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철문 틈새로 뿜어져 나온 붉은 안개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바닥을 스슥 기어 다녔다. 끈적이는 핏빛 증기가 통로 바닥의 시멘트를 까맣게 녹여 내려앉히며 지독하게 습한 악취를 풍겼다. 강우의 발끝에 닿기 직전, 1동 경비실 입구에 내팽개쳐져 있던 낡은 무전기 수신기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터져 나왔다.

철가루가 긁히는 듯한 소음 사이로, 귀가 먹먹해지는 여인의 피 비린내 진동하는 웃음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뒤이어 무용수들의 비명 가득 찬 무도회 곡이 찢어지는 듯한 불협화음으로 흘러나와 사방을 잠식했다.

“아하하하……! 아하핫……!”

웃음소리는 쇠못으로 유리를 긁는 것처럼 날카롭고 눅눅했다. 무전기 스피커에서 검붉은 진액이 뚝뚝 떨어지며 바닥에 끈적하게 고였다. 백설아는 귀를 틀어막은 채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귓가에서 다시금 미세한 핏방울이 흘러내려 턱 끝을 적셨다.

강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차가운 구두 굽이 핏빛 안개가 고인 바닥을 짓밟았다.

왼쪽 눈의 시야가 기이하게 흔들렸다. 일시적인 실명과 이명 너머로, 이전에 치렀던 저당의 대가가 신경망 깊숙이 영구히 각인되는 감각이 찾아왔다. 검은 장부를 펼쳐 쥔 손끝에 찌릿한 전류가 흘렀다. 단순한 시각 장애를 넘어, 이제 그의 왼쪽 눈은 어둠 속에서도 붉게 타오르는 쇠사슬들을 뚜렷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파트의 공간과 원귀들의 인과를 옭아매고 있는 영적 비즈니스 채무의 흐름이었다.

붉은 사슬은 철문 너머, 2동의 심장부에서부터 뻗어 나와 무전기 안테나를 휘감고 있었다.

무전기 너머의 목소리가 한층 더 눅눅하고 기괴하게 변해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가여운…… 벌레들……. 자정이다. 자정까지…… 2동 무도회장으로…… 전원 오지 않으면…….”

치직, 치지직.

더러운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왈츠의 템포가 숨 막히게 빨라졌다.

“……은하 아파트 전체를…… 독가스로 청소하겠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그것은 자비 없는 강제 집행의 예고였다. 2동을 지배하는 귀부인의 일방적인 독소 계약서가 무전이라는 무허가 전파를 타고 아파트 전체에 불법 송출된 셈이었다.

주변에 숨어 숨죽이고 있던 생존자들이 벽 뒤에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끄윽, 끄으러럭 하는 숨 가쁜 신음과 함께 절망이 공기 중으로 번져 나가며 복도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미친…… 미친 소리…….”

윤세준이 이빨을 딱딱 맞부딪치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명품 태엽 시계 초침이 무의미하게 째깍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안개의 끈적이는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우는 무전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공포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장부의 다음 지면을 차갑게 쓸어내릴 뿐이었다.

“소음 공해에, 허위 사실 유포라.”

강우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건조한 목소리가 복도의 불쾌한 음악 소리를 뚫고 선명하게 울렸다.

“거기다 일방적인 가스 청소 운운하는 협박성 공지까지. 아주 전형적인 불량 거래 처방이군.”

강우가 무전기 수신기를 거칠게 집어 들었다. 수신기 표면에 묻어 있던 차갑고 끈적이는 점액질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었으나, 강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송신 버튼을 깊게 눌렀다.

“2동 귀부인 씨. 당신이 송출한 무차별적 공고는 주식회사 은하의 영업 구역 내에서 불법으로 간주됩니다.”

왈츠 음악이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무전기 너머에서 쉭, 쉭 하는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의 끈적한 들숨 같았다.

“무슨…… 소리를…….”

“듣고 있으니 똑바로 기록해 두십시오.”

강우의 왼쪽 눈, 완전히 각성한 적색 채무 시각이 무전기 안테나를 타고 흐르는 붉은 사슬의 연결 고리를 정밀하게 추적했다. 사슬의 굵기와 그 표면에 새겨진 채무 수치들이 숫자의 형태로 강우의 뇌리에 선명하게 인쇄되었다.

[2동 귀부인: 미납 법인세 및 무단 전파 송출 수수료 45억 CC 체납 중.] [불법 침입 및 영업 방해 혐의 가중 처벌 대상.]

“첫째, 귀하가 제시한 ‘자정까지 무도회장 전원 참석’이라는 요구는 약관 규제법 제9조에 의거, 고객에게 부당하게 불리한 조항으로 무효입니다. 둘째, 불참 시 독가스로 아파트 전체를 청소하겠다는 조항은 해제권의 남용이자 협박에 의한 불공정 계약 체결 시도입니다. 따라서 본 송신 행위 자체를 ‘강압에 의한 불공정 약관 송출 행위’로 규정합니다.”

강우의 손가락이 장부의 한 페이지를 거칠게 찢어냈다. 찢어진 종이 표면에 붉은색 잉크가 스르륵 번지며 고지서의 형태로 변해 갔다.

“이에 주식회사 은하는 귀하에 대한 세무 감사를 정식 개시합니다. 아울러 방금 발송하신 무도회 초대장은 규격 미달 및 허위 과대 광고로 판정되어 등기 반려 처리합니다.”

“크으으으……! 건방진…… 인간 놈이……!”

무전기 너머에서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철문 틈새로 들어와 바닥을 기어 다니던 붉은 안개가 마치 불에 달구어진 철사처럼 부르르 떨리며 뒤틀렸다.

스스슥, 콰득!

철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거대한 손의 긁는 소리가 멈췄다. 강우가 제시한 인과의 고지서가 허공에서 붉은 사슬로 화해 귀부인의 손목을 강하게 옭아맨 탓이었다. 불법 영업 방해 및 세금 체납에 대한 임시 가압류 조치가 즉시 집행된 것이다.

“아아아악! 내…… 손이…… 내 손목이……!”

귀부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무전기를 터뜨릴 것처럼 울려 퍼지더니, 이내 정적이 찾아왔다. 철문 틈새의 붉은 안개는 힘을 잃고 바닥에 눌어붙은 검은 그을음처럼 변해 사그라들었다.

복도에 가득했던 숨 막히는 압박감이 한순간에 흩어졌다.

구경하던 생존자들이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파트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였건만, 강우는 단 몇 마디의 세법 조항과 고지서 한 장으로 그 거대한 재앙을 '반려'시켜 버린 것이다.

“말도 안 돼…….”

윤세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이마에서 끈적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우의 계산벽과 비정상적인 인과 조작 능력이 자신들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해 있음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강우는 무전기를 다시 바닥에 던져 버렸다. 그리고 셔츠 소매에 묻은 붉은 진액을 무심히 털어내며 차가운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협은 일시적으로 유예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들의 탈세 규모와 사채 독촉 주기를 고려할 때, 자정이라는 기한 자체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강우가 장부를 덮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귀부인의 요구는 불량 제품이지만, 그 배후에 있는 시스템의 강제력은 실재하니까요. 자산을 지키기 위해서는 선제적인 구조 조정이 필요합니다.”

백설아가 비틀거리며 강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단단했다.

“대표님,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2동으로 직접 들어가야 합니까?”

강우는 대답 대신 백설아의 가슴 팍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의 적색 채무 시각이 그녀의 영혼에 얽혀 있는 ‘생명 연장 임대 계약’의 가느다란 붉은 선을 투시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대략 두 시간 반. 백설아의 목숨을 담보로 한 채무 기한이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이기 전에, 사내 자원을 재배치해야 합니다.”

강우가 차갑게 선언했다.

“주식회사 은하의 비상 주주 총회를 소집합니다. 1동 관리인을 압류해서 얻은 고정 자산과 비자금을 즉시 분배하고, 2동 진입을 위한 수복 자원으로 일괄 배정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타인의 생존을 철저히 법인 지분과 채권 관계로 환산하는 사채업자식 논리가 다시 한번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우는 주위를 둘러보며 숨어 있던 입주민들을 향해 손짓했다.

“모두 들으십시오. 지금부터 여러분은 주식회사 은하의 임시 주주이자 채권자들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잠재력과 물리적 능력을 법인의 자본금으로 출자해 주십시오. 대가로 저는 귀부인의 무도회에서 여러분의 안전을 보장하는 배당금을 지급하겠습니다.”

생존자들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공포에 질려 수동적으로 도망치던 이들에게, 강우의 비즈니스식 제안은 기이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구명줄로 다가왔다.

“출자하겠습니다! 제 이능은 신체 강화입니다!”

“저도…… 저도 제 영혼의 일부를 담보로 넘기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이 앞으로 기어 나와 계약서에 서명하기 시작했다. 강우의 검은 장부 위에 붉은색 계약 도장들이 쉴 새 없이 찍혔다.

백설아는 그 모습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정하지만, 이 아파트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방법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윤세준은 그 무리에 끼지 않은 채, 벽에 기대어 강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그의 시선은 강우의 주머니 속에 있는 검은 장부에 고정되어 있었다. 태엽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며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강우는 장부에 기록된 자산 현황을 빠르게 정산했다. 1동 관리인의 영혼과 비자금에서 회수한 영적 자원들이 주식회사 은하의 자본금 란에 빼곡히 기록되었다.

“자산 포트폴리오 구성 완료.”

강우가 장부를 덮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왼쪽 눈이 붉게 타오르며 2동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너머를 응시했다.

바로 그때였다.

강우의 시야에 비친 붉은 사슬 중 하나가 기이하게 팽팽해지며 백설아의 가슴 정중앙으로 연결되는 것이 보였다. 사슬의 다른 쪽 끝은 2동의 심장부, 귀부인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었다.

“설아 씨.”

강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백설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예? 무슨 일 있으십니까?”

그녀가 대답하려던 찰나, 백설아의 얼굴색이 급작스레 푸르게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얇은 셔츠 너머로, 가슴 정중앙에 고리 모양의 붉은 낙인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화아악!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피로 쓰인 기괴한 글자, '피의 채무 주홍글씨'였다.

“아…… 윽……!”

백설아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가슴팍에 새겨진 낙인이 미친 듯이 진동하며 검붉은 불꽃을 내뿜기 시작했다. 불꽃이 일 때마다 그녀의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비명이 복도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등기 반려된 귀부인의 초대장이, 백설아의 영혼을 담보 삼아 강제 집행의 형태로 되돌아온 것이었다.

강우의 눈앞에서, 백설아의 생명력 수치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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