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를 침탈하려던 청국의 전선들은 대영제국의 동양함대가 황해에 자욱한 연무를 뿜어내며 출현하자 서둘러 치도곤을 당하듯 물러갔도다. 그러나 공짜로 얻어지는 외교적 시혜란 존재하지 않는 법. 영국의 공사관이 보낸 특사들이 건넨 조약의 초안은, 구원을 가장한 또 다른 예속의 족쇄에 다름없었으니, 그들이 제시한 이른바 ‘조영통상수호조약’의 이면에는 독점이권과 영토 조차(租借)를 명시한 북방 보호국화의 계략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리상의 이점을 탐하는 서구 열강의 이빨이 마침내 조선의 목덜미에 닿은 형국이라.
당신은 평안도 관찰사영의 집무실, 화력 발전에서 뿜어 나오는 미지의 온기가 흐르는 방 안에서 영국의 오만한 요구서를 노려본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석탄재와 철강의 비린 향이 조선의 격변을 증명하듯 요란하나, 군사적 자립이 완전히 완성되기도 전에 제국주의의 탐욕이 먼저 국경을 넘어 당도한 것이다. 영국인들은 외교적 독점권을 장악하고 조선을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삼아 아시아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편입하려 획책하고 있다. 조정의 사대부들이 서양 오랑캐를 배척하는 척화(斥邪)의 격문을 올리며 조정 내부에서 역모를 획책하는 신하들과 권력 투쟁만을 일삼는 사이, 진정한 국치(國恥)의 음모는 이 격리된 집무실 탁자 위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긴장의 한복판, 국경을 수호하는 초소를 거쳐 한 통의 밀서가 당신의 손에 극비리에 당도한다. 굳게 닫힌 봉인을 부수자 드러난 것은 아라사(俄羅斯, 러시아) 남하 정책의 총책이 보낸 탐색의 서신이었다. 영국의 독주를 결코 묵과하지 않겠다는 짜르의 야욕, 그리고 대영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비밀 군사 협정을 체결하겠다는 유혹적인 밀약이 행간마다 스며 있었다. 북방의 거대한 곰 역시 한반도의 부동항과 신식 화력에 대한 탐욕을 숨기지 않은 채, 영국의 세력 범위를 잠식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의 패권을 두고 대치하는 두 거대 야수가 동시에 당신을 향해 붉은 눈을 밝히는 엄혹한 정치적 국면. 사관(史官)들의 붓끝이 역사의 변곡점을 기록하듯 떨리는 이 순간, 당신은 비밀리에 완성해 둔 독점적 기술의 설계도와 병기창의 무장력을 떠올린다. 이들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려 자멸을 유도할 것인가, 혹은 미래의 기술 권리를 영리하게 분할하여 자본의 동맹을 묶어낼 것인가. 두 마리 늑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당신의 손끝을 주시하는 가운데, 마침내 결단을 내릴 침묵의 시간이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