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초대장을 받아 든 백설아의 얼굴색이 급작스레 푸르게 얼룩지며, 가슴 정중앙에 고리 모양의 '피의 채무 주홍글씨'가 진동하며 타오르기 시작한다.
치지직, 하는 불쾌한 침식음이 뼈마디를 타고 고막 안쪽까지 스며들었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누린내가 좁은 복도의 공기를 단숨에 오염시켰다. 백설아의 얇은 셔츠 가슴께가 검붉은 불꽃에 그슬려 찢겨 나갔고, 그 틈새로 살갗을 문신처럼 파고드는 끈적한 핏빛 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윽…… 강, 우 씨……!”
백설아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바닥에 쓰러진 그녀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손가락을 버둥거렸다. 굳어버린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손톱 끝에서 찌르르한 진물이 배어 나왔다. 그녀가 비명을 지를 때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가래 끓는 소리가 튀어나왔고, 입술은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빛으로 물들어 갔다.
생명력이 빠른 속도로 누출되고 있었다. 1동 관리인의 영혼을 압류하고 겨우 숨을 돌린 생존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걸음질 쳤다.
“이, 이게 무슨……! 또 귀신인가?”
“2동 귀부인의 저주야! 초대장을 받으면 무조건 죽는다고 했잖아!”
아수라장이 된 현장 속에서 한강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백설아의 가슴팍에서 거미줄처럼 뻗어 나오는 붉은 선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우의 왼쪽 눈이 핏빛으로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장부를 최초 가동하며 지불했던 시력 저당의 대가. 한때는 온 세상을 검게 물들였던 그 지독한 장애는, 이제 귀신들의 영적 비즈니스 채무 흐름을 꿰뚫어 보는 ‘적색 채무 시각’이라는 기괴한 권능으로 정착해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왼쪽 시야 너머로 선명한 사슬이 보였다. 백설아의 심장 깊숙이 박힌 검붉은 사슬은 허공을 가로질러 2동의 구름다리 너머, 거대한 어둠이 웅크린 곳으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슬의 끝에는 욕망의 사채를 굴리는 2동의 지배자, 귀부인의 탐욕스러운 손아귀가 얽혀 있었다.
“지체상금 독촉인가.”
강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소리에는 동료의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공포나 당혹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기한이 도래한 부채를 마주한 회계사의 건조한 응시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품 안에서 가죽 표지가 닳아 빠진 ‘괴담 장부’를 꺼내 들었다. 장부의 책장을 넘기는 손길 끝에서 슥, 슥 하는 서늘한 종이 마찰음이 복도에 무겁게 깔렸다.
“백설아 씨의 영혼은 현재 ‘주식회사 은하’의 핵심 담보 자산이다. 무단으로 담보물의 가치를 훼손하는 행위는 명백한 계약 불이행이지.”
강우의 손가락이 장부의 한 면을 짚었다. 적색 채무 시각을 통해 백설아의 몸을 갉아먹는 귀부인의 주술식 내부 구조가 낱낱이 해체되어 수치로 환산되었다.
[담보물 대상: 백설아 (주식회사 은하 소속 채무자)] [발생 채무: 2동 귀부인의 강제 집행령 (피의 채무 주홍글씨)] [피해 규모: 초당 생명력 3.5% 감쇄, 영혼 지분 부식 진행 중]
“법인 자산의 손실을 방관하는 대표이사는 없다. 지금부터 단기 금융 조치를 발동한다.”
강우가 만년필을 쥐고 장부 위에 거침없이 글씨를 써 내려갔다. 잉크가 닿는 자리마다 검붉은 불꽃이 일며 종이를 그슬렸다.
“백설아의 개인 육체 채무를 주식회사 은하의 ‘자산 임시 보증’ 제도로 이양한다. 발생한 모든 물리적, 영적 손실은 법인의 특별 손실금 계정으로 이체. 대차대조표상의 허위 계정으로 대체 처리한다.”
글씨가 완성되는 순간, 장부에서 뻗어 나온 검은 사슬들이 백설아의 몸을 감싸 안았다.
화아아악!
백설아의 가슴을 태우던 검붉은 불꽃이 순간적으로 검은 사슬 속으로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타들어 가던 살점이 기적처럼 재생되기 시작했고, 그녀를 짓누르던 기괴한 압박감이 단숨에 증발했다.
“아……? 어……?”
백설아가 멍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통증도, 열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통의 수치 자체가 시스템 내부에서 ‘허위 계정’으로 처리되어 지워진 탓이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치명적인 저주가, 단 한 장의 장부 조작으로 무력화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의 생존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린 채 한강우를 바라보았다.
“이게…… 말이 돼? 방금 그 저주가 사라진 거야?”
“아니, 사라진 게 아닙니다.”
강우가 냉정하게 말을 자르며 장부를 덮었다.
“채무의 주체와 계정을 변경했을 뿐입니다. 이제 귀부인의 저주는 백설아라는 개인의 생명이 아니라, ‘주식회사 은하’의 법인 부채로 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법인은 합법적인 채무 조정을 신청할 권리가 있지요.”
그때, 2동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너머에서 웅웅거리는 기괴한 진동음이 들려왔다. 귀부인이 심어둔 귀신의 영혼 채권 추심이 시작된 것이었다.
스스스스…… 하는 소리와 함께 사방의 벽면에서 축축하고 끈적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뚝, 뚝 떨어지는 붉은 액체는 지독한 비린내를 풍겼다.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 내…… 내…… 돈…… 내놔…… 내 영혼…… 돌려줘……!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괴한 목소리가 생존자들의 고막을 찔렀다. 귀부인의 대리인으로 파견된 추심 귀신이었다. 놈은 백설아의 영혼을 회수하기 위해 아파트의 물리적 장벽을 무시하고 강제로 경계를 넘어오고 있었다.
생존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강우의 뒤로 숨었다.
강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적색 채무 시각이 추심 귀신의 이마에 새겨진 낙인을 선명하게 포착했다. 놈의 몸 구석구석에 얽힌 인과의 사슬들이 붉은 숫자로 변환되어 보였다.
“2동의 귀부인에게 전해라.”
강우가 장부를 다시 펼치며, 미리 준비해 둔 한 장의 종이를 뜯어냈다. 그것은 검은 인장과 피로 쓰인 기괴한 고지서였다.
“이곳 1동은 전임 관리인의 파산으로 인해 ‘주식회사 은하’가 합법적으로 가압류하여 소유권을 획득한 영토다. 소유권 이전 등기가 완료된 사유지에 무단으로 영적 전파를 송출하고 채권 추심을 강행하는 것은 명백한 부동산 선취 특권 위반이자 불법 침입이다.”
강우가 종이를 허공에 던졌다.
“부동산 선취 특권 위반 통지서(Notice of Violation of Real Estate Lien) 발부.”
철컥!
허공에서 거대한 검은 사슬들이 튀어나와 추심 귀신의 사지를 옥죄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사슬은 자비 없이 놈의 몸을 조여들었다. 귀부인이 보낸 영적 추심의 힘이, 강우가 쳐놓은 법적 방어막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나기 시작했다.
- 아…… 아아아악……! 귀…… 귀부인…… 님……!
추심 귀신의 형체가 검은 진흙처럼 바스러지며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1동 경계를 침범했던 귀부인의 마력이 완전히 차단되고, 사방을 물들였던 축축한 피비린내도 순식간에 걷혔다.
강우는 바닥에 떨어진 끈적한 진흙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체납자 주제에 남의 자산에 손을 대다니. 무례하군.”
완벽한 제압이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악마의 주술조차 회계 장부의 규칙 아래에서는 한낱 불법 채권 추심에 불과했다. 생존자들은 경외감과 공포가 뒤섞인 눈빛으로 강우를 우러러보았다.
하지만 그 무리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윤세준이 소리 없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명품 태엽 시계가 째깍, 째깍 소리를 내며 돌고 있었다.
‘지불했군.’
윤세준의 예리한 시선이 강우의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강우의 왼쪽 귀 뒤편으로 미세하게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우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것을 닦아냈지만, 그의 왼쪽 귀가 완전히 먹먹해진 상태라는 것을 윤세준은 알아차렸다.
장부를 크게 조작할 때마다 치러야 하는 오감 저당의 대가. 이번에는 좌측 청각의 일시적 상실이었다.
윤세준은 손목시계의 초침을 보았다. 자정 직후, 대가를 지불하는 그 짧은 순간 동안 한강우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가 된다. 그 시간은 정확히 10초 내외.
‘장부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 아파트의 지배자는 내가 된다.’
윤세준의 가슴 속에서 비틀린 야욕이 꿈틀거렸다. 그는 강우의 뒤를 따르는 척하면서도, 다른 동으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의 위치를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계산하고 있었다. 이미 그의 시선은 1동을 벗어나, 더 큰 이권이 도사리고 있는 2동과 3동의 경계면을 훑고 있었다.
백설아가 그런 윤세준의 시선을 눈치채고 차갑게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품속의 무기로 향했다.
“윤세준 씨. 딴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설마. 동맹의 주주로서 상황을 관측하고 있을 뿐이야. 우리가 살려면 대표이사의 능력이 확실해야 하니까.”
윤세준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강우는 두 사람의 신경전을 무시한 채, 장부를 품에 넣었다. 청각이 마비된 왼쪽 귀에서 이명이 삐이익 하고 울렸지만, 그의 걸음걸이에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시간이 없다. 자본금을 확보했으니, 이제 2동의 고액 체납자를 만나러 간다.”
강우의 선언에 생존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무기를 고쳐 잡았다.
일행은 1동과 2동을 연결하는 폐쇄된 구름다리로 향했다. 단지 사이를 잇는 통로는 오랫동안 방치된 듯 먼지와 거미줄로 가득했고, 바닥은 정체불명의 끈적한 액체로 뒤덮여 발을 디딜 때마다 찌적, 찌적 하는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강우의 왼쪽 눈에 깃든 적색 채무 시각은 구름다리 곳곳에 얽힌 보이지 않는 덫과 채무의 흐름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왼쪽 벽에서 30센티미터 떨어져서 걸어라. 그곳에 귀부인의 사채 이자가 고여 있다.”
강우의 지시에 따라 생존자들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구름다리 끝, 2동으로 진입하는 거대한 놋쇠 대문 앞에 도달했다. 대문 표면에는 기괴한 무도회의 가면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고, 그 눈구멍마다 말라붙은 피가 검붉게 굳어 있었다.
윤세준이 슬그머니 대문 옆의 어두운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이 벽면에 숨겨진 기묘한 문양을 더듬는 것이 보였다. 다른 동의 지배자들과 내통하려는 듯한 은밀한 움직임이었다.
백설아가 이빨을 악물며 강우에게 다가갔다.
“강우 씨, 윤세준 저 인간이 아무래도…….”
그녀가 경고하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둥……!
거대한 놋쇠 대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스스로 열리기 시작했다.
대문 틈새로 뿜어져 나온 것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짙은 안개와 비린내였다. 그리고 그 안개 속에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끼이익, 끼익…… 찌지직…….
조율되지 않은 바이올린과 첼로의 불협화음이 고막을 찢듯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음악이 아니었다. 광기 어린 비명과 흐느낌을 가락으로 엮어 만든 지옥의 선율이었다.
안개가 걷히며 드러난 연회장 내부의 광경에 생존자들은 비명을 지를 힘조차 잃고 굳어버렸다.
단상 위에서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자들은 모두 목이 잘려 나간 예복 차림의 악단이었다. 목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는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와 연회장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그 피비린내 나는 붉은 왈츠 곡조가, 구름다리를 넘어 한강우의 발밑까지 끈적하게 적셔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