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푸른빛의 영롱한 아우라가 손끝을 적신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보석이 한강우의 손바닥에 닿기도 전에, 발밑의 대리석 바닥이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집혔다. 피비린내를 뿜어내는 검은 건반들이 거대한 이빨처럼 솟구쳐 올랐다. 끈적끈적한 어둠의 점액이 뒤틀린 바닥 틈새에서 스며 나왔고, 귓가를 짓누르는 쇳소리 섞인 불협화음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강우 씨…… 피…… 피해요……!”

백설아가 비틀거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찢어지는 피아노 건반 소리에 묻혀 뚝뚝 끊겼다. 귀부인의 저주가 남긴 내상 탓에 그녀의 귀에서 다시금 붉은 피가 흘러내려 뺨을 타고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한강우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자정을 알리는 시계탑의 둔탁한 종소리가 뇌리를 때리는 순간, 그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 들어갔다. 괴담 장부의 조작에 따른 절대적인 대가 지불의 시간. 하루의 경계가 교차하는 자정 직후의 단 10초간, 한강우의 영혼과 육체는 모든 방어 기재를 상실한 채 완전한 무방비 상태로 정지한다. 오직 그만이 짊어져야 하는 치명적인 리스크이자, 장부의 숨겨진 지불 주기였다.

스스슥.

그 어둠의 틈새를 찢고, 그림자 속에서 은밀하게 움직이는 형체가 있었다.

윤세준이었다.

그의 손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명품 태엽 시계가 들려 있었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째깍, 째깍, 째깍하며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울렸다. 윤세준의 눈동자가 좌우로 잘게 떨리며 강우의 정지된 눈동자를 집요하게 관측했다.

‘9초…… 8초…… 7초…….’

그는 이 순간만을 기다려 왔다. 1동 수복 이후 한강우의 뒤를 밟으며, 그가 매일 자정 직후 정확히 10초 동안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가사 상태에 빠진다는 맹점을 철저히 계산해 둔 터였다.

윤세준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말려 올라갔다. 품속에서 은밀하게 끄집어낸 사슬 칼날이 붉은 안개를 가르며 뱀처럼 매끄럽게 뻗어 나갔다. 칼날 끝에 어린 살기가 정지해 있는 한강우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그 잘난 장부, 이제는 내가 회수하지.”

째깍.

초침이 마지막 0초를 가리키는 순간, 윤세준의 손목이 번개처럼 회전했다. 사슬 칼날이 허공을 찢는 마찰음과 함께 한강우의 왼쪽 가슴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푸스스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칼날이 심장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서늘한 침묵이 연회장을 지배했다.

그러나 윤세준의 얼굴에 떠오른 승리감은 단 1초도 가지 못해 경악으로 뒤틀렸다.

사슬 칼날을 타고 손끝으로 전해져야 할 묵직한 타격감이 전혀 없었다. 가죽을 뚫고 뼈를 부수는 감각 대신, 허공을 가르는 듯한 가벼움만이 손목을 타고 흘러들었다.

“……뭐지?”

심장을 관통당한 한강우의 신체가 물 위에 떨어진 먹물처럼 흐릿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끈적한 피 대신 검은 연기 같은 활자들이 상처 틈새로 흘러나와 사슬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은 진짜 육체가 아니었다. 영혼 허상 계약에 근거해, 단기 가처분 설정된 장부의 복제품에 불과했다.

“바보…… 같은…… 짓을…….”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윤세준의 등 뒤에서 울렸다.

동시에 윤세준이 찔러 넣은 사슬 칼날이 강하게 요동쳤다. 사슬의 반대편 끝을 꽉 움켜쥔 것은,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가던 백설아였다. 그녀의 손바닥에 새겨진 붉은 낙인이 터질 듯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빛나고 있었다.

스슥, 서걱.

사슬이 움직일 때마다 백설아의 손바닥 가죽이 찢어지며 불쾌한 마찰음이 났지만, 그녀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쇠사슬을 손목에 칭칭 감아쥐며 윤세준의 전신을 강하게 인장했다.

“이미…… 예상…… 하고…… 있었어…….”

백설아의 눈빛에는 실망과 숨길 수 없는 격노가 서려 있었다.

그녀와 한강우는 사전에 ‘영혼 단기 임대 가계약’을 체결해 둔 상태였다. 한강우가 무방비해지는 10초 동안, 그의 영적 권능과 장부의 소유권을 백설아가 단기 임차하여 대리인 자격을 행사하는 특약 조항. 윤세준이 노린 맹점은 이미 한강우의 회계 장부 위에서 완벽하게 통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쓰레기 같은 자식이…… 감히 대표님을……!”

백설아의 전신에서 푸른 보석의 아우라와 섞인 성수(聖水)의 빛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남은 한 손을 들어 허공에 대고 움켜쥐었다. 대기 중에 떠돌던 습한 수증기들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결정으로 응축되며 윤세준을 향해 정조준되었다.

“어, 어떻게……!”

윤세준이 다급하게 사슬을 회수하려 했으나, 이미 백설아의 손귀에 붙잡힌 사슬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콰아아앙!

백설아의 손끝에서 발사된 성수 유도탄이 윤세준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단순한 물리적 충격이 아니었다. 원귀의 권능을 담은 성스러운 마력이 윤세준의 몸을 휘감으며 그의 영적 흐름을 단숨에 차단했다.

그리고 그 폭풍의 중심에서, 윤세준이 생명처럼 아끼며 초침을 세던 명품 태엽 시계가 정면으로 타격받았다.

와장창!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하고, 정밀하게 맞물려 돌아가던 톱니바퀴들이 찢어지는 금속성을 내며 바스러졌다. 시계 내부에서 흘러나온 시커먼 독기가 허공에서 증발했다. 윤세준은 단 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사지가 뒤틀리는 충격과 함께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처박혔다.

터벅, 터벅.

검은 연기가 걷히며, 복도 모퉁이의 어둠 속에서 진짜 한강우가 걸어 나왔. 그의 왼쪽 눈은 핏빛처럼 붉은 ‘적색 채무 시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구두 굽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규칙적이고 건조하게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강우는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윤세준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분노도, 증오도 없었다. 오직 부도난 채무자를 바라보는 채권자의 싸늘한 계산벽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윤세준 씨. 동맹 계약서 제4조 2항을 잊으신 모양이군요.”

강우가 품 안에서 가죽 표지의 괴담 장부를 꺼내 천천히 펼쳤다. 장부의 페이지가 스르륵 넘어가며, 윤세준의 이름 위에 붉은색 낙인이 선명하게 새겨지는 모습이 보였다.

“법인의 핵심 자산을 탈취하려는 시도 및 대표이사에 대한 물리적 위해는 ‘배임 및 내부자 거래 방지 조항’의 절대적 위반 사유입니다. 귀하가 보유하고 있던 주식회사 은하의 지분 100%는 이 시간부로 강제 소각 처리됩니다.”

“크윽…… 강우…… 네놈이…… 처음부터……!”

윤세준이 이를 갈며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그의 사지에서 검은 연기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돋아나 바닥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또한.”

강우가 장부의 한 구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왼쪽 눈의 적색 시각이 윤세준의 몸 구석구석을 관통하며 영적 가치를 숫자로 환산해 내기 시작했다.

“계약 위반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이 청구됩니다. 귀하의 신체 및 영혼에 대한 권리는 법인의 자산으로 귀속되며, 미납된 채무액을 변제할 때까지 무기한 신체 보증 배상 명령을 집행합니다.”

“으아아악! 내, 내 힘이……!”

윤세준의 몸에서 푸른 영기가 강제로 뽑혀 나와 강우의 장부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의 피부가 순식간에 노인처럼 쭈글쭈글하게 말라붙었고,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권능을 박탈당한 자의 비참한 몰골이었다.

강우는 가차 없이 장부를 덮었다.

“설아 씨, 이 배무자를 1동 경계 감옥에 입고시키세요. 관리인에게 감시를 맡기면 도망치지 못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백설아가 차가운 눈빛으로 윤세준의 머리덜미를 움켜쥐었다. 질질 끌려가는 윤세준의 손끝이 바닥의 검은 건반을 긁으며 불쾌한 소음을 냈다.

사리사욕을 위해 동맹을 배신하려던 강적이 단 한 번의 계약 조작으로 완벽하게 파멸하는 순간이었다. 주주들은 숨을 죽인 채, 한강우의 잔혹할 정도로 완벽한 지략에 경외감을 넘어선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윤세준이 감옥 쇠창살 뒤로 던져지는 철커덩 소리와 동시에, 3동과의 경계선을 이루던 벽면 전체가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스으으읍.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거대한 촉각적 흡기음이 들려왔다. 아파트 벽면을 덮고 있던 콘크리트 피막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검붉은 사람의 가죽처럼 변해 사방으로 넓게 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벽의 붕괴가 아니었다. 3동 전체가 거대한 유기체처럼 살아 움직이며, 은하 아파트의 공간 자체를 거대한 원형 극장의 형태로 재구성하고 있었다.

머리 위로 가죽 천장이 덮이고, 사방에서 수천 명의 관객이 소리 죽여 웃는 듯한 기분 나쁜 속삭임이 이명처럼 밀려들었다.

붉은 조명이 강우의 발밑을 비추며, 피비린내 나는 연극의 서막을 알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피아노의 건반을 천천히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딩—————.

철회할 수 없는 선율이 척추를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바닥에서 스며 나오는 끈적이는 타르 같은 액체가 구두 밑창을 집요하게 붙잡았다.

단순히 시각적인 변화가 아니었다. 2동의 연회장 벽면을 이루고 있던 고급스러운 벽지들이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지며, 거대한 짐승의 내장 가죽과도 같은 붉은 살점의 벽으로 뒤바뀌었다. 사방을 가득 채운 고기 비린내가 가습기처럼 습한 공기를 타고 콧속으로 밀려들었다. 뒤틀린 천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정체불명의 점액질을 맞으며, 주주들의 비명 틈새로 질척이는 가죽이 서로 비벼지는 불협화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 목…… 목이…… 조여…… 끈…… 끈적거려…….”

주식회사 은하의 하급 주주 중 한 명이었던 남자가 목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그의 목을 휘감은 것은 검은 피로 물든 피아노 선율이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축축하고 거친 가시철사에 가까운 감각으로 그의 살점을 파고들며 조여들고 있었다. 목구멍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남자의 안구가 터질 듯 충혈되었고, 입술 틈새로 뚝뚝 끊기는 단말마가 흘러나왔다.

강우의 왼쪽 눈, 적색 채무 시각이 붉은 핏빛으로 출렁였다. 왼쪽 눈가에서 진득한 진물이 흘러내렸고, 귓가에는 스슥거리며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이명이 휘몰아쳤다. 무방비 상태의 10초가 지나갔음에도 장부의 부작용은 그의 신경계를 갉아먹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밀려드는 통증을 머릿속의 회계 장부 한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냉혹하게 적색 숫자를 분석했다.

남자의 목을 감고 있는 검은 선율 위에 떠오른 숫자는 ‘300,000 CC’. 3동의 지배자 마담 바토리가 임의로 책정한 ‘무단 청취에 따른 강제 관람료’의 청구서였다.

강우가 뻣뻣하게 굳어가는 손가락으로 가죽 장부를 거칠게 펼쳤다. 장부를 펼치자 차가운 지옥의 한기가 손가락 끝을 찌르듯 파고들었다. 새로운 규칙을 기입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감각을 저당 잡혀야 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끈적한 가래 같은 감각이 차오르더니, 이내 혀끝을 마비시키는 쇠맛이 맴돌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절대적인 공허가 자리 잡았다. 미각의 일시적 상실. 그 대가를 지불하고서야 강우의 만년필 끝에서 붉은 인과의 글자가 써 내려지기 시작했다.

[이의 제기: 본 구역은 ‘주식회사 은하’의 고유 영토이며, 피청구인 ‘마담 바토리’는 무단으로 음파를 송출하여 영업을 방해함. 이에 따라 역으로 ‘무단 전파 송출 및 소음 공해 죄’에 의거하여 청구된 관람료 채권을 전액 상쇄하고, 위약금을 부과함.]

서걱, 서걱.

장부가 피로 쓰인 문장을 집어삼키자, 공중을 떠돌던 검은 선율들이 불에 탄 종이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목이 졸리던 남자가 켁켁거리며 바닥에 고개를 처박았고, 습한 사슬 모양의 붉은 궤적이 3동과의 경계선을 향해 역류해 날아갔다.

하지만 기괴하게 변해버린 원형 극장의 형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무대 위에서 스슥거리는 기괴한 마찰음과 함께 정체불명의 형체가 기어 나왔다. 그것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질척이는 타르 같은 점액이 무대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것은 인간의 뼈대를 흉내 내어 조잡하게 깎아 만든 나무 인형이었다. 얼굴에는 눈코입 대신 피로 그린 슬픈 표정의 가면이 붙어 있었고, 등 뒤에는 수십 개의 실이 천장의 어둠 속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무 인형의 관절이 뚝, 뚝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강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것의 손가락 끝은 축축하게 젖은 가죽으로 덮여 있었고,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입을 기괴하게 쩍 벌렸다.

“티켓…… 배…… 배부…… 시작…… 합니다…….”

인형이 떨리는 손으로 은색 쟁반 위에 올려진 붉게 물든 팸플릿 한 장을 건넸다. 강우의 손에 들린 팸플릿은 끈적이는 피로 흠뻑 젖어 들어 손바닥에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그의 왼쪽 적색 채무 시각에, 팸플릿의 표지가 기괴하게 진동하며 글자가 뒤틀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안내서가 아니었다. 3동의 근원이자 게임 설계자인 마담 바토리가 강우를 완벽하게 박제하기 위해 준비한, 거부할 수 없는 ‘최종 오페라의 캐스팅 보드’였다.

그리고 그 팸플릿의 첫 페이지, 가장 붉고 진한 피로 쓰인 주연 배우의 이름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1막: 회계사의 해부식 — 주연: 한강우]

동시에 머리 위의 천장이 완전히 닫히며, 관객석 여기저기서 수천 개의 썩은 이빨이 부딪치는 듯한 기괴한 박수갈채와 웃음소리가 폭발하듯 쏟아졌다. 탈출구는 완전히 차단되었고, 연극의 막은 이미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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