밑바닥에 복병처럼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도성 안의 백성들은 이 거대한 힘의 대치 속에서 숨을 죽인 채 피난길을 준비하고, 조정은 외교적 굴종과 군사적 파멸의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합니다. 양이들의 전령이 보내온 통첩 서한의 기한은 이제 단 반 시진도 남지 않았습니다. 서북의 참된 위력을 적들의 함대에 똑똑히 각인시킬 것인가, 아니면 대조선의 법통을 문명국의 격식에 맞추어 개편하여 저들의 침략 명분을 꺾을 것인가.

당신은 바다를 향해 겨누어진 차가운 철탑의 조정간을 쥔 채, 역사적 결단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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