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조(落照)는 핏빛이었다.
화산(華山)의 웅장한 봉우리들이 붉게 물드는 그 시각, 산자락 끝에 매달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낙하원(落霞院)의 마당에는 씁쓸한 약초 줄기가 타들어 가는 연기가 자욱했다. 본산의 도사들이 거처하는 청아한 태을전의 향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풍기는 비린내 섞인 약취(藥臭)였다.
백무강은 무거운 무쇠 약탕기를 마당 한구석에 내려놓았다. 쩍쩍 갈라진 손바닥에 맺힌 굳은살이 따끔거렸으나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등 뒤로 보이는 화산의 주봉들은 구름 위에 솟아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그 화려한 그림자가 가닿지 못하는 진흙탕이었다.
“또 본산을 올려다보고 있느냐.”
낮고도 단단한 목소리가 들렸다. 설화선이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붙인 채, 피와 고름이 묻은 붕대를 항아리에 던져 넣고 있었다. 뼈가 부러진 환자를 보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여장부였으나, 무강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감출 수 없는 그늘이 서려 있었다.
“올려다본 적 없습니다. 그저 해가 지는 방향을 보았을 뿐입니다.”
무강의 대답은 차가웠다. 서늘한 바람이 그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흔들고 지나갔다. 과거 가문에서 버림받고 이 산자락을 떠돌던 기억은 그의 마음에 단단한 무쇠 벽을 세웠다. 정파의 명숙이라는 화산파는 속가제자들을 그저 성벽을 쌓는 돌멩이나 전란의 고기방패 정도로 여겼다. 상생(相生)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깔린 위선적 착취를, 무강은 매일 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화선은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거뭇한 사발 하나를 건넸다. 검붉은 액체 위로 강렬한 쓴내가 피어올랐다.
“마셔라. 네 체내의 기형적인 한기(寒氣)를 다스리려면 이 천명초(天命草)를 달인 탕약 외에는 답이 없다. 본산의 선단(仙丹)만큼은 못하더라도, 네 맥락을 붙잡아 두기에는 충분할 게다.”
“매번 쓸데없는 공을 들이십니다. 이런 약초를 구하느라 의원 곳간이 거덜 나는 것을 모를 줄 아십니까.”
독설에 가까운 핀잔이었으나 무강은 사발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는 얼음처럼 차갑고 혀가 마비될 정도로 썼다. 천명초 특유의 냉랭한 기운이 오장육부를 훑고 지나가자, 가슴 깊은 곳에서 요동치던 원인 모를 갈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화선은 그의 거친 말투 뒤에 숨은 고마움을 알았기에,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법이다, 무강아. 괴물이 되지 말고, 그저 사람으로 살아남거라.”
사람으로 살아남는다. 무강은 속으로 그 말을 비웃었다. 힘이 없는 자에게 ‘사람의 삶’이란 허락되지 않는 사치에 불과했다. 본산의 대제자 현운 같은 천재들이 고결한 도심(道心)을 논할 때, 속가의 제자들은 굶주림과 사파의 습격에 목숨을 구걸해야 했다. 힘을 얻어야 했다. 정파도, 사파도 감히 범접하지 못할 절대적인 힘이 없다면 결국 이 낙하원도, 자신을 거두어 준 화선도 한 줌의 재로 변할 터였다.
그날 밤, 무강은 시든 약초를 채집한다는 핑계로 낙하원 뒤편의 은밀한 야산으로 향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와 수풀을 뒤흔들었다. 산의 경계를 넘어서자, 코끝을 찌르는 피비린내가 바람을 타고 밀려왔다. 단순한 짐승의 피가 아니었다. 무인의 내력에서 흘러나온 짙은 원망의 냄새였다.
무강은 신형을 낮추고 어둠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썩어가는 고목나무 아래, 붉은 낙엽 더미 사이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다.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전신에 기괴한 사슬 문양의 자수를 새긴 사내였다. 사패천의 하부 조직이자, 마교의 잔당인 혈음천마 계열의 일류 고수임이 분명했다. 가슴뼈가 완전히 함몰된 채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사내는 죽어서도 무엇인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품 안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사파의 개가 화산의 턱밑까지 기어들어 왔군.”
무강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는 주저 없이 시체의 손가락을 꺾고 품 안에 있던 물건을 끄집어냈다.
묵직한 가죽으로 감싸인 고서 한 권이었다. 표지에는 음각으로 기괴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환정마경(幻情魔經)]
책을 손에 쥔 순간, 무강의 뇌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것은 단순한 비급이 아니었다. 책 표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산한 마기가 그의 손바닥 맥락을 타고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이것인가.’
마교의 잃어버린 금단비급이자, 산 자의 영혼과 죽은 자의 망집을 삼켜 내력으로 환원한다는 전설의 마공.
무강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이 자신이 갈구하던, 허울 좋은 도덕을 비웃고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의 열쇠라는 것을. 그러나 동시에 전율이 일었다. 비급의 서문에 붉은 피로 쓰인 듯한 글귀가 그의 정신세계에 박혀왔기 때문이다.
[칠정반사(七情反噬). 죽은 자의 원혼이 품은 한(恨)을 정화하지 못하는 자, 그 광기와 슬픔에 잠식되어 전신 맥락이 파열하고 스스로 마(魔)가 되어 자멸하리라.]
공짜 힘은 없다. 인과적 채무를 지우는 가혹한 계약. 하지만 무강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정사대전의 포화가 낙하원을 덮치기 전에 강해져야만 했다.
“자멸 따위 두렵지 않다.”
무강은 이빨을 악물며 환정마경의 첫 장을 펼쳤다.
스스스스!
책 한 장 한 장이 스스로 타오르듯 붉은 안개로 변해 무강의 콧구멍과 입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기이하고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책의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것이 무강의 단전(丹田)에 자리 잡는 순간, 그의 정신 영토가 거대하게 뒤흔들렸다.
“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정신세계, 황량한 마경(魔經)의 영토 속으로 수십, 수백 명의 원혼이 들이닥쳤다. 피를 흘리며 죽어간 사파 무인들, 억울하게 참수당한 검수들의 비장함과 원망, 세상을 향한 증오가 거대한 해일이 되어 그의 두뇌를 사정없이 때렸다.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무강은 흙바닥을 뒹굴었다. 눈, 코, 귀에서 붉은 선혈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칠정반사의 광기가 도심을 꺾고 그의 온몸을 찢어발기려 들었다. 미치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영혼들의 슬픔이 그의 마음에 동조하며,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목을 졸라 죽고 싶다는 극단적인 자멸의 충동이 치밀었다.
그때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씁쓸한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낮에 마셨던 천명초(天命草) 약탕의 잔향이었다.
지독하게 쓰고 차가운 그 기운이 역류하는 피와 끓어오르는 광기를 일순간 동결시켰다. 타오르는 불길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뇌리를 잠식하던 망집의 외침이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졌다.
‘살아남거라, 무강아.’
화선의 목소리가 이명의 틈새를 뚫고 들어왔다. 그 한 자락의 정신적 온기가, 자멸의 늪으로 빠지려던 무강의 이성을 단단히 붙잡아 매맸다.
무강은 폭풍 중심에서 가부좌를 틀었다. 환정마경의 심법을 운기하며, 자신을 찢어발기려던 원혼들의 내력을 역으로 옭아매고 삼키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그의 체내에서 강체(剛體)와 유체(流體)의 흐름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화산의 상생 무공이 지닌 부드러운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뼈를 깎고 살을 붙이는 극독의 마기가 그의 맥락을 새롭게 재구성했다. 단전 속에서 정순하게 정제된 어둠의 내력이 휘몰아치며 기경팔맥을 관통했다.
속가제자라 멸시받으며 십 년을 수련해도 얻지 못했던 거대한 내공의 파도가 그의 전신을 채웠다. 칠정반사의 고통을 이겨내고 힘의 인과를 온전히 지배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권능의 각성이었다.
무강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 붉은 마광(魔光)이 명멸하다가 이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전신이 가벼웠고, 대기의 흐름이 손바닥 위에 얹힌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각성의 환희는 길지 않았다. 무강은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한계를 넘은 운기로 인해 전신이 만신창이였다. 기어코 낙하원의 마당 안으로 들어선 순간, 그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쿵.
흙바닥에 쓰러진 무강의 시야로 하얀 옷자락이 비쳤다.
“무강아!”
화선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무강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뉘었다. 피투성이가 된 가슴팍과 눈가에서 흐르는 혈흔을 보며, 그녀의 손끝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무슨 수련을 하였기에 몸이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이냐!”
그녀는 소매를 찢어 무강의 얼굴에 묻은 피를 거칠게, 그러나 상처가 다칠세라 지극히 조심스럽게 닦아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무강의 뺨 위로 툭툭 떨어졌다.
무강은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녀의 체온을 느꼈다. 평생 남을 믿지 않고, 세상 모든 이들을 경계하며 쌓아 올렸던 마음의 철벽에 아주 미세한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독한 독설로 밀어내도 끝내 자신을 품어주는 이 유일한 온기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잃고 싶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무강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쿠우웅!
낙하원의 낡은 목조 정문이 거대한 경력(勁力)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며 마당 안으로 비산했다.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매서운 바람과 함께 사방으로 흩날렸다.
씁쓸한 약초 향이 나던 마당에 순식간에 살기등등한 기운이 들어찼다.
“흐흐흐,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의원이라더니 제법 쓸 만한 약초 냄새가 나는군.”
어둠을 뚫고 나타난 자들은 검은 야행복을 입고 손에 칼날이 휘어진 참마도를 든 사내들이었다. 사패천(邪覇天)의 척후 무인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약탈과 살육에 굶주린 광기가 번득이고 있었다.
선두에 선 흉포한 인상의 사내가 참마도로 바닥을 긁으며 화선과 쓰러진 무강을 향해 다가왔다.
“본산의 늙은 도사놈들을 치기 전에, 여기서 몸 좀 풀고 가야겠구나. 저 계집의 가죽을 벗겨 인질로 삼으면 도사놈들도 제법 재미있는 반응을 보이겠지?”
사내가 화선을 향해 흉포하게 손을 뻗었다. 화선은 겁에 질려 몸을 떨면서도, 무강의 앞을 가로막으며 이빨을 악물었다.
바로 그 순간, 쓰러져 있던 백무강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방금 전 삼켰던 환정마경의 붉은 마기가 칠정의 분노와 결합하여 폭발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스산한 바람이 낙하원의 마당을 쓸고 지나가는 순간, 무강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안구가 핏빛으로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