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세운 강철의 성벽은 기어이 서구 열강의 거친 압박을 물리치고 조선의 사직을 보전하는 데 성공한다. 신식 화포의 포효 속에서 이방의 군함들은 먼바다로 쫓겨갔고, 요동을 경계로 삼은 군단의 기치는 천하에 범접할 수 없는 위용을 떨친다. 그러나 그 찬란한 승리의 대가로 이 땅에 내려앉은 것은, 온 국토를 옥죄는 서슬 퍼런 침묵뿐이다.
조정은 더 이상 예법과 도리를 논하던 사대부의 전당이 아니다. 당신이 단행한 사천(私天)의 군제 개혁과 외법(外法)을 모방한 기술 유출 서약은, 조선을 거대한 무장 병영으로 개조하고 만다. 도성 한복판을 통행하는 백성들은 서로를 불신 가득한 눈초리로 흘겨보고, 포도청을 개편한 신식 사찰관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골목마다 배치되어 감시의 촉수를 뻗친다. 이웃이 이웃을 밀고하고, 일가친척이 서로를 고발하는 비정한 밀고의 그물이 팔도 강산에 거미줄처럼 드리운다.
서북의 철공소에서 발흥한 첨단 무기 제작 비법은 이제 국가 최고 권력의 원천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금기다. 이를 수호하기 위해 당신이 선포한 엄격한 통제령은 만기(萬機)를 친히 살피던 국왕의 친정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오직 철혈의 군율만을 숭상하는 기이한 독재 공화정의 비극을 낳는다. 의정부의 백관들은 숨을 죽인 채 당신이 장악한 군부의 눈치만을 살피고, 대명률을 대신한 군국조례는 선비들의 붓끝마저 강제로 꺾어놓아 공론(公論)의 광장은 황폐하게 메말라간다.
당신은 삼군부의 가장 높은 누각 위에 올라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도성을 내려다본다. 등불마저 군사적 통제 아래 하나둘 꺼져가 어둠에 잠긴 한양은, 마치 거대한 석조 무덤처럼 고요하다. 군신 간의 예의와 백성의 풍류가 흐르던 아침의 나라는 흔적도 없고, 오직 화약 냄새와 검은 태탄을 제련하는 매연만이 차가운 밤하늘을 무겁게 덮을 뿐이다.
외적으로부터 사직을 지켰다는 영광은 속이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이 땅의 민초들은 이제 보이지 않는 창살 속에 갇힌 죄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며, 숨죽인 탄식만을 허공에 흩뿌린다. 압도적인 화력과 바꾼 만인에 대한 만인의 감시 체제. 당신이 이룩한 강철의 제국은 결국 가두어 둔 괴수가 되어 스스로의 영혼을 잠식하는 파멸의 그늘 아래 영원히 침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