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붙이가 잔디를 찢는 파열음이 고막을 찔렀다.
김태영의 눈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베테랑의 자존심을 난도질당한 수비수가 뿜어내는 살기가 그라운드의 공기를 얼려 버렸다. 태성의 눈앞에 그의 슬라이딩 궤적이 붉은색 실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오른쪽 발목. 전생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끝장냈던 그 부위로 무자비한 쇠못이 박힌 축구화 밑창이 날아들고 있었다.
[위험! 위험! 위험!] [우측 발목 충격 감지 시 과부하 게이지 100% 초과 예상!]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전생의 기억이 망령처럼 되살아났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 들것에 실려 가며 올려다보았던 카타르의 밤하늘, 그리고 끝없는 절망.
순간적으로 발목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지려 했다. 트라우마가 발목을 잡아끌었다.
‘안 돼.’
태성은 이빨을 악물었다. 턱관절이 으스러질 듯 힘이 들어갔다. 이번 생은 다르게 흘러가야 했다. 스스로가 이 그라운드의 지배자다. 저따위 무식한 태클에 무릎 꿇을 천재가 아니었다.
장부가 제시한 붉은색 기하학 궤적은 김태영의 슬라이딩이 지면에서 약 15센티미터 높이로 쓸고 들어올 것임을 가리키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태성의 상체가 뒤로 기울었다. 디딤발인 오른발 끝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툭.*
태성은 달려오는 공의 밑부분을 왼발 끝으로 가볍게 찍어 올렸다. 공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태성은 오른발로 잔디를 강하게 차내며 몸을 띄웠다.
공중으로의 도약.
바로 밑으로 김태영의 거친 몸뚱이가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김태영의 어깨가 태성의 유니폼 자락을 스쳤지만, 그뿐이었다. 태성은 공중에서 완벽한 아치를 그리며 수비수를 통째로 넘겨 버렸다.
"……!"
김태영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허공에 뜬 태성의 시선은 단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수비 라인의 배후 공간.
그곳으로 이미 백승우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하고 있었다. 태성은 공중에 떠 있는 상태에서 상체를 비틀었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기묘한 체공 자세 속에서, 그의 오른발 뒤꿈치가 허공에 뜬 공을 정확히 겨냥했다.
*툭.*
감각적인 힐킥이었다.
공중에서 뒤꿈치에 맞은 공은 궤적을 꺾어, 침투하던 백승우의 질주 경로 바로 앞으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김태영의 백태클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마저 완벽한 킬패스로 치환해 버린 순간이었다.
"미친……!"
벤치에 있던 코치 한 명이 들고 있던 전술 판을 놓쳤다.
공은 잔디 위를 구르지도 않았다. 가슴 높이로 절묘하게 흐르는 공을 바라보며 백승우가 도약했다. 수비진은 이미 태성의 가짜 9번 움직임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백승우의 앞에는 오직 골키퍼 한 명뿐이었다.
*콰앙!*
백승우의 오른발 끝에 얹힌 공이 대포알처럼 뿜어져 나갔다. 주전 골키퍼가 손을 뻗어 보았지만, 공은 이미 골대 구석 그물을 찢어발길 듯이 흔들고 있었다.
골이었다.
"후우……."
태성이 지면에 가볍게 착지했다. 오른발 끝에 찌릿한 열감이 올라왔으나 기분 좋은 자극이었다.
[연계 플레이 성공! 어시스트 기록.] [발목 과부하 게이지가 대폭 감소합니다.] [과부하 게이지: 15%]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붉은 경고등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푸른빛의 안정적인 신호가 들어왔다. 터질 것 같던 심장의 박동이 점차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라운드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수비수 김태영은 잔디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방금 전 자신이 저지른 태클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태성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파훼했는지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갔다.
"야, 김태영! 너 미쳤어?!"
홍창민이 핏대를 세우며 김태영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자체 청백전이라도 그렇지, 뒤에서 발목을 보고 들어오는 태클이 어디 있어! 애 선수 생명 끝장낼 일 있어?!"
"나, 나는 그냥 공을 보고……."
김태영이 변명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이미 모든 스태프와 선수들이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명백한 보복성 태클이었다.
최강식 감독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태성에게로 걸어왔다. 호각을 입에 물지도 않은 채, 그저 태성의 상태를 살필 뿐이었다.
"강태성, 발목은?"
"괜찮습니다, 감독님. 닿지 않았습니다."
태성이 덤덤하게 대답하며 가볍게 발목을 돌려 보였다. 실제로 아무런 통증도 없었다. 장부가 제시한 궤적대로 정확하게 회피했기 때문이다.
최강식은 태성의 발목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김태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김태영. 짐 싸서 나가."
"감독님!"
"부상 전력이 있는 아군 공격수에게 뒤늦은 백태클이라니. 내 팀에 그런 수준 낮은 선수는 필요 없다. 오늘부로 훈련에서 제외한다. 짐 싸서 퇴소해."
최강식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데이터와 합리를 중시하는 그에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팀의 핵심 자원을 망가뜨리려 한 선수는 존재 가치가 없었다. 김태영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터덜터덜 그라운드를 빠져나갔다.
훈련장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태성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생의 트라우마가 잠시 그를 흔들었지만, 결국 승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동료를 이용한 연계 플레이야말로 이 발목의 저주를 풀고 살아남을 유일한 열쇠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각인되었다.
"야."
백승우가 다가왔다. 차분한 눈빛 속에 미안함과 고마움이 교차하고 있었다.
"방금 패스, 솔직히 좀 위험했지? 내가 조금만 더 길게 찔러줬어도 김태영이 그렇게 들어오지는 못했을 텐데."
백승우가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태성은 백승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머릿속 장부에는 여전히 백승우의 데이터가 기록되어 있었다.
[백승우: 압박 상황 시 전방 롱패스의 궤적이 목표보다 언제나 1m 짧게 떨어지는 물리적 불균형 존재.]
태성은 알고 있었다. 승우가 고의로 짧게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의 신체적 버릇이자 미세한 불균형 때문이었다. 하지만 태성은 그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1미터 짧은 패스를 역이용해 김태영의 타이밍을 빼앗고 어시스트로 연결했으니까.
"아니야. 완벽한 패스였어. 덕분에 어시스트 하나 적립했잖아."
태성이 툭 던지듯 말했다.
백승우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내성적인 그치고는 꽤나 감정이 드러난 미소였다.
"역시 내 발목 수호신이네, 강태성. 다음에도 그렇게 받아먹을 테니까 좋은 거 많이 찔러줘라."
"받아먹는 건 네 몫이지. 난 판만 깔아줄 뿐이야."
태성의 대답에 백승우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쳤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유대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던 전생의 독선적인 태성이었다면 절대 느끼지 못했을, 동료와의 기묘한 동기화였다.
* * *
훈련이 끝난 후, 코칭스태프 회의실.
대형 모니터에는 방금 전 청백전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화면 속 태성은 김태영의 거친 태클을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무용수처럼 가볍게 피한 뒤, 보지도 않고 뒤꿈치로 공을 찔러주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반사신경이 아닙니다."
수석 코치가 마른침을 삼키며 모니터를 가리켰다.
"보십시오. 강태성이 도약하는 시점은 김태영이 슬라이딩을 시작하기도 전입니다. 마치 김태영이 어디로, 어느 높이로 태클을 할지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움직였습니다."
최강식 감독은 턱을 괸 채 묵묵히 화면을 응시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가 화면 속 태성의 발끝을 집요하게 쫓았다.
"그리고 이 뒤꿈치 패스."
코치가 화면을 일시 정지시켰다. 태성이 공중에 떠서 상체를 비틀고 있는 기묘한 자세였다.
"일반적인 스트라이커라면 부상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웅크리거나 낙하 지점을 찾았을 겁니다. 하지만 강태성은 체공 시간 동안 이미 백승우의 침투 경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패스를 보냈습니다. 이건 신체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경기장 전체를 3D 공간으로 완벽하게 연산하고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플레이입니다."
최강식의 손가락이 책상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탁. 탁. 탁.*
그는 태성의 과거 데이터를 잘 알고 있었다. 압도적인 탄력과 스피드, 그리고 저돌적인 돌파력으로 상대 수비를 부수던 '괴물 공격수'. 그것이 회귀 전, 그리고 부상 전 태성의 플레이 스타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모니터 속의 태성은 완전히 다른 생명체였다.
힘을 쓰지 않는다. 상대의 템포를 빼앗고, 수비의 균열을 유도하며, 동료의 위치를 자로 잰 듯이 파악해 판을 짠다.
가짜 9번. 세계 초일류 클럽들조차 완벽히 구현하기 어려워하는 그 현대 축구의 정수를, 고작 19세의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그라운드 위에서 시연하고 있었다.
"감독님, 이 정도면……."
코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태성을 중심으로 전술을 재편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준비하던 가짜 9번 시뮬레이션, 어쩌면 강태성이라면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강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모니터 옆에 띄워진 태성의 의료 데이터 시트로 향했다.
우측 발목. 피로 골절 및 인대 손상 의심.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태성이 보여준 플레이는 경이로웠지만, 감독으로서 최강식은 철저한 데이터 만능주의자였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이라도 경기 도중 부러져 버린다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강태성."
최강식이 나직하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샤워를 마치고 라커룸을 나서던 태성은 복도 끝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코치의 부름을 받았다.
"태성아, 감독님이 방으로 좀 오란다."
"지금 말입니까?"
"어. 급하신 모양이더라. 얼른 가봐."
코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감독실의 문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태성은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강식 감독. 데이터와 시스템을 신뢰하는 냉혹한 전술가.’
태성은 전생의 기억을 더듬었다. 최강식 감독은 선수의 이름값이나 감정에 휘둘리는 법이 없었다. 그가 자신을 불렀다는 것은, 방금 청백전에서 보여준 플레이에 대한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거나, 혹은 다른 의도가 있음을 뜻했다.
태성은 천천히 복도를 걸어가 감독실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오게."
문 안쪽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감독실의 조명은 어둡게 내려앉아 있었다. 오직 최강식의 책상 위에 놓인 대형 모니터 두 대만이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며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최강식은 안경을 고쳐 쓰며 태성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앉아라."
태성은 이의 없이 책상 맞은편 의자에 깊숙이 앉았다.
최강식이 마우스를 딸깍였다. 그러자 두 대의 모니터 화면이 태성의 눈앞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왼쪽 모니터에는 붉은색 그래프와 복잡한 수치들이 가득한 문서가 띄워져 있었다. 태성의 이름이 선명하게 박힌 '우측 발목 관절 정밀 의료 진단서'였다.
그리고 오른쪽 모니터에는 방금 전 청백전에서 태성이 보여준 모든 패스 루트와 움직임의 궤적, 히트맵이 3D 그래픽으로 시각화되어 있었다.
의료 데이터와 전술 실행 데이터.
극과 극을 달리는 두 개의 지표가 태성의 눈앞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최강식은 모니터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왼쪽은 네 신체 데이터다. 네 발목은 영양학적으로나 해부학적으로나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라고 적혀 있지. 과도한 스프린트나 급격한 턴 동작은 네 선수 생명을 끝낼 거다. 실제로 넌 훈련 중에도 오른쪽 발목에 가해지는 하중을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어."
최강식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런데 오른쪽을 봐라."
그가 오른쪽 모니터를 툭툭 쳤다.
"체력 소모를 극한으로 줄이면서도, 상대 수비의 압박 궤적을 소름 끼칠 정도로 완벽하게 피해 다녔지. 그리고 단 한 번의 불필요한 터치도 없이 동료들에게 기회를 창출해냈다. 이건 단순한 '천재의 감각' 수준이 아니야."
최강식이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태성의 눈동자를 꿰뚫을 듯 파고들었다.
"강태성. 너는 네 발목이 부서질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플레이하고 있어. 그리고 그 부상을 피하기 위해, 우리 팀 전체를 네 장기말처럼 부려 먹고 있지. 내 말이 틀렸나?"
정적이 방 안을 지배했다.
태성은 침묵했다. 최강식 감독은 태성의 본질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발목의 부상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 이타적인 사령관의 탈을 쓰고 아군을 부려 먹는 스트라이커.
최강식이 천천히 서랍을 열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러시아 월드컵 최종 엔트리 명단이었다. 아직 아무런 이름도 적히지 않은, 오직 등번호만이 나열된 백지였다.
최강식이 펜을 들어 태성을 바라보았다.
"묻겠다. 네가 가진 그 '눈'은, 세계 최강 아르헨티나의 수비진 앞에서도 통할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