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후반 15분, 최강식 감독의 수신호와 함께 태성이 축구화 끈을 동여매며 그라운드로 진입하자, 야유와 기대가 경기장 전체에 맴돌았다.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관중들의 함성과 함께, 일본 원정 응원단 쪽에서는 날카로운 야유가 쏟아져 나왔다. 전광판의 스코어는 0 대 1. 한국이 한 골 차로 뒤진 채 끌려가는 상황이었다. 잔디 위에 발을 디디는 순간, 훅 끼쳐오는 밤공기는 차가웠으나 그라운드의 열기는 살갗을 태울 듯 뜨거웠다.

태성은 가볍게 제자리뛰기를 하며 오른발 발목의 감각을 조율했다. 회귀 이후 온전하게 돌아온 발목이었지만, 한일전이라는 중압감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과부하의 공포는 미세한 긴장감으로 화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야.”

그때, 나직하고 쉰 목소리가 태성의 고개를 돌리게 했다. 푸른색 유니폼을 입은 일본의 센터백 타카하시였다. 그는 태성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문은 들었다고. 한국의 천재 어쩌고 하던데, 발목 수술 환자 아니냐?”

타카하시는 노골적으로 태성의 오른쪽 발목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옆에 서 있던 수비형 미드필더 사토 역시 코웃음을 치며 일본어로 거들었다.

“유리 발목이 여기까지 기어 나왔네. 툭 치면 뼈째로 바스러지는 거 아냐? 살살 뛰어라. 또 실려 가기 싫으면.”

거친 도발이었다. 전생의 끔찍했던 분쇄 골절의 기억이 뇌리를 스치며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가 일었지만, 태성은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았다. 주먹을 쥐는 대신, 그의 입꼬리가 매끄럽게 올라갔다.

“경기 끝나고 니들 무릎이나 걱정해.”

“뭐라고?”

“부러지는 건 내 발목이 아니라, 니들 자존심일 테니까.”

태성은 대꾸를 마친 뒤 곧바로 전방으로 침투했다. 그의 눈앞에 푸른빛을 띤 ‘미래 전술 장부’가 반투명한 홀로그램처럼 그라운드 전체를 덮으며 구동되었다.

[발목 과부하 게이지: 25%]

아직은 여유가 있다. 하지만 한 번의 급격한 돌파나 방향 전환만으로도 게이지는 폭발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철저히 동료를 기용하고, 그라운드 위의 체스를 두듯 상대를 요리해야 했다.

경기가 재개되었다. 일본은 선제골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수비 라인을 내리고 촘촘한 두 줄 수비를 구축했다. 한국의 미드필더진이 공을 돌리며 빈틈을 노렸으나, 일본의 전방 압박은 조직적이고 끈질겼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잡은 백승우에게 일본 미드필더 두 명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승우의 신체 균형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압박의 그물망이 좁혀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승우가 고개를 들지도 못한 채 전방의 태성을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툭.

둔탁한 타구음과 함께 공이 굴러갔다.

“아, 패스 미스 아닙니까! 너무 짧아요!”

중계석의 캐스터가 탄식을 내뱉었다. 공의 궤적은 침투하는 태성의 발끝이 아니라, 일본 수비수가 먼저 걷어내기 딱 좋은 애매한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수비 압박에 밀려 골반이 미세하게 틀어지는 승우의 고질적인 버릇이 고스란히 묻어난 패스였다.

일반적인 공격수라면 동료의 패스 미스에 짜증을 내며 멈춰 섰을 상황. 실제로 일본 센터백 타카하시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공을 차단하기 위해 앞으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태성의 눈앞에는 이미 장부의 붉은색 경고와 함께 예측 경로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백승우: 압박 상태에서 전방 패스 시 미세한 골반 축 불균형 발생. 공의 낙하지점이 본래 목표보다 1m 짧게 떨어짐.]

태성은 알고 있었다. 승우가 압박을 받을 때 찌르는 패스는 언제나 목표보다 정확히 1미터 짧게 떨어진다는 것을.

‘지금이다.’

태성은 수비수의 뒤 공간이 아닌, 공이 떨어질 수비수 앞쪽 1미터 공간으로 튕기듯 기민하게 몸을 던졌다. 동료의 패스가 짧게 떨어질 것을 백 퍼센트 확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역방향 스타트였다.

“뭐, 뭐야?!”

타카하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태성은 수비수보다 반 박자 빠르게 공의 낙하지점에 안착했다. 날아오는 공을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가볍게 긁어내며 몸을 빙글 돌렸다. 단 한 번의 터치로 자신을 압박하던 수비수를 완전히 바보로 만드는 턴 동작이었다.

[발목 과부하 게이지: 28%]

오른발 발목 안쪽에서 찌릿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급격한 방향 전환이 유발한 물리적 과부하였다. 하지만 태성은 통증을 무시한 채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시야가 황금빛 패스 루트로 가득 찼다.

일본의 왼쪽 풀백이 당황해 중앙으로 좁혀 들어오는 순간, 반대편 측면 공간이 고속도로처럼 넓게 열렸다. 그곳으로 홍창민이 미친 듯한 속도로 스프린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보인다.’

완벽한 어시스트 경로.

태성은 몸을 연 방향 그대로, 오른발 안쪽을 이용해 가볍고 정확하게 공을 밀어 넣었다. 구르는 공의 궤적은 일본 수비진 전체를 관통하며 홍창민의 달리는 속도에 맞춤형으로 배달되었다.

창민의 발끝에 공이 자석처럼 달라붙었다. 골키퍼와 1 대 1 기회. 창민은 망설이지 않고 오른발을 휘둘렀다.

퍼억!

묵직한 파열음과 함께 공은 일본의 골망 구석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골!!! 동점골입니다! 홍창민의 환상적인 마무리! 하지만 그 전에 강태성의 믿을 수 없는 턴 동작과 패스가 있었습니다!”

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붉은 악마들의 함성이 밤하늘을 흔들었다.

그 순간 태성의 시야에 푸른색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팀 케미스트리 버프 발동: 동료와의 완벽한 유기적 연계 플레이 성공.] [발목 과부하 게이지가 50%만큼 감소합니다.] [현재 발목 과부하 게이지: 14%]

뜨겁게 타오르던 발목의 열감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시원한 청량감이 감돌았다. 사령관형 스트라이커로서 그라운드를 지배하는 규칙이 완벽하게 들어맞은 순간이었다.

“악! 미친 새끼!”

골을 터뜨린 홍창민이 관중석을 향해 포효하다가, 이내 방향을 틀어 태성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평소 태성의 독단적인 성격을 싫어하며 늘 으르렁대던 라이벌의 얼굴에 흥분과 전율이 가득했다.

창민은 태성에게 달려와 그의 뒤통수를 기분 좋게 팍팍 문질렀다.

“너 진짜 뭐냐? 미스 패스인 줄 알았는데 그걸 예측하고 들어가? 게다가 이 패스 궤적은 대체 뭐냐고!”

거친 말투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경외심과 절대적인 신뢰가 담겨 있었다. 태성은 그의 거친 손길을 귀찮다는 듯 쳐내면서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넣어줬으면 고맙다고 절이나 해.”

“하! 이 새끼 싸가지 없는 건 여전하네! 그래도 진짜 끝내줬다!”

창민이 태성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뒤늦게 달려온 백승우 역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태성을 바라보았다.

“태성아, 내 패스가 짧을 걸 알고 있었어?”

“어. 네 골반이 틀어지는 각도만 봐도 어디로 떨어질지 다 보여. 다음엔 좀 더 길게 밀어줘라.”

태성의 무심한 대답에 승우는 전율을 느낀 듯 가볍게 몸을 떨었다. 자신의 미세한 신체적 단점마저 완벽하게 분석하고 기회로 창출해 낸 태성의 천재성에 온몸의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벤치에 있던 최강식 감독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태성의 플레이를 매섭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태블릿 PC에는 태성이 구현해 낸 움직임이 실시간 데이터로 기록되고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 아니야. 낙하지점을 완전히 예측하고 움직였어.”

최 감독의 중얼거림에 코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성은 스스로의 가치를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증명해 내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점을 허용한 일본 벤치가 급박하게 움직였다. 감독의 거친 고함과 함께 일본의 전술이 급격하게 수정되는 것이 보였다. 태성의 지배력을 차단하기 위한 극단의 조치였다.

피지컬이 극도로 우량하고 거칠기로 소문난 일본의 중앙 수비수 두 명이 태성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의 눈빛에는 독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부터 넌 한 발짝도 못 움직인다.”

태성을 양옆에서 에워싸는 거대하고 묵직한 두 개의 그림자. 사정없는 더블마크 특명이 떨어진 순간이었다. 태성의 눈앞에 있는 전술 장부의 화면이 붉은색 경고등과 함께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

타카하시와 함께 태성의 양옆을 가로막은 것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교체 투입된 일본의 숨은 병기, 쿠리하라였다. 190센티미터에 육박하는 거구에 90킬로그램에 달하는 거구의 센터백. 탄탄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이 태성의 사방을 짓눌렀다.

두 명의 거구가 숨통을 조여왔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땀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여기서 끝이다, 꼬맹이.”

쿠리하라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리며 태성의 어깨를 슬쩍 밀쳤다. 심판의 눈을 피해 교묘하게 체중을 실어 누르는 반칙성 플레이였다.

쿵.

가슴팍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숨이 턱 막혔다. 전생의 트라우마가 척추를 타고 차갑게 흘러내렸다. 수비수들에게 둘러싸여 고립된 채, 부러진 발목을 붙잡고 잔디 위를 뒹굴던 그 비참한 기억.

‘혼자서는 못 뚫는다.’

태성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무리하게 피지컬로 버티며 돌파를 시도하는 순간, 발목 게이지는 순식간에 임계점을 돌파할 터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스스로 미끼가 되는 것.

태성은 슬며시 상체를 숙이며 수비 라인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스트라이커가 최전방을 비우고 미드필더 라인까지 내려오는 변칙적인 움직임.

벤치에 앉아 있던 최강식 감독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PC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 움직임은……?’

최 감독의 머릿속에 자신이 밤새 구상했던, 그러나 한국 선수들의 전술적 이해도 한계로 인해 서랍 깊숙이 묻어두었던 ‘가짜 9번(False-Nine)’ 시뮬레이션 전술이 스쳐 지나갔다. 중앙 공격수가 미끼가 되어 상대 센터백들을 끌고 내려오면, 그로 인해 발생한 최전방의 빈 공간을 윙어들이 사선으로 침투해 파괴하는 전술.

태성이 그 전술의 핵심 기어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터벅. 터벅.

태성이 내려앉자, 그를 전담 마크하던 타카하시와 쿠리하라 역시 자석에 이끌리듯 라인을 끌고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견고했던 포백 라인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중앙이 쩍 갈라졌다.

“승우야!”

태성이 낮게 부르짖으며 손짓했다.

하프라인 부근에서 공을 소유하고 있던 백승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승우의 시야에 태성이 만들어낸 거대한 공간이 들어왔다. 동시에 반대편 측면에서 홍창민이 그 공간을 향해 폭발적인 스프린트를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지금이다!’

승우가 망설임 없이 오른발 끝으로 공을 밀었다. 낮고 빠른 패스가 태성을 향해 굴러왔다.

하지만 일본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태성이 공을 받기 직전, 쿠리하라가 거구의 몸을 날려 태성의 등 뒤를 덮쳤다. 정당한 몸싸움의 범위를 넘어선, 대놓고 몸으로 깔아뭉개려는 비열한 압박이었다.

[경고: 후방에서의 물리적 충돌 감지.] [회피 동작 미실시 시, 우측 발목에 가해지는 충격량 급증.] [발목 과부하 게이지: 45%]

뇌리가 붉은빛으로 점멸했다. 발목이 뜨거워졌다.

여기서 공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턴을 하거나 버티면 발목이 박살 난다. 하지만 피하면 공의 소유권을 잃고 역습을 당한다.

선택의 시간은 0.1초도 되지 않았다.

태성은 이빨을 악물었다. 입술 사이로 비명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아내며, 디딤발인 오른발이 아닌 왼발 끝을 가볍게 뻗었다.

툭.

자신에게 배달된 공의 궤적을 미세하게 바꾸는 터치. 공을 소유하려 하지 않고, 굴러오는 속도를 그대로 살려 반대편으로 흘려보내는 감각적인 원터치 패스였다.

“뭐야?!”

태성의 등을 덮치던 쿠리하라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태성이 흘려보낸 공은 쿠리하라의 가랑이 사이를 정확히 관통하며, 수비 라인 배후로 침투하던 홍창민의 발끝으로 정확하게 연결되었다.

완벽한 가짜 9번의 정석. 자신을 희생해 동료에게 공간과 기회를 창출하는 사령관의 플레이였다.

“막아! 막아라!”

일본 골키퍼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미 늦었다. 완전히 열린 공간에서 공을 잡은 홍창민이 페널티 박스 안으로 치고 들어갔다.

하지만 그 순간, 태성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공이 이미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흥분한 쿠리하라가 제어하지 못한 체중을 그대로 실어 태성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린 것이다.

콰당!

태성의 신체가 거칠게 잔디 위로 처박혔다. 오른쪽 발목에 묵직하고 날카로운 충격이 가해졌다.

“으윽……!”

태성이 신음을 흘리며 발목을 움켜쥐었다. 회귀 전, 뼈가 바스러지던 그 끔찍한 감각이 신경계를 타고 뇌로 직행했다.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경고! 외부 충격으로 인한 발목 과부하 급상승!] [발목 과부하 게이지: 72%] [발목 과부하 게이지: 78%] [경고: 게이지가 위험 수치인 75%를 초과했습니다. 지속적인 물리 충격 발생 시 영구적인 신체 손상이 유발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비상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려 잔디를 적셨다.

“이봐! 파울이잖아! 야!”

멀리서 홍창민과 백승우가 주심을 향해 거칠게 항의하며 달려오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심의 날카로운 휘슬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옐로카드가 쿠리하라의 눈앞에 제시되었지만, 태성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발목을 타고 올라오는 지독한 열감과 붉게 타오르는 시스템의 경고등만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태성은 떨리는 손으로 잔디를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오른쪽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때, 벤치 쪽에서 최강식 감독이 테크니컬 에어리어까지 걸어 나와 태성을 매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 감독의 손가락이 교체 카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태성은 과연 이 지독한 과부하의 공포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전생의 악몽처럼 이대로 그라운드를 떠나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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