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함성이 상암의 밤하늘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6만 관중이 뿜어내는 열기는 잔디 위의 습기와 버무려져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경기장 한구석, 대한민국 대표팀의 벤치 주변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기자석의 노트북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그들의 시선은 그라운드가 아닌, 벤치 가장자리에 앉아 형광색 조끼를 걸친 채 무릎을 만지고 있는 강태성에게 쏠려 있었다.

“결국 벤치군. 부상설이 진짜였어.” “청백전에서 날아다니더니 역시 유리몸이었나? 최강식 감독도 무리시키지 않으려는 모양이네.”

관중석에서 흘러나오는 수군거림이 바람을 타고 피치 위로 흩어졌다. 전광판에 박힌 ‘대한민국 0 : 0 일본’이라는 숫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삐익!

주심의 휘슬 소리와 함께 전반전의 팽팽하던 균형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일본 대표팀의 압박은 예상보다 훨씬 조직적이고 집요했다. 그들은 단순히 달리는 것이 아니었다. 세 명의 미드필더가 정삼각형의 대형을 유지하며 한국의 패스 길목을 완벽하게 차단했다.

“신우 형 고립된다!”

벤치에 앉아 있던 윙어 홍창민이 주먹을 꽉 쥐며 나직하게 뱉었다.

최전방의 베테랑 스트라이커 김신우는 일본의 거친 더블 마크에 갇혀 질식해가고 있었다. 후방에서 길게 넘어오는 롱볼은 번번이 일본 센터백들의 머리에 걸렸고, 세컨드 볼은 모조리 일본 미드필더들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유기적인 압박 전술에 막힌 한국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허둥댔다.

전반 28분, 결국 사달이 났다.

일본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한국의 패스를 가로채 정면으로 빠르게 찔렀다. 하프스페이스를 파고들던 일본의 측면 공격수가 공을 잡아 그대로 낮고 빠르게 크로스를 올렸다. 수비수 사이를 뚫고 들어온 일본 스트라이커의 발끝에 걸린 공이 그물을 흔들었다.

철썩!

방벽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서울월드컵경기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잠겼다. 0대 1. 선제골을 허용한 수비진은 서로를 탓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 압박 타이밍을 전혀 못 잡잖아.”

홍창민이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경기장의 공기는 급격히 패배주의로 물들고 있었다. 한일전이라는 중압감 속에서 선제골을 내준 선수들의 발걸음은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하지만 태성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시야 너머로 푸른색 그리드 라인이 그라운드 전체를 덮기 시작했다. 머릿속의 ‘미래 전술 장부’가 실시간으로 가동된 것이다. 일본 선수들의 이동 경로와 한국 선수들의 위치가 3차원 홀로그램 입체 도표로 변환되어 태성의 뇌리에 내려앉았다.

[발목 과부하 게이지: 12%]

아직 경기에 뛰지 않아 수치는 안정적이었다. 태성은 눈앞에 펼쳐진 전술 지도를 샅샅이 뜯어보았다. 일본의 수비진이 완벽해 보이지만, 치명적인 균열이 존재했다.

‘포백의 간격이 너무 벌어져 있어.’

일본은 전방 압박을 가할 때 라인을 극단적으로 끌어올린다. 특히 왼쪽 풀백이 오버래핑을 시도할 때, 왼쪽 센터백과의 거리가 필연적으로 넓어졌다. 수비진의 횡적 이동 속도가 한국의 전환 패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발생하는 미세한 결함이었다. 바둑판의 빈틈을 찾아내듯, 태성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규칙적으로 움직였다.

그때,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백승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축구화 끈을 풀었다가 다시 묶기를 반복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벤치 멤버로서 언제 투입될지 모른다는 압박감과 경기장의 험악한 분위기가 천재 미드필더의 어깨를 짓누르는 중이었다.

태성이 슬쩍 고개를 돌려 승우를 바라보았다.

“야, 백승우.” “어? 어, 태성아.” “축구화 끈 끊어지겠다. 적당히 당겨라.” “아…… 나도 모르게 그만.”

승우가 머쓱한 듯 손을 멈췄지만, 여전히 굳어 있는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태성은 턱짓으로 그라운드를 가리켰다.

“일본 애들 좁혀 들어오는 거 보이지? 엄청 촘촘해 보이잖아.” “응. 공간이 아예 없어 보여. 우리가 공을 잡으면 바로 두세 명이 에워싸니까 패스 줄 곳이 마땅치 않아.” “착시야.”

태성의 단호한 목소리에 승우가 눈을 크게 떴다.

“착시라고?” “어. 쟤들 압박 강도가 높은 건 맞는데, 그만큼 체력 소모가 극심해. 특히 좌측 풀백이 전방으로 튀어나갈 때, 센터백과의 간격이 순간적으로 12미터 이상 벌어져. 저기 보이지? 지금도 슬슬 균열이 가고 있어.”

태성이 손가락으로 경기장 왼쪽 측면의 가상 공간을 가리켰다. 승우의 시선이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움직였다. 순간, 승우의 두 눈에 이채가 돌았다. 태성의 설명을 듣고 나니, 꽉 막혀 보이던 일본의 수비 대형 사이로 거대한 골짜기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이네…… 저 공간을 공략하면 되나?” “그렇지. 하지만 평범하게 찔러주면 저 센터백이 슬라이딩 태클로 걷어낼 거야. 그래서 타이밍이 중요해.”

태성은 장부에 기록된 백승우의 신체 데이터를 떠올렸다.

‘백승우. 압박 상태에서 롱패스를 찌를 때, 미세한 골반 축 불균형으로 인해 공의 궤적이 계산보다 항상 1m 짧게 떨어진다.’

이건 일반적인 지도자라면 패스 미스라며 다그칠 약점이었다. 하지만 태성에겐 달랐다. 약점마저 미리 알고 있다면 완벽한 무기로 가공할 수 있었다.

“승우 너, 들어가면 저 공간으로 패스 찔러라. 내 발밑이 아니라, 저 벌어지는 공간보다 정확히 1미터 짧은 지점을 겨냥해서.” “1미터 짧게? 그러면 수비수가 먼저 차단하지 않을까?” “아니. 내가 1미터 먼저 움직여서 받을 거니까 걱정 말고 차. 네 골반 각도가 어떻게 틀어지든 신경 쓰지 말고, 그냥 네가 편한 대로 차 넣으라고. 내가 다 받아먹을 테니까.”

승우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자신도 자각하지 못했던 미세한 버릇을 태성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을 실책이 아닌, 완벽한 전술적 약속으로 승화시키려 하고 있었다. 주눅 들어 있던 승우의 마음에 뜨거운 불꽃이 튀었다. 떨리던 손가락이 완전히 멈췄다.

“……진짜 받아낼 수 있어?” “못 받으면 내가 네 축구화 닦아준다. 그러니까 쫄지 말고 질러.”

태성이 픽 웃으며 승우의 어깨를 툭 쳤다. 승우의 입꼬리가 가볍게 올라갔다.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몸안으로 기분 좋은 전율이 퍼져 나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인물이 있었다.

테크니컬 에어리어 가장자리에 서서 전술 패드를 쥐고 있던 최강식 감독이었다. 그는 교체 카드를 타이밍을 재기 위해 벤치 쪽으로 다가왔다가 태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최강식의 눈동자가 고요하게 흔들렸다.

‘저 녀석은 지금…….’

최강식은 패드에 띄워진 데이터 분석 창을 내려다보았다.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전술 데이터가 태성이 방금 말한 내용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하고 있었다. 일본의 좌측 풀백과 센터백 사이의 벌어지는 간격. 그것은 최강식 감독 본인조차 전반전이 시작되고 20분이 지나서야 겨우 눈치챈 세부 전술적 약점이었다.

그런데 그라운드 밖 벤치에 가만히 앉아 있던 19세짜리 애송이가 그걸 바둑판을 보듯 완벽하게 읽어내고 있었다. 심지어 동료의 신체적 특징까지 고려해 구체적인 공략법을 지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선수의 시야가 아니었다.

필드 전체의 메커니즘을 쥐고 흔드는 사령관, 혹은 벤치 위의 감독에 가까운 인지 능력이었다.

‘내가 구상했던 가짜 9번(False-Nine)의 움직임을…… 저 녀석은 이미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하고 있군.’

최강식의 손가락끝이 패드 모서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경외감에 가까운 전율이 척수를 타고 흘렀다. 태성은 감독의 지시나 개입 없이도, 스스로 그라운드의 전술적 판도를 수정하고 지휘하고 있었다.

최강식은 고개를 돌려 태성을 응시했다.

태성의 시선은 여전히 그라운드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어떤 조급함도, 선제골을 내준 것에 대한 불안감도 없는 절대적인 안정감. 그 모습은 마치 모든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예언자 같았다.

삑- 삑-!

전반전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0대 1로 뒤진 채 락커룸으로 들어가는 선수들의 고개는 무겁게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최강식 감독의 머릿속은 이미 후반전의 완벽한 반격 시나리오로 가득 차 있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10분이 흘렀다.

경기의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은 여전히 일본의 촘촘한 수비 블록을 뚫지 못했고, 관중석에서는 야유와 탄식이 번갈아 터져 나왔다. 스포츠 언론들의 실시간 문자 중계창에는 자극적인 비판 조의 댓글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최강식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그는 벤치를 향해 단호하게 손짓했다.

“강태성, 백승우. 웜업해.”

그 한마디에 벤치의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태성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광색 조끼를 벗어 던지자, 붉은색 국가대표 유니폼이 드러났다. 등번호 10번. 그의 탄탄한 체구가 관중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야, 강태성 몸 푼다!” “진짜 나오는 거야? 발목 괜찮은 건가?”

관중석이 거대하게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기대감 가득한 함성과 여전한 의구심이 섞인 야유가 뒤섞여 경기장을 메웠다. 미디어석의 카메라 셔터 소리가 광적으로 터져 나오며 태성의 일거수일투족을 쫓았다.

태성은 그 모든 소음을 배경음악 삼아 묵묵히 몸을 풀었다. 가볍게 제자리 점프를 하며 우측 발목의 감각을 조율했다.

[발목 과부하 게이지: 12%]

발목 상태는 최상이었다. 이제 저 그라운드로 들어가 승우와 함께 일본의 수비진을 갈가리 찢어놓을 시간이었다.

후반 15분, 마침내 터치라인 안쪽으로 교체판이 들어섰다.

[OUT 9 김신우] [IN 10 강태성]

[OUT 8 이민우] [IN 16 백승우]

태성은 허리를 숙여 축구화 끈을 단단히 동여맸다. 승우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깊은 호흡을 내뱉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그라운드 위에서 마주쳤다.

“승우야.” “어.” “판 깔아줄 테니까, 마음껏 질러라.”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냉소적이던 그의 안광에 승리를 향한 잔혹한 굶주림이 타올랐다.

그가 그라운드 안으로 오른발을 내딛는 순간, 경기장 전체를 메우던 소음이 일시에 잦아들었다. 터질 듯한 침묵 뒤에 숨겨진 거대한 폭풍이,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초록색 융단 위로 발을 디디자마자 질척한 잔디의 감촉이 축구화 스터드를 타고 올라왔다.

일본의 센터백들이 서로를 향해 소리치며 수비 라인을 빠르게 조정했다. 그들의 시선은 집요하리만치 태성의 오른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언론에 보도된 부상 의혹을 확인하려는 부릅뜬 눈들이었다.

“헤이! 10번 마크! 바짝 붙어!”

일본어 고성이 피치 위를 굴러다녔다. 태성은 가볍게 침을 뱉으며 일본 수비수들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머릿속의 전술 장부가 미친 듯이 연산을 시작하며 붉고 푸른 그리드 선을 그라운드에 촘촘히 뿌렸다.

삐익!

경기가 재개되었다. 한국의 왼쪽 풀백이 던진 스로인이 백승우의 발밑으로 전달됐다. 승우가 공을 소유하자마자 일본의 미드필더 두 명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압박을 가해왔다. 퇴로를 차단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이었다.

“승우야, 지금이야!”

태성이 낮게 소리치며 수비 라인 사이의 빈틈으로 몸을 틀었다.

승우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압박의 그물망이 좁혀오는 절체절명의 순간, 그는 태성이 지시했던 가상의 좌표만을 머릿속에 그렸다. 승우가 디딤발을 딛고 오른발을 휘둘렀다.

툭.

둔탁한 타구음과 함께 공이 굴러갔다.

“아, 패스 미스 아닙니까! 너무 짧아요!”

중계석의 캐스터가 탄식을 내뱉었다. 공의 궤적은 침투하는 태성의 발끝이 아니라, 일본 수비수가 먼저 걷어내기 딱 좋은 애매한 위치로 향하고 있었다. 수비 압박에 밀려 골반이 미세하게 틀어지는 승우의 버릇이 고스란히 묻어난, 뒤떨어지는 패스였다.

일본 센터백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공을 차단하기 위해 앞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반 박자 빠른 타이밍에 움직인 신체가 있었다.

스윽.

강태성이었다. 그는 승우의 발끝에서 공이 떠나기도 전에 이미 뒤쪽으로 방향을 꺾어 달리고 있었다. 동료의 패스가 1미터 짧게 떨어질 것을 100% 확신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역방향 스타트였다.

“뭐, 뭐야?!”

일본 센터백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태성은 수비수보다 먼저 공의 낙하지점에 안착했다. 날아오는 공을 오른발 아웃사이드로 가볍게 긁어내며 몸을 빙글 돌렸다. 단 한 번의 터치로 자신을 압박하던 수비수를 완전히 바보로 만들며 돌아서는 턴 동작이었다.

[발목 과부하 게이지: 28%]

오른발 발목 안쪽에서 찌릿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급격한 방향 전환이 유발한 물리적 과부하였다. 하지만 태성은 통증을 무시한 채 고개를 들었다.

눈앞의 시야가 황금빛 패스 루트로 가득 찼다.

일본의 왼쪽 풀백이 당황해 중앙으로 좁혀 들어오는 순간, 반대편 측면 공간이 고속도로처럼 넓게 열렸다. 그곳으로 홍창민이 미친 듯한 속도로 스프린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보인다.’

완벽한 어시스트 경로. 공을 찔러주기만 하면 곧바로 골키퍼와 1 대 1 기회였다.

태성이 디딤발을 딛고 킥을 준비하는 찰나, 시야 한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일본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태성의 오른쪽 발목을 겨냥해 바닥을 쓸며 들어오는 보복성 슬라이딩 태클이었다.

정면 돌파를 시도해 피할 것인가, 위험을 무릅쓰고 패스를 연결할 것인가.

[경고: 급격한 회피 동작 시 발목 과부하 게이지가 75%를 초과합니다.]

장부의 붉은 경고등이 뇌리에서 요란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태성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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