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이 살가죽을 파고들며 뼈마디를 으스러뜨릴 듯이 조여들었다. 차갑고 축축한 쇠붙이의 질감이 온몸을 옭아맬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끈적이는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뚝, 뚝. 바닥으로 떨어지는 붉은 방울들이 무대 바닥의 먼지와 섞여 기괴하게 얼룩졌다. 호흡할 수 있는 산소의 양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찢어진 폐가 비명을 질렀지만, 한강우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오히려 깊어졌다.
오른쪽 귀는 완전히 먹통이 되어 적막만이 가득했으나, 왼쪽 귀 끝을 후벼 파는 이명 너머로 인과의 사슬이 비틀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스스스슥, 스슥.
강우는 사슬에 묶여 손가락뼈가 어긋나는 고통 속에서도 셔츠 가슴팍의 안쪽 주머니로 손을 뻗쳤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감촉은 차갑고 뻣뻣했다. 이윽고 그가 꺼내 든 것은 피가 눌어붙어 검게 변색된 오래된 가죽 수첩 조각이었다.
2동 귀부인의 아방궁 소유 장고를 털어 가압류했던 유물. 마담 바토리의 ‘피 젖은 음악회 초청장 고서’의 표지 조각이 강우의 피 묻은 손가락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뭔지 기억하십니까?”
지독하게 건조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목구멍에서 긁혀 나오는 쇳소리가 적막한 오페라 극장 무대 위로 낮게 깔렸다.
바토리의 붉게 충혈된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표지에 음각으로 새겨진 정교한 바이올린 무늬가, 그녀가 내뿜는 악의적인 주파수와 공명하며 파르르 진동했다.
“그, 그것이…… 왜 네놈 손에……!”
바토리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롭게 갈라졌다. 그녀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사신 조각상들이 쥐고 있던 사슬이 팽팽하게 긴장하며 강우의 사지를 사방으로 잡아당겼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어깨관절을 강타했으나, 강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왼쪽 눈, 붉게 타오르는 '적색 채무 시각'이 바토리와 가죽 조각 사이에 얽혀 있는 검붉은 인과의 실타래를 정확히 포착했다.
[괴담 장부(The Ghost Ledger) 활성화.] [가압류 대상: 귀부인의 영적 소유물 ‘피 젖은 음악회 초청장 고서’.] [연계 조항 발동: 타 동(棟) 간의 영업 방해 및 불법 채권 전이 세법 제8조.]
장부의 낡은 종이 위로 붉은 낙인이 찍히듯 글자들이 빠르게 새겨졌다. 가죽 조각에 깃들어 있던 귀부인의 잔재가 강우의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최종 매개물로 등록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가죽 쪼가리가 아니었다. 2동 귀부인이 마담 바토리에게 진 거대한 영적 부채와 보증의 증거물이었다.
“끄, 끄으으……!”
강우의 목을 조르던 사슬의 힘이 미세하게 느슨해졌다. 인과율의 저울이 강제로 수평을 맞추기 위해 바토리의 권능을 억누르기 시작한 것이다. 사슬이 살을 쓸며 내는 스산한 소리가 사방에서 웅웅거렸다.
하지만 바토리는 이 무대의 완벽한 지배자였다. 그녀가 이빨을 드러내며 기괴하게 웃었다.
“겨우 그딴 종이 쪼가리로…… 내 음악회를 망치려 들다니! 사방을 찢어 발겨라! 저놈의 주둥이를 당장 도려내란 말이다!”
사신 조각상들이 다시금 쇠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강우의 쇄골 부근에서 쩌적, 하고 뼈가 어긋나는 불쾌한 소리가 울렸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잠시 아득해졌다.
그때였다.
“강우 씨!”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끈적한 어둠을 뚫고 푸른빛의 안개가 무대 위로 세차게 몰아쳤다. 백설아였다. 그녀의 온몸을 감싼 ‘낙인의 의지’가 푸른 인장의 형태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차갑고 습한 영력이 강우의 발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설아는 자신의 방어 영력을 온전히 개방하여 강우의 괴담 장부와 강제로 동조시켰다.
“내 영혼을…… 촉매로 써요! 그 귀부인의 기운을 전부 흩뿌려 버리라고!”
그녀가 가진 영적 잠재력이 촉매 가스가 되어 사방으로 성화(聖化)되며 퍼져 나갔다. 허공을 부유하던 푸른 안개가 귀부인의 음악회 초청장 가죽 조각과 접촉하자, 엄청난 화학 반응이 일어나듯 사방에서 찌르르한 진동음이 터져 나왔다.
백설아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귀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강우와의 계약서 하단에 기재되어 있던 특약 사항, ‘채무자가 거주하는 도는 채무자와 운명을 공동으로 나누며 불법 침범 시 연대 보증 책임을 진다’는 독소 조항의 반동이 그녀의 육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빨을 악물고 영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아, 윽…… 빨리, 정산해 버려요……!”
설아의 목소리가 뚝뚝 끊겼다. 그녀의 희생으로 무대 전체를 뒤덮은 푸른 가스는 바토리가 지닌 붉은 음파의 주파수를 완벽하게 교란하기 시작했다.
윙윙거리는 기분 나쁜 소음이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가죽 표지에 음각으로 새겨진 바이올린 무늬가 마침내 바토리의 절대 가창 공격이 지닌 파동을 빨아들이며 역공명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귀를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강우를 묶고 있던 사신 조각상들의 사슬이 일제히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파편들이 무대 바닥을 긁으며 사방으로 튀었다. 자유로워진 강우가 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의 구두굽이 핏물 고인 무대 바닥을 밟으며 척, 소리를 냈다.
강우는 가죽 장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붉은 왼쪽 눈이 바토리의 목구멍 속에 도사린 기괴한 성대를 꿰뚫어 보았다.
“공연 저작권법 제34조, 그리고 은하 아파트 공동 관리 규약 제12조 위반.”
강우의 음성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귀하는 2동 지배자 귀부인의 고유한 영적 주파수와 멜로디를 사전 협의 없이 무단 복제하여 본인의 오페라 극장 공연에 상업적으로 도용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획득한 입주민들의 영혼 수수료를 공인된 심사 없이 불법 임대 및 은닉한 혐의가 포착되었습니다.”
“무슨…… 무슨 개소리를……!”
바토리가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이미 그녀의 성대는 바이올린 음각의 역공명에 묶여 제대로 된 음파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강우가 장부의 다음 페이지를 거칠게 넘겼다. 종이가 스르륵 넘어가며 붉은 인과의 사슬들이 허공에서 쏟아져 나왔다.
“이에 본 세무 대리인은 마담 바토리의 가장 핵심적인 자산인 ‘고유 가창 목소리’와 ‘발성 권능’ 일체에 대해 임치 압류를 집행합니다. 체납된 세액 및 무단 도용 벌금 총액은 귀하의 성대 지분 100%로 갈음합니다.”
“아, 아으으윽!”
바토리가 자신의 목을 부여잡았다.
스스스슥! 검은 사슬들이 허공에서 튀어나와 그녀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휘감았다. 사슬이 살을 조여드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바토리의 입 안에서 검붉은 점액질의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소리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증명하던 절대적인 가창의 힘이 사슬에 묶여 강우의 장부 속으로 강제로 빨려 들어갔다.
[압류 완료: 마담 바토리의 ‘절대 가창 권능’.] [상태: 임치 압류 보관 중.]
바토리는 입을 벌렸으나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컥, 커억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이 끈적한 타액과 함께 새어 나올 뿐이었다.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아파트의 근원적인 힘 중 하나였던 목소리를 빼앗긴 지배자. 그녀는 이제 일개의 추악한 벙어리 원귀에 불과했다. 무대 위를 가득 채웠던 웅장하고 기괴한 오페라의 선율이 일순간에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오직 축축하고 비릿한 바람 소리만이 극장을 쓸고 지나갔다.
백설아는 그 광경을 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안도의 미소가 번졌다.
“해…… 냈어…….”
그러나 강우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의 적색 채무 시각은 무대 바닥 밑바닥에서 요동치는 거대한 인과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목소리를 잃은 바토리의 얼굴이 극도로 일그러졌다. 눈물이 아닌, 시커먼 타르 같은 액체가 그녀의 눈에서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오만하던 그녀의 얼굴에 서린 것은 이제 분노를 넘어선 광기였다. 자신의 완벽한 비극 무대가 일개 회계사의 종이 장부 몇 장에 파산당했다는 사실을, 그녀의 자존심은 끝내 용납하지 못했다.
“아…… 으으으……!”
바토리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하듯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끝이 향한 곳은 무대 중앙, 핏빛으로 물든 오페라 극장의 영적 코어였다.
그곳에는 은하 아파트 3동 전체의 하중을 지탱하고 있는, 가시 돋친 거대한 강철 밸브가 박혀 있었다. 아파트의 지반과 영적 코어를 연결하는 최후의 쐐기였다.
바토리가 미친 듯이 웃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발로 그 코어 가시 밸브를 사정없이 짓밟았다.
쿠구구구구!
순간, 극장 전체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발밑의 콘크리트 바닥이 쩌적, 쩌적 갈라지며 스산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아파트 20층 빌딩 뼈대 전체가 지류 지반 밑바닥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내려앉는, 구조적 붕괴의 서막이었다.
바닥이 비스듬히 기울며 발밑의 양탄자가 찢어져 나갔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샹들리에가 요란한 파열음과 함께 추락했다. 사방으로 튀는 유리 파편들이 뺨을 스치며 미세한 자상을 남겼다. 볼을 타고 흐르는 끈적한 피가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금방 식어갔다.
“강우 씨……!”
기울어지는 무대 위에서 중심을 잃은 백설아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발밑, 콘크리트 바닥이 완전히 갈라지며 거대한 균열이 아가리를 벌렸다. 그 틈새로 정체불명의 검은 진흙 같은 어둠이 출렁이고 있었다. 썩은 시체 냄새와 습한 곰팡이내가 코를 찔렀다.
위에서 쏟아지는 먼지 구덩이 속에서, 족히 수 톤은 되어 보이는 천장의 대들보가 백설아의 머리 위로 직격하듯 떨어져 내렸다.
스스스슥.
부러진 철근들이 녹슨 비명을 지르며 하강하는 찰나, 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오직 백설아의 이마에 새겨진 푸른 낙인과, 그녀가 디디고 선 무대 바닥의 경계선만을 쫓고 있었다.
뇌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왼쪽 눈의 ‘적색 채무 시각’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 강우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피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장부를 무리하게 조작한 대가로, 그의 전신에서 체온이 급격히 빠져나가며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하지만 머릿속 회계기는 멈추지 않았다.
‘백설아와의 구출 동맹 계약서 제4조 부칙.’
강우는 떨리는 손으로 장부의 가죽 표지를 짚었다. 손톱이 깨져 피가 흘렀지만 개의치 않았다.
“채무자가…… 거주하는 도는…… 채무자와 운명을 공동으로 나누며……”
강우의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가 진동하는 극장 안에 울려 퍼졌다.
“불법 침범 시…… 연대 보증 책임을…… 진다.”
그것은 백설아와 맺었던 가계약의 숨겨진 독소 조항이었다. 은하 아파트라는 물리적 공간 자체를 백설아의 ‘거주 도’이자 ‘연대 보증인’으로 강제 묶어버리는 초법적인 인과 조율.
[괴담 장부(The Ghost Ledger) 특약 사항 발동.] [피고: 은하 아파트 3동 본체.] [혐의: 채무자(백설아)의 신체 및 거주지에 대한 무단 파손 및 영구 멸실 시도.]
쩌어어억!
허공에서 붉은빛의 거대한 사슬들이 뿜어져 나왔다. 그 사슬들은 바토리가 아닌, 무너져 내리는 극장의 기둥과 천장, 그리고 요동치는 콘크리트 벽면을 향해 무섭게 파고들었다.
“카학! 아, 으으윽……!”
목소리를 잃은 바토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댔다.
떨어지던 거대한 천장 대들보가 백설아의 머리 위 단 10센티미터 상공에서 멈춰 섰다. 붉은 사슬들이 대들보를 꽁꽁 묶은 채 허공에 고정해 버린 것이다. 아파트 자체가 백설아의 채무 연대 보증인으로 지정된 순간, 아파트가 그녀를 해치려 하는 행위는 ‘보증 자산의 자해 행위’이자 ‘채권자에 대한 불법 침해’로 규정되었다.
법적으로 자산을 훼손할 수 없게 된 아파트의 붕괴 인과율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과과광!
기둥들이 비틀리며 붉은 인과의 사슬과 마찰을 일으켰다. 쇳가루와 돌가루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독하게 매캐하고 축축한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이…… 이 미친…… 회계사 놈이……”
저 멀리서 대피로를 찾던 윤세준이 무너지는 벽을 짚으며 경악에 찬 어조로 읊조렸다. 그는 강우가 괴담뿐만 아니라, 이 공간 자체를 ‘법적 피고’로 만들어 버리는 광경을 목격하고 소름이 돋았다.
강우는 차갑게 굳어가는 입술을 열었다.
“보증인이…… 채무자의 자산을…… 임의로 처분하는 것은…… 명백한 배임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자신의 수명이 깎여 나가고, 왼쪽 눈이 실명 직전의 고통으로 타들어 가고 있음에도 오직 계산된 결과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3동 전체의 파산 절차를…… 공식 개시한다.”
강우가 장부를 덮으려던 그 순간.
쿠궁, 하고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기괴한 진동이 극장 가장 깊은 바닥에서부터 치올라왔다.
바토리가 피눈물을 흘리며 기괴하게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 코어 자체를 완전히 으깨어 가시 밸브 속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아파트의 룰조차 무시한, 완전한 동귀어진의 자살 행위였다.
밸브가 완전히 함몰되며, 무대 전체가 붉은빛이 아닌 칠흑 같은 ‘무(無)’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경고: 아파트 영적 코어의 강제 불이행 및 자폭 프로토콜 가동.] [경고: 연대 보증 구역의 붕괴 속도가 장부의 자산 압류 속도를 초과합니다.]
강우의 시야를 가득 채운 붉은 경고창이 사정없이 점멸했다.
바닥이 완전히 사라졌다.
“강우 씨!!!”
백설아의 비명 소리와 함께, 그들 모두가 끝이 보이지 않는 아파트의 심연, 칠흑처럼 어두운 수직 통로 밑바닥으로 사정없이 추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