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 안개는 살아 있는 짐승처럼 아파트 복도의 바닥을 기어왔다.

습하고 끈적거리는 점액질의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사방에서 스슥, 스스슥하며 수천 마리의 그리마가 시멘트 벽을 긁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 고막을 찔렀다. 들이마시는 공기마다 썩은 피의 비린내와 먼지 냄새가 섞여 목구멍을 칼로 긋는 듯 따끔거렸다.

[경고: 1동 관리인이 계약 이행 의무 조항을 전면 위반했습니다!] [비상사태 발생. 관리인의 폭주로 인해 1동 복도 전체의 통로가 영구 폐쇄 단계에 돌입합니다.]

눈앞을 메운 가시거리는 채 1미터도 되지 않았다. 회색빛 벽면이 쩍쩍 갈라지며 뿜어내는 진흙 같은 액체가 발등을 적셨다.

"이, 이게…… 무슨……!"

백설아가 목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핏줄이 검붉게 돋아나고 있었다. 안개에 포함된 부식성 독기가 그녀의 호흡기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우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그의 왼쪽 눈은 이미 정상적인 안구를 잃고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적색 채무 시각. 시야가 온통 붉고 검은 선과 숫자의 흐름으로 재편된 세계 속에서, 강우는 흔들림 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가닿은 곳은 붉은 안개의 중심부였다. 안개 속에는 무수한 가시철사 모양의 붉은 실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아파트의 비상구와 창틀을 옭아매고 있었다.

"계약 위반이라."

강우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가죽 장부가 스스스 소리를 내며 스스로 한 페이지를 넘겼다.

"백설아, 뒤로 물러서."

"강우 씨…… 컥, 숨이…… 안…… 쉬어…… 져요……."

백설아의 입술이 파랗게 질려 갔다. 그녀가 뱉어내는 가쁜 숨결마다 붉은 안개가 찌르르한 진동을 일으키며 그녀의 폐부 깊숙이 침투하려 들었다.

강우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머릿속의 회계 장부를 빠르게 굴렸다. 적색 채무 시각으로 투시한 1동 관리인의 상태는 '계약 불이행에 따른 일시적 자격 정지' 상태여야 했다. 그러나 놈은 아파트 자체의 물리적 환경을 오염시키는 방식으로 계약의 맹점을 우회하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입주민을 공격하는 것은 계약 위반이지만, 아파트의 미공개 공용 구역인 복도에 '하자'를 발생시켜 간접사 시키는 방안.

"꼼수치고는 조잡하군."

강우가 장부의 여백에 깃털 펜을 대었다.

스스슥.

검은 잉크가 종이 위에 닿는 순간, 강우의 왼쪽 귀에서 삐이이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장부를 조작하는 대가, 즉 등가교환의 법칙이 발동한 것이다. 이번에 지불해야 할 저당물은 신체의 활력, 구체적으로는 체온과 근력의 30%였다.

순식간에 강우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입술이 해쓱하게 마르고, 무릎뼈가 삐걱거리며 무거운 피로가 전신을 지배했다. 심장이 둔탁하게 뛰며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그러나 그의 눈빛만큼은 오히려 더 투명하게 번뜩였다.

"피고 1동 관리인. 계약서 제4조 2항 '공용 면적 내 무단 점유 및 유해 물질 살포 금지' 조항 위반."

강우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에 따라 본 법인은 해당 행위를 '무단 시설 훼손' 및 '영업방해 행위'로 정의한다. 영업 손실 및 입주민 건강 파괴에 따른 일일 체납 수수료를 즉각 산출한다."

장부의 붉은 페이지 위로 새로운 숫자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체납 과세 대상: 1동 관리인] [죄목: 무허가 환경 오염 및 임차인 점유권 방해] [부과 세액: 영력 450포인트 및 1동 공용 통로 소유권 일시 압류]

"말도…… 안 돼……."

백설아가 바닥을 짚은 손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에도, 강우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안광이 똑똑히 보였다.

강우는 한 걸음 나아가 백설아의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길은 시체처럼 차가웠지만, 그 손끝을 통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순하고 강한 영적 에너지가 백설아의 전신을 감쌌다.

"주식회사 은하의 정관 제12조에 의거, 사내 주주 및 채권자 보호를 위한 '긴급 구제 조치'를 가동한다. 백설아의 호흡 결계를 임시 강화한다. 비용은 법인의 예비 자산에서 선지출 후, 추후 노동력으로 환산 청구하겠다."

"아……."

백설아의 목을 죄던 끈적한 압박감이 순식간에 씻겨 나갔다. 허파 가득 맑은 공기가 흘러 들어오자 그녀는 거칠게 기침을 토해 내며 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흘러내린 그녀의 땀방울이 붉은 안개와 닿아 칙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그녀의 몸 주변으로 투명한 육각형의 결계막이 엷게 씌워져 있었다. 안개가 결계막에 닿을 때마다 찌르르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이 모든 과정을 한 걸음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외이사, 윤세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윤세준은 품바지 주머니에 슬그머니 손을 넣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묵직한 황동 재질의 구형 명품 태엽 시계였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규칙적으로 그의 손끝을 타고 뇌리로 전해졌다.

윤세준은 강우가 장부를 펼쳐 들고 백설아에게 결계를 씌우는 그 '찰나'의 순간을 주시했다.

'1초, 2초, 3초…….'

그는 마음속으로 초를 세고 있었다. 강우가 장부를 조작해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는 순간, 그의 얼굴에 스치는 미세한 경련과 급격히 떨어지는 체온, 그리고 손끝의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등가교환. 힘을 쓰는 대가로 무언가를 지불하고 있어. 그리고 그 힘이 발동하고 난 직후…….'

윤세준의 매서운 눈동자가 시계의 초침과 강우의 움직임을 동시에 좇았다. 강우가 책장을 덮고 안경을 고쳐 쓰는 그 짧은 간격.

정확히 10초.

그 10초 동안 강우의 전신에서 흐르던 핏빛 채무의 선들이 완전히 끊어지고, 그의 호흡이 비정상적으로 가빠지는 무방비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윤세준은 사냥개처럼 포착해 냈다. 그 10초라면, 자신의 단검으로 강우의 심장을 세 번은 꿰뚫고 장부를 빼앗아 달아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윤세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러나 그 비틀린 미소가 완전히 자리 잡기도 전이었다.

강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세준을 응시했다. 그의 핏빛 왼쪽 눈이 윤세준의 손목과 주머니 속 태엽 시계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적색 채무 시각의 그물망 위로, 윤세준이 품은 음험한 계산이 붉은색 노이즈가 되어 지직거리며 떠올랐다.

"윤 이사."

강우의 건조한 음성이 복도의 습한 공기를 가르고 나직하게 울렸다.

"……?"

"자네가 가진 그 시계, 태엽 소리가 제법 크군."

윤세준의 손가락이 굳었다.

강우는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는 얼음 계곡에서나 느껴질 법한 서늘한 한기가 풍기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태산처럼 무거웠다.

"법인 계약서 제8조 '상호 간의 영업 비밀 유지 및 신뢰 의무' 조항을 잊은 모양이군. 내 능력의 발동 주기와 한계를 무단으로 측정하는 행위는 '기업 스파이 행위' 및 '영업 기밀 유출 시도'로 간주된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한 대표. 난 그저 상황이 긴박해서 시간을 보고 있었을 뿐이야."

윤세준이 짐짓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주머니 겉으로 드러난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시간을 보는 것치고는 초침의 흐름에 내 심장 박동을 동조시키려 하더군."

강우가 장부를 가볍게 툭 쳤다.

"경고하는데, 내 장부의 대가와 공백을 노리는 리스크는 자네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만약 한 번만 더 내 가동 불능 시간을 측정하려 든다면, 자네가 가진 그 명품 시계의 소유권과 자네의 오른쪽 손가락 다섯 개를 '기업 비밀 침해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금'으로 즉각 압류하겠다."

윤세준의 턱뼈가 바짝 조여졌다.

강우의 말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그의 왼쪽 눈에서 뻗어 나온 붉은 사슬 모양의 채무 선이 이미 윤세준의 오른손목을 느슨하게 감아쥐고 있었다. 강우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이라도 그 조항을 실행에 옮겨 손목을 잘라낼 수 있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흥. 동맹을 맺자마자 너무 깐깐하게 구는군, 한 대표."

윤세준이 한 발 뒤로 물러서며 손을 들어 보였다. 굴복의 제스처였지만, 그의 눈 밑은 여전히 차가운 살의로 일렁이고 있었다.

강우는 윤세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복도 끝, 붉은 안개의 기원을 향해 돌아섰다.

"깐깐해야 살아남는 곳이다, 이곳은."

말을 마친 강우가 장부를 허공으로 치켜들었다.

"체납 계고장 발부."

스스스스스!

붉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쇠사슬이 부딪치는 둔탁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시커먼 잉크로 쓰인 거대한 종이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종이들은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복도를 가득 채운 붉은 독안개 입자 하나하나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끼에에에엑!"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비명이 들려왔다.

독안개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강우의 장부에 기록된 소득세 및 시설 훼손 벌금 조항이 안개의 영적 에너지를 역으로 가압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스슥!

달라붙은 계고장 종이들이 붉은 안개를 빨아들이며 스스로 타올랐다. 검은 재가 되어 사러지는 안개의 잔해들이 복도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 이럴 수가…… 안개가 걷히고 있어……."

백설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를 가득 메웠던 핏빛 장막이 강우의 손끝 하나에 말려 들어가듯 급격히 수축하고 있었다.

강우가 뿜어낸 인과 세법의 그물망은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놈이 저지른 환경 살상이라는 위법 행위를 고스란히 '벌금'으로 환산하여, 놈의 영적 자산인 안개 자체를 압수수색해 지워버리는 완벽한 사이다 반격이었다.

복도를 막아서던 붉은 장막이 완전히 걷히자, 저 멀리 401호 앞 복도 한가운데에 서 있는 1동 관리인의 모습이 선명하게러났다.

관리인의 몰골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오른손목은 이미 강우에게 압류당해 바스러진 상태였으나, 놈은 그 잘려 나간 손목 단면에 지저분한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붕대 틈새로 검붉은 진물이 뚝뚝 떨어져 바닥의 타일을 부식시키고 있었다.

놈의 남은 왼손은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준비한 필살의 독안개 결계가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한 채 역으로 압류당해 소멸한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한강우우우우……!"

관리인의 찢어진 목구멍에서 쇠를 긁는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

"네놈이…… 감히…… 내 영역을…… 내 안개를……!"

"1동 관리인."

강우가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었다. 오로지 부도난 거래처의 장부를 정리하는 회계사의 건조함만이 서려 있었다.

"이미 고지했을 텐데. 무단 시설 훼손 및 영업방해죄. 방금 전 안개 압류로 벌금의 1차분은 수납 처리되었다. 하지만 아직 연체료와 가산세가 남아 있지."

"입…… 닥쳐라! 벌레 같은…… 계약자 놈이……!"

관리인의 유일한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뜩였다. 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주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주변 벽면에 붙어 있던 낡은 벽지들이 스스스 벌어지며 찢어져 내렸다.

"주의해라, 한 대표."

윤세준이 허리춤에서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며 경고했다.

"놈의 기운이 아까와는 달라. 단순한 원귀의 발악이 아니야. 아파트의 시스템 자체에서 힘을 끌어다 쓰고 있어."

실제로 관리인의 가슴팍에 박힌 낡은 호실 판판들이 기괴하게 회전하며 붉은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놈은 1동의 관리자로서 부여받은 마지막 권한, 즉 아파트 1동의 원천 동력원을 강제로 끌어다 쓰고 있었던 것이다.

우웅, 우우우웅하는 거대한 진동이 아파트 건물 전체를 뒤흔들었다. 발밑의 콘크리트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강우는 적색 채무 시각으로 놈의 몸 뒤편을 응시했다.

놈의 척추에서부터 뻗어 나온 두꺼운 적색 사슬이 아파트 지하 깊숙한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채무의 흐름이 아니었다. 1동 전체를 유지하는 거대한 영적 에너지가 관리인의 몸으로 역류하고 있었다.

"불법 대출이군."

강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자신의 자격 범위를 초과한 과도한 영력 인출이다. 저건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지."

"죽여버리겠다……! 전부…… 찢어서…… 거름으로 삼아주마!"

관리인이 이성을 완전히 잃고 포효했다.

놈이 남은 왼손을 허공으로 뻗었다. 그러자 놈의 등 뒤에 있는 붉은 안개 속에서, 쇠사슬에 묶인 거대한 검은 형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철컹. 철커덩.

그것은 은하 아파트 1동의 보일러실과 원천 동력실의 에너지를 도용하여 만들어낸, 기괴하게 비틀린 형태의 흑철제 거형 전기 톱이었다. 톱날 하나하나에 억울하게 죽어간 입주민들의 원혼이 서려 있는지, 시커먼 진물과 이빨들이 톱날을 대신해 박혀 있었다.

부우우웅-!

전기 톱의 엔진이 걸리는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소음과 함께 아파트 복도 전체가 비명을 지르듯 흔들렸다. 톱날이 회전할 때마다 사방으로 피비린내 나는 불꽃이 튀었다.

"전부…… 갈아버리겠다!"

관리인이 거대한 전기 톱을 치켜들었다. 놈의 눈에는 이제 규칙도, 계약도, 생존 게임의 룰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한강우라는 존재를 갈가리 찢어발기겠다는 맹목적인 살의만이 가득했다.

위이이이이이잉!

회전하는 흑철제 톱날이 복도의 아방궁 통로 벽면을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단번에 두부처럼 잘려 나가며 해골 같은 파편들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탈출구는 완전히 박살 났고, 무너져 내리는 천장의 잔해 너머로 거대한 톱날이 강우의 머리 위를 향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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