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을 적셔오는 것은 단순한 액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갑게 식어버린, 그러면서도 기묘하게 끈적거리는 선혈의 해일이었다. 구름다리 바닥의 갈라진 틈새마다 고여 있던 검붉은 점액이 구두굽을 적실 때마다 찌적, 찌적 하는 불쾌한 마찰음을 냈다.
사방을 메운 핏빛 안개는 들이쉴 때마다 폐부를 축축하게 적셨다. 비린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혀끝에 쇠맛을 남겼다.
“강우 씨, 윤세준 저 인간이 아무래도…….”
백설아의 갈라진 목소리가 조율되지 않은 바이올린의 날카로운 이중주에 묻혀 들어갔다.
놋쇠 대문 너머로 드러난 2동 연회장은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에서는 불꽃 대신 검붉은 촛농이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바닥의 왈츠 대열을 적시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춤을 추는 자들은 하나같이 목이 없었다.
대례복을 차려입은 남녀의 잘려 나간 목 단면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가 연회장 전체를 눅눅하게 채웠다.
스슥, 스스슥.
비단 드레스가 바닥을 쓰는 소리가 불협화음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대가리가 없는 무용수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고개를—아니, 목덜미를 강우 일행이 서 있는 대문 쪽으로 돌렸다.
그들의 손에는 삐죽하게 깨진 유리잔들이 들려 있었다. 잔 내부에는 정체불명의 걸쭉한 보라색 액체가 출렁거렸다.
“환…… 영…… 한…… 다…….”
연회장 사방의 벽면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귀부인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천장의 샹들리에를 타고 내려와 생존자들의 고막을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무도회의…… 손님들이여…… 잔을…… 비워라…… 그것이…… 이곳의…… 예의…….”
머리 없는 무용수 중 하나가 기괴하게 꺾인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스슥, 찌적.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깨진 유리잔이 한 생존자의 코앞까지 들이밀어졌다.
“싫…… 싫어…… 이거…… 놔……!”
강우의 뒤쪽에 서 있던 청년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무용수의 차갑고 딱딱한 손가락이 청년의 턱을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요한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아, 악! 읍…… 웁……!”
청년의 입강제로 벌어진 틈새로 깨진 유리잔의 모서리가 박혀 들어갔다. 보라색 액체가 청년의 목구멍으로 억지로 쏟아졌다. 청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뒤집히며 백태가 끼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 아래로 검붉은 혈관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그는 대사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었다.
“꺼, 꺽…… 끄으…… 살…… 려…… 싫…… 이거…… 흡……!”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청년의 몸이 굳어가더니, 이내 머리 없는 무용수들과 같은 기괴한 자세로 삐걱거리며 일어섰다. 영혼의 주권을 빼앗겨 새로운 무도회의 인형이 된 것이다.
윤세준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손가락이 소매 안쪽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명품 태엽 시계의 용두를 다급하게 만지작거렸다. 똑, 딱, 똑, 딱. 초침이 흘러가는 소리가 그의 신경을 갉아먹는 듯했다.
그는 강우의 눈치를 살폈다. 강우가 장부를 가동할 때 발생하는 그 찰나의 공백, 단 10초의 무방비 상태를 포착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왼쪽 눈이 짙은 적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적색 채무 시각(赤色 債務 視覺).’
장부를 최초로 가동하며 치렀던 지독한 대가. 시야가 흐려지고 암전되는 고통 끝에 얻어낸 이 기괴한 시선은, 이제 완전한 인과의 흐름을 꿰뚫는 사채업자의 눈이 되어 있었다.
과거 1동 관리인이 장부 뒷면에 교묘하게 숨겨놓았던 ‘포탈 세액 면책 조항’을 투시해 찾아내고 그를 파산으로 몰고 갔던 것처럼, 강우의 붉은 눈은 지금 무용수들이 들이밀고 있는 독배의 인과율을 해체하고 있었다.
강우의 시야에 붉은색 사슬들이 얽히고설킨 채 흘러가는 궤적이 잡혔다.
[채무자: 2동 입주민 및 방문자] [채권자: 2동 귀부인] [계약 항목: 웰컴 드링크 (강제 증여 형식의 영혼 지분 이전 계약)] [세율: 100% (사망 시 소유권 일체 귀속)]
“강제 증여라.”
강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증여세 신고도 하지 않은 불법 자산 이전이군. 게다가 수취인의 동의 없는 강제 집행은 소득세법 및 조세회피 방지 조항 제12조에 위배된다.”
강우는 품에서 가죽 냄새가 짙게 풍기는 ‘괴담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의 표면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자 축축한 온기를 뿜어냈다.
그는 펜을 들어 날카롭게 내리적기 시작했다.
[2동 귀부인의 ‘웰컴 드링크’ 규약은 상호 합의가 결여된 편법 증여로 규정함. 이에 따라 해당 액체의 수취 의무를 일시 정지하며, 미신고 증여 자산에 대한 임시 가압류를 선언한다.]
사각, 사각.
장부가 종이를 삼키는 소리가 연회장의 불협화음을 찢었다. 강우의 왼쪽 귀에서 삐이익 하는 이명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설아 씨.”
강우가 낮게 읊조렸다.
“준비해라.”
백설아가 이빨을 사려 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빛을 띠는 성수가 기화하기 시작했다. 강우와의 연대 채무 계약을 통해 한층 더 정교해진 그녀의 힘이었다.
그때, 또 다른 머리 없는 무용수가 윤세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깨진 유리잔이 그의 턱밑을 겨누었다. 윤세준의 이마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그는 자신의 시계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강우의 빈틈을 노리기에는 아직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윤세준이 결국 포기한 듯 잔을 받아 들려던 찰나였다.
“비켜!”
백설아가 소리쳤다. 그녀가 양손을 뻗자, 섭씨 수백 도에 달하는 뜨거운 성수 가열 연무가 윤세준의 눈앞으로 뿜어졌다.
치이이이익—!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무용수가 들고 있던 깨진 잔 속의 보라색 액체가 순식간에 하얀 연기로 변해 허공으로 증발해 버렸다. 뜨거운 열기가 윤세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
윤세준이 뒤로 주춤하며 백설아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에 당혹감과 굴욕감이 교차했다. 백설아는 식어가는 안개를 헤치며 윤세준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살고 싶으면 빚진 줄 알아라, 윤세준 씨. 방금 네 목숨 값은 우리 법인의 단기 채권으로 등록되었으니까.”
백설아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없었다. 철저하게 비즈니스적인 상호 구원. 그것이 주식회사 은하의 생존 방식이었다. 윤세준은 이를 갈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그의 목숨 줄은 강우와 설아의 손아귀에 저당 잡힌 뒤였다.
그 소란을 틈타, 강우는 조용히 무리에서 이탈했다.
그의 목적지는 연회장의 중심이 아니었다. 적색 채무 시각이 가리키는 붉은 사슬의 시발점. 연회홀 가장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곳에 위치한 귀부인의 개인 집무용 서랍장이었다.
스슥, 스슥.
강우의 발걸음은 유령처럼 고요했다. 연회장의 모든 관심이 독배의 증발과 백설아의 대치로 쏠려 있는 사이, 그는 서랍장 앞에 도달했다.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나무로 짜인 서랍장에서는 찌든 피비린내와 습한 곰팡이 냄새가 동시에 풍겨 나왔다. 서랍 손잡이는 사람의 손가락 뼈를 깎아 만든 듯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강우는 망설임 없이 첫 번째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수많은 서류와 장신구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강우의 붉은 눈이 서랍 구석진 곳, 다른 물건들 아래에 깔려 있는 낡은 가죽 조각을 포착했다.
그것은 단순한 가죽이 아니었다.
끼이익, 끼익…… 찌지직…….
연회장 단상 위에서 연주되는 목 없는 악단의 바이올린 소리가 고조될 때마다, 그 가죽 조각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움찔거리며 형상을 찌그러뜨렸다. 음파의 진동에 동조하여 가죽 표면의 핏자국들이 기괴하게 꿈틀거리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을 유발했다.
[마담 바토리의 피 젖은 음악 수첩 가죽]
강우의 안광이 번뜩였다.
이것이었다. 9동의 지배자이자 이 아파트의 근원 중 하나인 마담 바토리의 유물. 특정 비명과 음파에 반응해 인과율을 붕괴시키는 성질을 가진 절대적인 약점의 열쇠였다.
강우는 괴담 장부를 펼쳐 가죽 조각 위에 가볍게 얹었다.
[미납 법인세 및 국경 침범 수수료 체납자 ‘2동 귀부인’의 사유 자산 중 일부를 임시 압류 처분함.] [압류 대상: 마담 바토리의 피 젖은 음악 수첩 가죽] [해당 유물은 주식회사 은하의 합법적 가압류 자산으로 귀속된다.]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사슬이 가죽 조각을 단단히 죗다. 가죽 조각은 마지막 비명을 지르듯 부르르 떨더니, 이내 강우의 자산 등록 주머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귀부인이 무도회라는 유희로 생존자들의 목숨을 희롱하는 사이, 강우는 그녀의 등 뒤에서 가장 치명적인 보물을 합법적으로 털어낸 것이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교한 회계 처리가 완료되었을 때의 서늘한 희열이 차올랐다.
강우가 서랍을 닫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 순간, 연회장의 모든 불협화음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고요함이 무겁게 가라앉은 연회장 내부. 끈적이는 피의 왈츠가 멈추고, 머리 없는 무용수들이 일제히 한곳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강우의 등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김이 목덜미를 스쳤다.
“내…… 방에…… 쥐새끼가…… 들었구나…….”
스스스슥.
뼈로 만든 부채가 펼쳐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고막을 긁었다. 강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의 코앞에는 피눈물이 줄줄 흐르는 하얀 무도회 가면을 쓴 여인이 서 있었다.
귀부인이었다.
그녀의 눈구멍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화려한 레이스 드레스를 적시고 있었다. 그녀가 쥔 칼날 부채의 끝부분이 강우의 목울대를 부드럽게, 하지만 당장이라도 살점을 가를 듯이 파고들었다.
“세관원이라더니…… 결국은…… 도둑놈…… 이었어…….”
가면 너머의 음습한 시선이 강우의 심장을 꿰뚫을 듯이 닿았다.
“가택…… 무단…… 침입의…… 대가는…… 네…… 목숨의…… 지분이다…….”
목을 겨눈 차가운 칼날의 감촉과 함께, 연회장의 문들이 일제히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완벽한 밀실 속에서, 귀부인의 살기가 강우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목울대를 짓누르는 칼날 부채의 서늘한 감촉이 피부를 찌르르하게 자극했다. 쇠가죽 타는 냄새와 눅눅한 피비린내가 귀부인의 드레스 자락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라 강우의 콧등을 찔렀다.
귀부인의 하얀 가면 틈새로 흘러내리는 검붉은 액체가 강우의 깃을 타고 내려와 끈적하게 스며들었다. 죽음의 위협이 턱밑까지 들어찬 순간이었지만, 강우의 심박수는 회계 장부의 숫자를 맞추듯 고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가택 침입이라.”
강우의 왼쪽 눈, 선명하게 타오르는 적색 채무 시각(赤色 債務 視覺)이 귀부인을 관통했다.
그의 시야에 비친 연회장의 풍경은 온통 붉은색 채무 사슬로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특히 귀부인의 발목에서 뻗어 나온 가장 굵은 사슬이 연회장 바닥을 지나, 그가 방금 털어낸 마호가니 서랍장 내부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슬의 중간중간에는 시커멓게 타들어 간 균열이 가득했다.
강우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주민공동시설 무단 점유 및 용도 변경. 은하 아파트 관리규약 제14조에 따르면, 각 동의 지하 연회장은 입주민 전체의 공용 지분으로 분류된다. 즉, 이곳은 당신의 사유지가 아닌 공공재산이다.”
강우가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공공재산을 무단 점유하여 사적 무도회를 개최하고, 입주민들에게 불법 증여(웰컴 드링크)를 강요한 자가 도대체 무슨 권리로 가택 침입을 논하는 거지? 당신은 이 공간에 대한 배타적 소유권을 주장할 법적 근거가 없다.”
“이…… 놈이…… 감히…… 주둥이를…….”
귀부인의 가면 뒤에서 이빨이 갈리는 득득 하는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칼날 부채가 강우의 목가죽을 가볍게 그으며 붉은 선을 그렸지만, 강우는 품속의 괴담 장부를 움켜쥐었다.
규약을 비틀고 인과를 조작하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했다. 강우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신체 지분 중 하나를 저당 잡혔다.
‘우측 상지(上肢)의 온각과 촉각을 임시 양도한다.’
순간, 장부를 쥔 우측 손끝부터 어깨까지 얼음장 같은 냉기가 스르륵 번지더니 완전히 감각이 마비되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팔이 아니라, 마치 남의 뼈다귀를 이어 붙인 것처럼 둔탁하고 무거운 이물감만이 남았다. 감각이 소멸한 자리에 끈적한 어둠의 기운이 채워지는 느낌은 언제 겪어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장부의 빈 면에 시커먼 먹물이 스스로 번지며 새로운 조항을 써 내려갔다.
[특약 사항: 2동 연회장은 공용 지분으로 소급 적용됨. 이에 따라 피고인(귀부인)의 점유권은 일시 박탈되며, 원고(한강우)에 대한 가택 침입 및 절도죄 혐의는 성립되지 아니함.]
쿠구궁!
연회장 천장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허공에서 기어 나온 시커먼 쇠사슬들이 귀부인의 칼날 부채를 칭칭 감아쥐었다. 쇠사슬이 부딪치는 쟁그랑, 쟁그랑 하는 쇳소리가 연회장의 침묵을 깨부수었다. 강우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날 부채가 인과의 강제력에 밀려 스르르 뒤로 밀려났다.
“이…… 건…… 말도…… 안…… 돼…….”
귀부인의 뚝뚝 끊기는 목소리에 당혹감이 짙게 묻어났다.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괴한 오라가 쇠사슬의 압박에 못 이겨 찌지직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광경을 뒤에서 지켜보던 윤세준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강우의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