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조교수 임용장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당신의 발걸음은 VIP 병동 12층 컨퍼런스룸으로 향합니다. 유리문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습니다. 방 안에는 부원장 백태현과 그의 라인인 기획조정실장, 그리고 흉부외과 과장 대리 조장혁 교수가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그들 중심에 놓인 모니터에는 한 남자의 심장 초음파 영상이 재생되고 있습니다. 좌심실 구출률(LVEF) 18%. 정상 수치인 55%에 한참 못 미치는,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말기 허혈성 심근병증(End-stage ischemic cardiomyopathy) 환자입니다. 환자의 이름은 안형준.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이자, 이 병원 재단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물입니다.

"백서진 선생, 아니 이제 백 조교수라고 불러야겠군."

조장혁이 태블릿 PC를 툭 던지듯 테이블 위로 밀어 놓습니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밀폐된 공간을 울립니다.

"공여자가 나타났네. 뇌사 판정을 받은 20대 청년이지. 하지만 문제가 아주 심각해. 공여 병원이 제주대병원이야. 헬기로 수송한다 해도 이송 시간이 너무 길어. 심장을 적출해 보존액에 넣어 얼음 상자에 보관하는 '차가운 허혈 시간(Cold Ischemic Time)'이 이식의 성패를 가르는데, 우리 손에 들어올 때쯤이면 이미 4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넘기게 돼. 쉽게 말해, 시든 꽃을 가져와서 억지로 심는 격이지. 수술방에서 심장이 다시 뛰지 않을 확률, 즉 이식 실패율이 90%에 육박하네."

조장혁의 목소리에는 은근한 덫이 깔려 있습니다. 이식 수술 중 공여 심장이 반응하지 않는 '원발성 이식편 기능부전(Primary graft dysfunction)'이 발생하면 환자는 테이블 위에서 즉사합니다. 대권 주자의 사망은 곧 집도의의 의사 생명, 아니 사회적 매장을 의미합니다. 부원장 백태현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직하게 읊조립니다.

"백 조교수, 자네가 흉부외과의 파격적인 인재라며 이사장님께서 적극 추천하셨네. 이 수술을 맡아 성공시킨다면 자네의 입지는 그 누구도 흔들 수 없겠지.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면, 규정에 따라 신중하게 다른 선택지를 고려해야 하지 않겠나?"

허혈 시간 4시간 초과. 의학계의 확립된 데이터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이는 '상대적 금기증'에 해당합니다. 엔진이 꺼진 채 너무 오래 방치된 비행기를 상공에서 바로 출발시키겠다는 무모한 짓과 다름없습니다. 조장혁이 속해 있는 부원장 파벌은 당신에게 이 독이 든 성배를 들이밀며, 실패 시 당신을 완전히 파멸시킬 정교한 덫을 놓은 것입니다.

만약 수술을 거부한다면 가이드라인을 준수한 합리적 결정이 됩니다. 그 경우 수술 집도권은 규정에 따라 조장혁 교수 팀으로 넘어갈 것이고, 실패의 책임 역시 그들이 고스란히 짊어지게 됩니다.

반면, 집도를 선언한다면 당신은 10% 미만의 희박한 성공 확률을 뚫고 오직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초정밀 수술 기법과 속도만으로 환자를 살려내야 합니다.

회의실 벽면에 걸린 디지털시계의 초침이 붉은빛을 뿜으며 무심히 흘러갑니다. 바이탈 모니터의 규칙적인 비프음이 대동맥의 박동처럼 당신의 귓가를 압박해 옵니다. 실패는 곧 파멸, 성공은 곧 절대적인 권력의 획득. 모든 이들의 시선이 당신의 입술 끝에 집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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