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익-! 삐이이익-!"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 센터(NFC)의 뜨거운 공기를 찢었다.
잔디를 찢으며 미끄러지던 김태영의 스터드가 태성의 코앞에서 멈췄다. 튀어 오른 흙먼지가 태성의 축구화 코를 더럽혔다. 김태영은 여전히 핏발 선 눈으로 태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베테랑의 얼굴에서 거친 더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명확했다. 태성의 오른쪽 발목.
"거기까지."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그라운드를 가라앉혔다. 최강식 감독이었다.
그는 손에 쥔 태블릿을 겨드랑이에 끼운 채, 천천히 필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김태영을 거쳐 태성에게 머물렀다. 감독의 눈동자 뒤편에서 수많은 데이터와 전술적 계산이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보였다.
김태영이 거칠게 침을 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감독님, 이 자식 플레이가 너무 건방집니다. 훈련인데도 템포를 지 멋대로 조절하고―"
"태영아."
최강식 감독의 차가운 음성이 김태영의 말을 잘랐다.
"네가 뚫린 거다. 템포를 빼앗긴 것도 너고."
"……!"
"그리고 강태성."
최강식의 시선이 태성의 눈동자를 정면으로 꿰뚫었다. 의구심과 호기심이 기묘하게 뒤섞인 눈빛이었다. 단 한 번의 어시스트. 그러나 그것은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지나치게 정교하고 계획적이었다. 마치 미래를 미리 보고 패스 길을 열어젖힌 것처럼.
최강식의 입술이 단호하게 열렸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지금부터 세션을 변경한다. 주전 1진 포백, 전부 백팀 수비 라인에 서라."
그라운드에 찬바람이 불었다.
국가대표 주전 포백. K리그를 씹어 먹고 유럽 무대를 노리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방패들이다. 그들을 통째로 태성의 맞은편에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강태성, 네가 진짜 1진의 압박을 견디면서도 그 '눈'을 유지할 수 있는지 보겠다. 다음 세션 시작해."
도발이자, 기회였다.
태성은 가만히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내려다보았다. 미세하게 징웅거리는 생체 전기적 진동이 느껴졌다. 전생의 트라우마가 짙은 어둠처럼 발목을 감싸 쥐려 했지만, 태성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증명하라고? 기꺼이 해주지.'
태성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 * *
"야, 정신 똑바로 차려. 저 새끼 발목 병신이었던 놈이다. 몸싸움 한 번 제대로 걸면 알아서 기어."
백팀의 중앙 수비수 김태영이 동료 수비수들에게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악에 받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주전 포백의 압박은 이전과는 궤를 달리했다. 그들은 단순히 길목을 막아서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공간을 좁히는 속도, 어깨를 밀어 넣는 각도, 디딤발을 노리는 집요함까지. 모든 것이 태성의 숨통을 죄기 위해 설계된 움직임이었다.
"삐익-!"
다시 공이 돌기 시작했다.
태성의 발밑으로 공이 굴러오는 순간, 거대한 장벽이 눈앞을 가로막았다. 김태영과 또 다른 주전 센터백이 동시에 태성을 향해 쇄도했다. 양옆에서 좁혀오는 압박의 그물망.
그들의 눈빛은 살기가 등등했다. 거친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고, 잔디를 짓밟는 스터드의 마찰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온다.'
태성은 본능적으로 발목을 움츠리려 했다. 전생에 겪었던 끔찍한 파열음과 휠체어의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동료를 믿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려다 모든 것이 부서졌던 그 기억.
그 순간, 태성의 망막 위에 푸른빛의 홀로그램이 번쩍이며 펼쳐졌다.
[미래 전술 장부 활성화] [상대 수비 메커니즘 분석 중……] [경고: 정면 돌파 시 물리 충돌 확률 95%] [우측 발목 예상 가해 압박 수치: 88% (골절 위험 위험군)] [현재 발목 과부하 게이지: 42%]
붉게 점멸하는 경고창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정면 충돌은 파멸이다. 전생의 방식대로 힘과 속도로 저 괴물들을 뚫으려 했다간, 이 자리에서 다시 발목이 박살 날 터였다.
'내가 미쳤다고 저 무식한 힘 싸움에 장단을 맞춰줄 줄 알고.'
태성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는 사령관이다. 그라운드 전체를 장기판으로 쓰고, 동료들을 자신의 완벽한 장기말로 기용하는 지배자.
김태영이 거칠게 어깨를 밀어붙이며 태성의 디딤발을 향해 발을 뻗었다. 들이받아서 완전히 뭉개버리겠다는 무지막지한 돌진이었다.
태성의 눈에 장부가 그려낸 파란색 실선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반대편 공간. 홍창민이 이미 오른쪽 측면에서 스프린트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곳은 비어 있었다. 주전 포백이 태성을 잡기 위해 중앙으로 쏠린 탓에 생긴 치명적인 균열이었다.
태성은 공을 잡지 않았다.
트래핑을 하는 척 발깃을 들어 올리던 태성이, 들어오는 공의 결을 따라 오른발 안쪽으로 툭 건드렸다.
*툭.*
방향만 살짝 바꾸는 극도로 절제된 원터치 패스.
공은 쇄도하던 김태영의 발끝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며, 반대편 빈 공간으로 빠르게 굴러갔다.
"어……?!"
김태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몸을 던져 태성을 덮치려던 그의 거구는 허공을 갈랐다. 제동을 걸지 못한 김태영이 잔디 위를 볼품없이 미끄러졌다.
태성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충돌이 발생하기 직전, 가볍게 상체를 틀어 압박의 궤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창민아! 뛰어!"
태성의 외침과 동시에, 공은 정확히 홍창민의 달리는 속도에 맞춰 그 전방 5미터 앞에 멈춰 섰다.
"이 미친 패스가……!"
홍창민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속도를 죽이지 않고 가속을 붙여 달릴 수 있는 최적의 궤적이었다. 패스를 받기 위해 멈출 필요도 없었다. 공은 마치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그의 발밑에 안착했다.
측면이 완전히 뚫렸다.
[연계 플레이 성공: 발목 과부하 게이지 8% 감소] [현재 발목 과부하 게이지: 34%]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사라지고 차가운 안도감이 찾아왔다. 태성은 거친 숨을 내쉬며 멀어지는 공을 바라보았다.
몸으로 부딪쳐 이기는 축구는 하책이다. 진짜 천재는 힘을 쓰지 않는다. 그저 상대의 힘을 이용해 그들을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 뿐이다.
벤치에 서 있던 최강식 감독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을 빠르게 두드렸다.
'압박이 들어오는 타이밍을 완벽하게 읽고 있어. 터치 한 번으로 수비 셋의 무게 중심을 바보로 만들다니.'
이것은 단순히 시야가 넓은 수준이 아니었다. 상대의 뇌 속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탈 타이밍이었다.
* * *
"휴식! 5분간 휴식 후 마지막 세션 진행한다!"
수석 코치의 외침에 운동장 가득 차 있던 긴장감이 잠시 헐거워졌다.
선수들이 헐떡이며 벤치로 걸어왔다. 땀이 턱끝을 타고 뚝뚝 떨어져 건조한 잔디를 적셨다. 태성 역시 벤치에 주저앉아 얼음물을 들이켰다. 욱신거리는 오른쪽 발목에 차가운 물을 뿌리며 열기를 식혔다.
"야."
옆에서 툭 던지는 목소리. 홍창민이었다. 그는 물통을 쥔 채 붉어진 얼굴로 태성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너 아까 그 패스…… 어떻게 준 거냐? 보지도 않고 준 것 같던데."
태성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네가 거기 있을 것 같아서 줬다."
"싱겁기는. 구라 치지 마라. 내 달리기 타이밍을 어떻게 알고 그렇게 딱 맞춰 주냐고."
홍창민이 투덜거렸지만, 그의 눈빛에는 분명한 흥분과 인정의 빛이 서려 있었다. 평소라면 태성을 향해 으르렁대기 바빴을 녀석이, 이제는 그의 패스를 갈망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태성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더 가지러 벤치 안쪽으로 걸어가던 태성의 시선에, 최강식 감독이 잠시 자리를 비운 감독석이 들어왔다. 의자 위에는 화면이 켜진 채 놓여 있는 최강식의 전술 분석 패드가 있었다.
평소라면 남의 장비를 훔쳐보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회면 위에 선명하게 혀 그려진 전술 포메이션이 태성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태성의 눈이 크게 떠졌다.
화면에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포메이션이 띄워져 있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4-4-2나 4-2-3-1이 아니었다.
'이건…… 제로톱?'
중앙 스트라이커의 위치에 붉은색으로 커다란 'X' 표시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복잡한 화살표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스트라이커가 하프라인 부근까지 깊숙이 내려와 빌드업에 관여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빈 공간을 좌우 윙어들이 대각선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극단적인 전술.
'가짜 9번(False-Nine) 시뮬레이션.'
현대 축구의 정점이자, 전술적 이해도가 극에 달한 선수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여야만 비로소 구현할 수 있는 신의 전술이었다.
하지만 그 전술도 위에는 붉은 글씨로 차갑게 적혀 있었다.
[구현 불가능 - 선수들의 전술적 이해도 및 움직임 연계 능력 부족. 빌드업 시 기동력 저하 우려.]
최강식 감독은 이 전술을 한국 대표팀에 이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현대 축구의 흐름을 따라갈 만한 지능을 가진 공격수가 한국에는 없다고 판단해 결국 포기한 상태였던 것이다.
태성의 심장이 기묘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내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면 어떻게 될까.'
과거의 태성은 오직 골만을 갈구하는 탐욕스러운 맹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술 장부를 가진 그는 이 필드 위에서 가장 치명적인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최강식이 꿈꾸던 그 전술을 완벽하게 실현해 줄 유일한 열쇠.
그때,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남의 전술 노트를 훔쳐보는 버릇이 있나 보군."
어느새 다가온 최강식 감독이 태블릿을 휙 낚아챘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태성은 당황하지 않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훔쳐본 게 아니라 눈에 보인 겁니다. 그리고…… 꽤 흥미로운 그림이더군요."
"흥미롭다?"
"예. 왜 구현을 포기하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움직여 줄 장기말의 머리가 나쁘면, 이 전술은 그냥 자살행위이니까요."
최강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19세짜리 새파란 유망주가 국가대표 감독의 전술을 논하고 있었다. 평소의 최강식이라면 건방지다며 쫓아냈을 터다. 하지만 태성의 눈빛에 담긴 깊이를 보는 순간, 그는 말을 삼켰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지?"
"제가 보여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태성이 나지막이 미소 지었다.
"마지막 세션에서, 저 그림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최강식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턱 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의구심은 이제 확신을 향한 팽팽한 끈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 * *
마지막 세션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그라운드로 복귀한 태성의 움직임은 이전 세션들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태성은 전방에 머무르지 않았다. 공이 우리 진영에서 돌기 시작하자, 그는 과감하게 하프라인 부근까지 내려왔다.
"야! 공격수가 왜 저기까지 내려가?!"
백팀의 수비수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태성을 전담 마크하던 김태영의 스텝이 꼬였다. 중앙을 지켜야 할 공격수가 미드필더 전 지역을 헤집고 다니자, 수비 라인을 올려야 할지 내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다.
"쫓아가! 공간 주지 마!"
김태영이 소리치며 라인을 깨고 태성을 향해 전진했다.
그것이 태성이 파놓은 함정이었다.
[미래 전술 장부 시뮬레이션 완료] [최적의 패스 템포 시각화 시작]
태성의 시야에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푸른색 선들이 고속도로처럼 깔렸다.
백승우가 공을 잡았다. 태성은 그에게 손짓했다. 자신에게 짧게 주라는 신호였다.
*툭.*
백승우의 패스가 태성에게 향했다. 김태영이 태성의 등 뒤로 바짝 붙으며 거칠게 몸을 밀어 넣었다.
보통의 스트라이커라면 여기서 공을 지키기 위해 등을 지고 버텼을 것이다. 하지만 태성은 김태영의 힘이 실리는 방향을 이미 장부로 읽고 있었다.
태성은 공을 트래핑하지 않았다. 왼발 끝으로 가볍게 공의 방향만 돌려 옆에 있던 홍창민에게 내주었다.
*원터치 패스.*
"어?!"
김태영이 또다시 허탕을 치며 태성의 등을 들이받았다. 하지만 태성은 이미 유연하게 몸을 돌려 전방의 빈 공간으로 스프린트를 시작한 뒤였다.
공을 받은 홍창민이 당황하지 않고 달리는 태성의 발밑으로 다시 공을 찔러 넣었다.
*투터치.*
주전 수비진의 포백 라인이 완전히 붕괴하기 시작했다. 태성이 내려오면서 생긴 빈 공간으로 백승우가 벼락같이 침투해 들어갔다.
태성은 자신에게 쏠리는 수비진의 시선을 느끼며, 한 박자 빠른 템포로 공을 띄웠다. 로빙 스루패스.
공은 수비수들의 머리 위를 가볍게 넘어, 정확히 백승우의 가슴 팍으로 떨어졌다.
"말도 안 돼……!"
벤치에 있던 코칭스태프가 비명을 지르듯 중얼거렸다.
그것은 완벽한 '가짜 9번'의 부활이었다.
육체적인 힘 싸움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직 빛보다 빠른 터치와 템포 조절, 그리고 상대의 예측을 비웃는 패스 기동만으로 한국 최고라 자부하던 주전 수비진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로 만들었다.
필드를 지배하는 지적 쾌감이 태성의 전신을 전율시켰다. 땀방울이 눈가를 스쳐 흘렀지만,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명징했다.
백승우가 공을 트래핑하며 골키퍼와 1 대 1 찬스를 맞이하는 그 순간.
"이 새끼가아아아!"
베테랑의 자존심이 완전히 찢겨 나간 김태영이 이성을 잃었다.
이미 공이 태성의 발을 떠난 지 한참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태영은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태성의 디딤발을 향해 깊숙하고 살기 어린 슬라이딩 태클을 날렸다.
그의 스터드가 태성의 오른쪽 발목을 정확히 겨냥하고 있었다.
"태성아! 피해!"
홍창민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다시 한 번 그라운드를 흔들었다.
잔디를 찢으며 쇄도하는 거친 금속성 스터드.
[위험! 위험! 위험!] [우측 발목 충격 감지 시 과부하 게이지 100% 초과 예상!]
머릿속에서 붉은 경고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