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귀부인의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온 핏빛 낙인들이 허공을 가르며 무수히 많은 가문의 무조 인장들을 만들어냈다. 허공에 둥둥 뜬 인장들은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처럼 이글거리며 강우의 심장을 겨누었다. 그 찰나, 강우의 코트 안쪽 주머니가 비정상적으로 뜨거워졌다. 찌르르하는 불쾌한 진동과 함께 검은 연기가 가슴팍을 타고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장부의 표면에 새겨진 붉은 눈동자가 미친 듯이 깜빡이며, 머릿속을 찌르는 이명과 함께 정지 타이머 신호가 뇌리에 박혔다.

[00:00:03] [00:00:02]

남은 시간은 단 2초. 장부의 허용 용량이 초과되어 강제 종료되기 직전의 데드라인이었다. 귀밑샘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끈적하게 목덜미를 적셨다. 귓가에는 스슥거리는 구더기들의 기어 다니는 소리와 함께, 무너지는 천장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바닥에 부딪쳐 박살 나는 둔탁한 파열음이 교차했다.

피할 곳은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천장의 거대한 그림자가 강우의 머리 위를 완전히 덮쳐왔다. 마비된 왼쪽 다리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귀부인의 찢어진 입 사이로 흘러나오는 검붉은 점액질이 바닥을 적시며 비린내를 풍겼다.

강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슴팍의 장부를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장부 가죽의 감촉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적색 채무 시각으로 가득 찬 강우의 왼쪽 눈에는 귀부인이 허공에 전개한 가문 인장들의 구조가 낱낱이 해체되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마법이나 초자연적인 권능이 아니었다. 2동이라는 영토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일종의 '불법 채권 무기'였다.

“……불법 점유물.”

강우의 갈라진 목소리가 먼지 가득한 연회장의 공기를 뚫고 나갔다.

“은하 아파트 특별 조세법 제12조 3항. 허가받지 않은 사적 무력 집단의 가문 인장 및 무조 장비는 ‘불법 과세 체납 장비’로 규정한다. 납세 의무를 회피하고 사적 이익을 위해 영토 내에서 무단으로 무력을 행사하는 행위는 예외 없이 즉각적인 자산 압류 대상이다.”

[00:00:01]

타이머의 마지막 숫자가 명멸하는 순간, 강우는 장부의 찢어진 페이지에 자신의 피 묻은 손가락을 문질렀다.

철커덩!

바닥의 균열 사이에서 솟구친 검은 사슬들이 귀부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가문 인장들을 향해 뱀처럼 날아갔다. 시커멓게 그을린 사슬들은 끈적이는 점액질을 사방으로 튀기며 인장들의 목덜미를 칭칭 감아쥐었다. 쇠사슬이 살점을 파고드는 듯한 기괴한 마찰음이 연회장을 가득 채웠다. 인장들이 사슬의 악력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며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강우는 사슬의 궤적을 억지로 틀어 쥐었다. 인장들을 옭아맨 사슬들이 공중에서 하나의 거대한 방패막처럼 엮였다.

쾅! 쿠구구궁!

천장에서 떨어지던 집채만 한 콘크리트 잔해들이 사슬 방패에 부딪쳐 사방으로 부서져 나갔다. 매캐한 분진이 시야를 가로막았고, 강우의 뺨 위로 거친 시멘트 가루와 파편들이 스치며 붉은 핏자국을 남겼다. 사슬을 유지하는 대가로 왼쪽 귀에서 삐- 하는 날카로운 기계음 같은 이명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돌았다.

“콜록, 콜록……!”

자욱한 먼지 속에서 백설아가 밭은기침을 토해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귀부인의 저주가 남긴 검붉은 손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귀에서 흘러내린 피가 뺨을 타고 내려가 턱끝에서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며,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강우…… 씨…… 저것들이…… 아파트를…… 통째로…… 무너뜨리려고…… 방치하고…… 있어요……!”

백설아의 목소리는 갈라진 틈새로 바람이 새는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녀의 말대로 귀부인은 자신의 파산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2동 전체의 구조를 붕괴시켜 동귀어진하려는 심산이었다. 사방의 벽면이 습한 곰팡이 냄새를 풍기며 썩어 들어갔고, 바닥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의 점막처럼 꿈틀거리며 기분 나쁜 열기를 뿜어냈다.

강우는 차갑게 식어버린 왼쪽 눈으로 귀부인을 응시했다. 귀부인의 찢어진 드레스 자락 사이로 수만 마리의 구더기들이 스스슥 소리를 내며 쏟아져 나와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그녀의 본체는 이미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린 채, 거대한 핏빛 고기 덩어리처럼 변해 연회장 단상 위에 고착되어 가고 있었다.

“소유 방치 및 관리 소홀로 인한 자산 가치 훼손죄.”

강우가 한 걸음, 무거운 다리를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발밑에서 구더기들이 터지며 끈적이고 불쾌한 액체가 구두 굽을 타고 올라왔지만, 그의 표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귀하가 소유한 2동의 부동산 및 영적 가치는 관리 부실로 인해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주식회사 은하가 설정한 담보 가치를 현저히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특별 약정에 의거, 잔여 지분 전체를 즉시 몰수합니다.”

“크으으으…… 아아아악……! 내…… 가문……의…… 영광을…… 감히……!”

귀부인의 도자기 가면 조각들이 바닥에 뒹굴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그녀가 마지막 남은 영적 권능을 쥐어짜 내어 강우를 향해 핏빛 가스를 뿜어내려 했다.

하지만 강우가 장부를 높이 쳐들자, 사슬들은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서걱! 콰득!

공중을 가른 검은 사슬들이 귀부인의 화려하고 거대한 드레스 자락 속으로 사정없이 박혀 들어갔다. 드레스 밑바닥, 그녀의 영적 코어라 할 수 있는 검은 침전물 속에 박힌 사슬들이 톱날처럼 회전하며 살점을 뜯어냈다. 연회장 가득 찌르는 듯한 악취와 함께 검붉은 피 분수가 천장까지 솟구쳤다.

귀부인의 결계가 해체되면서 그녀의 몸을 지탱하던 붉은 안개가 순식간에 쇠사슬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허공에 떠돌던 가문 인장의 파편들이 강우의 장부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장부 표면의 붉은 눈동자가 탐욕스럽게 그것들을 집어삼켰다.

[2동 귀부인의 가문 권위 및 영토 소유권 압류 완료.] [주식회사 은하의 고정 가치 자산으로 귀속되었습니다.] [대가 저당물 일시 유예.]

머릿속을 짓누르던 경고음이 사라지고, 기분 나쁜 시스템 음이 강우의 귓가에 울렸다. 강우는 장부를 닫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귀부인의 껍데기였던 거대한 드레스가 힘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드레스 안에는 더 이상 구더기도, 핏빛 고기 덩어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타버린 재와 같은 검은 먼지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연회장을 지배하던 기괴한 압박감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후우…….”

어둠 속에서 짝, 짝, 짝 하는 느린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연회장 구석의 붕괴된 기둥 뒤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윤세준이었다. 그의 손목에 채워진 명품 태엽 시계의 초침이 째깍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윤세준은 자신의 시계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통쾌하다는 듯 웃었다.

“대단하군, 한 대표. 진짜로 그 미친 할망구를 파산시켜 버릴 줄이야. 회계사라는 직업이 이렇게 무서운 건 줄 알았으면 나도 진작 공부나 할 걸 그랬어.”

윤세준의 눈동자 속에는 깊은 탐욕과 경계심이 동시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 귀부인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호화로운 가재도구들과 보석들을 구두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거 보라고. 전부 돈 냄새가 나는 것들이잖아? 아파트 내에서 통용되는 영적 가치로 환산하면 꽤 쏠쏠하겠어. 이 귀중품들은 내가 직접 수거해서 법인 기금으로 환전하도록 하지. 대표님께서 몸소 고생하셨으니, 이런 잡일은 이 임시 직원이 처리하는 게 도리 아니겠나?”

윤세준은 겉으로는 지극히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며 가재도구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의 손놀림은 무척이나 빨랐다. 보석함과 은식기들을 자루에 담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강우의 닫힌 장부와 그의 왼쪽 다리를 향해 있었다. 강우가 장부를 조작한 직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찰나의 공백을 계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강우는 윤세준의 속내를 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저 인간은 지금 자신이 장부를 사용할 때 발생하는 무방비한 기한 연체 타이밍을 노리기 위해 빌드업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의 물리적 노동력과 자산 환전 능력이 필요했다.

“그렇게 하도록.”

강우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단, 수거한 자산의 80%는 법인 예수금으로 즉시 예치되어야 합니다. 윤 주주 본인의 몫은 20%의 수수료로 제한합니다. 장부에 일체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될 겁니다.”

“하하, 깐깐하긴. 알았다고.”

윤세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은식기들을 자루에 쑤셔 넣었다. 그의 얼굴에 스친 미소는 지극히 음흉했지만, 일단은 강우의 규칙 아래에서 순응하는 척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연회장 입구의 철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1동에서 대기하고 있던 주식회사 은하의 주주들과 생존자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2동을 지배하던 그 끔찍한 귀부인이 단 한 명의 청년에게 짓밟혀 소멸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말로…… 끝난 건가요?”

한 생존자가 침을 삼키며 물었다.

강우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주주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왼쪽 눈은 여전히 핏빛 채무 흐름을 투시하는 적색 채무 시각으로 붉게 빛나고 있었다.

“현 시간부로 2동의 모든 영역은 주식회사 은하의 독점 자회사 영역으로 정식 귀속되었습니다.”

강우의 목소리는 연회장 구석구석까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귀부인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 지분 및 가문 인장의 권능은 전액 압류되어 법인의 기초 자산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법인의 총자산 가치는 이전 대비 140% 상승했으며, 주주 여러분의 생명 담보 배당금 역시 비례하여 증액될 예정입니다.”

생존자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눈동자들에 서서히 생기와 희망, 그리고 주식회사 은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깃들기 시작했다. 지옥 같은 공간에서 오직 계약과 장부라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비정한 수단으로 안전을 보장받는 기묘한 구원 방식에 그들은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다음 안건을 상정합니다.”

강우는 장부를 가볍게 두드렸다.

“2동의 수복이 완료됨에 따라, 우리 법인의 영토는 인접한 3동과의 경계선에 도달했습니다. 3동을 지배하고 있는 ‘마담 바토리’의 오페라 극장 구역은 현재 우리 법인의 자산 흐름을 위협하는 가장 큰 리스크 요인입니다. 따라서 다음 목표로 3동 구역에 대한 공식 감사 및 조사를 선포합니다.”

“찬성합니다!”

“대표님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주주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 의결에 동의했다. 절망만이 가득했던 노후 아파트 단지에, 비즈니스라는 이름의 기괴한 질서가 완전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가운데, 백설아가 천천히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아직 몸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걸음걸이가 위태로웠지만,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녀의 손에는 귀부인의 유산 중 가장 순도가 높고 영롱한 푸른빛을 내뿜는 영적 보석이 들려 있었다.

“강우 씨…… 이거…… 귀부인의 코어에서…… 나온 거예요. 당신이…… 가져야 해요. 법인을…… 위해서도, 당신을…… 위해서도…….”

백설아는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말하며, 보석을 든 손을 강우의 손바닥 위에 조심스럽게 얹으려 했다. 보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아우라가 강우의 차가운 손끝을 비추었다.

승리와 안도의 온기가 연회장에 가득 차오르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보석이 강우의 손가락 끝에 닿는 찰나.

딩—————!

연회장 깊은 곳, 아니, 2동과 3동의 경계선 전체를 관통하는 기괴하고 무거운 피아노 건반 소리가 사방을 찢어발겼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고막을 넘어 뼈마디를 뒤흔드는 물리적인 파동이었다. 주주들의 환호성이 순식간에 비명으로 바뀌었다.

쿠구구구궁!

강우의 발밑을 지탱하고 있던 대리석 복도 바닥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검은 선율의 건반으로 변해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닥이 위아래로 미친 듯이 뒤집히며, 검은 건반들이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이빨처럼 솟구쳐 올랐다.

쇳소리가 섞인 기괴한 오케스트라의 서곡이 허공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함께, 3동의 경계 너머에서 거대한 어둠의 장막이 연회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들이닥쳤다.

강우의 적색 채무 시각에, 바닥을 뒤흔드는 검은 선율들 위에 새겨진 거대한 붉은 글씨가 투시되었다.

[경고: 무단 저작권 침해 및 불법 청취에 따른 강제 관람 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3동 ‘마담 바토리의 오페라 극장’의 막이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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