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북방의 만주 벌판을 장악한 대청(大淸)의 황 기치 아래, 십만 대군이 마침내 임진강과 압록강의 차가운 물살을 가르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변방에서 날아든 파천의 파발들이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비명을 지르며 질주하고, 평양의 백성들은 전란의 참화가 다시금 이 땅을 피로 물들일 것이라 여겨 가산을 버려둔 채 사방으로 흩어지니, 민심의 요동함이 실로 극에 달했다.

그러나 조선의 서변 영지를 장악하고 근대의 불씨를 지펴온 당신은 결코 동요하지 않는다. 평양성 내부, 철저히 통제된 무기고 안에서 과학의 진수이자 근대 무장력의 결정체들이 서늘한 금속음을 내며 출격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도검찰사(都檢察使)를 비롯한 사대부들은 성루에 올라 기가 질린 육성으로 당신에게 간언한다. "대공, 저들의 기병은 천하를 종횡무진한 팔기(八旗)요, 그 수가 십만에 달하옵니다. 어찌 서양의 괴력난신(怪力亂神)과도 같은 사술(邪術)에 사직의 명운을 맡기고 농성하려 하십니까? 지금이라도 남방의 군세를 불러 모아 도성으로 후퇴하심이 가한 줄 아뢰옵니다."

사대부들의 명분론과 불신은 뿌리 깊었으나, 당신은 묵묵히 동쪽 성벽에 배치된 서양식 무기들을 가리킬 뿐이다. 규격화된 수작업과 철제 가공 공정으로 태어난 정밀한 유선 야포들, 그리고 장갑판을 덧댄 기갑 거치대 위에서 그 위용을 뽐내는 개틀링 건들이 포신을 적의 예상 진격로로 정교하게 조율하고 있다. 이는 유학의 도리나 황조에 대한 사대가 아닌, 물리 법칙과 철의 힘으로 대륙의 폭력을 짓누르겠다는 당신의 무언의 선언이다.

땅을 울리는 수만 마리 전마의 말구비 소리가 평양성 북방의 지평선을 새까맣게 물들이기 시작한다. 청나라의 선봉대가 시야에 들어오는 일촉즉발의 순간이다. 적들은 전통적인 조선의 성벽 방어 체계를 우습게 여기며, 일거에 평양성을 무너뜨리고 한양으로 진격할 형세로 군세를 사방으로 넓게 펼치고 있다.

성하(城下)의 대동강 물줄기에는 당신이 극비리에 완공한 증기선 함대 역시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출격의 고동을 울리기 시작한다. 이제 서변의 향방을 가르고, 조선이 세계의 열강들과 대등하게 마주 서는 교두보를 마련할 대결전의 시간이 당도했다.

당신은 북녘의 먼지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적의 심장에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화력의 방향을 결정하고자 명령을 대기 중인 군관들을 엄숙히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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