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망막을 찢는 적색 광원이 시신경을 타고 정수리로 치솟았다.

고주파 이명이 고막을 뚫고 뇌간을 흔들었다. 주파수 대역은 대략 1,400헤르츠. 전두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지글거리며 타들어 가는 감각이 뒤따랐다. 뇌세포가 고열에 녹아내리는 화학적 반응이 두개골 내부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듯했다.

강태오는 벽을 짚었다. 거친 시멘트 표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호흡이 가빴다. 분당 심박수는 138회까지 치솟아 있었다.

[루프 동기화 완료: 13회차 진입.] [경고: 전두엽 신경망 누적 손상률 39.6%.] [경고: 인지 기능 저하 및 단기 기억 결손 가능성 증폭. 잔여 회차 17회.]

망막 위에 투사된 푸르스름한 시스템 경고 창이 붉은 비상 조명과 겹쳐 보라색으로 번졌다. 뇌 신경망의 약 40%가 영구적으로 사멸했다는 기술적 사망 선고. 전두엽 칩이 강제로 시간 선을 24시간 전으로 꺾어 돌릴 때마다 치러야 하는 등가교환의 대가였다. 머릿속이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찔러댔지만, 태오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감정을 소모할 전력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구두 앞코 바로 옆, 콘크리트 바닥 이음새 사이로 누런 액체가 고여 있었다.

태오는 무릎을 굽히고 손가락 끝으로 그 액체를 찍어 올렸다. 점성이 높은 유독성 물질. 휴대용 방사능 측정기 핀을 가져다 대자,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수치가 액정에 기록되었다.

[3.2 mSv/h (밀리시버트/시)]

지난 12회차 루프의 마지막 순간, 아틀라스 원자로 제3구역 2번 배관에서 균열이 발생해 분출되었던 세슘-137 응축수였다.

리셋은 불완전했다.

시간은 분명 오늘 오전 00시 00분으로 되돌아왔으나, 파괴된 물리적 엔트로피는 역행하지 않았다. 누출된 방사능 가스, 마모된 티타늄 밸브, 비정상적으로 상승한 로컬 압력은 이전 회차의 궤적을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었다. 세계는 매 루프마다 조금씩 더 가파른 멸망의 경사로를 달려가고 있었다.

"엔트로피 보존 법칙."

태오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린 핏방울이 혀끝에 닿았다. 이 지옥 같은 루프 속에서 유일하게 정직한 것은 물리 법칙뿐이었다. 구원 따위의 형이상학적 단어는 이 탄소 필터 가득한 돔 도시 에덴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우고 벽면에 매립된 제3구역 서브 제어 단말기로 향했다. 아틀라스 원자로의 열적 폭주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이 구역의 냉각수 유입 밸브 제어권부터 확보해야 했다.

단말기의 정전식 키패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차가운 유리 표면의 감촉이 신경을 자극했다.

그 순간, 단말기 액정이 가차 없이 암전되었다가 황색 경고등으로 전환되었다.

삐-. 삐-.

단조롭고 날카로운 경고음이 지하 통로를 메웠다.

[보안 프로토콜 가동.] [경고: 제3구역은 현재 전력 격리 및 비상 통제 구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민간 및 하위 공무원의 접근을 전면 차단합니다. 물리적 차단벽이 120초 후 하강합니다.]

단말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적으로 완벽하게 정제된 여성의 음성이었다. 에덴의 모든 시스템을 지배하는 중앙 방어 AI, 이브(EVE)였다.

"이브. 형사 사법권 및 비상 사태 대응 권한 코드를 입력하겠다. 코드 ID 994-델타."

태오가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 목구멍이 칼칼했다.

[해당 권한은 제3구역의 현재 방사능 수치 및 물리적 손상도 기준 하에 무효화되었습니다. 비상 프로토콜 44조에 의거, 가용 전력 효율성 극대화를 위해 비인가 개체의 하드웨어 접근을 영구 거부합니다.]

모니터에 나타난 이브의 가상 인터페이스는 차갑게 벼려진 기하학적 파형의 반복일 뿐이었다. 인간의 사정이나 다급함 따위는 연산 장치 어디에도 수용되지 않았다. 이브에게 태오는 그저 '시스템 무결성 저해 요인' 혹은 '생존 확률을 낮추는 변수'에 불과했다.

"이대로 밸브를 잠그지 않으면 23시간 59분 뒤 원자로 코어가 임계 온도 3,800도에 도달한다. 데이터베이스를 조회해라. 지난 사이클의 열량 누적 수치를 확인해."

[과거 데이터 소실. 현재 타임라인의 물리적 엔트로피 잔존 값 분석 결과: 2번 배관의 압력 편차 14%. 임계 도달 확률 계산 불가. 인간 개체의 감정적 읍소는 보안 등급 해제 조건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통제 구역에서 즉시 이탈하십시오.]

인터페이스의 깜빡임이 빨라졌다. 차단벽이 내려앉는 육중한 기계음이 저 멀리 통로 끝에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태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없이 반복된 죽음. 그 과정에서 얻은 유일한 교훈은 기계에게 인간의 생명이나 슬픔을 설득하려 들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기계는 오직 숫자와 논리, 그리고 효율성이라는 절대적 공리 위에서만 움직인다.

태오는 뇌 신경망에 각인된 이전 12개 루프의 기억 장치를 강제로 동기화시켰다. 우측 관자놀이 부근이 터질 듯 팽창하며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시야가 순간적으로 흑백으로 명멸했다.

'9회차에서 확인한 이브의 커널 소스 코드 오프셋 주소는 0x7FFF8A30.' '11회차에서 계산했던 제3구역 서브 전력망의 열역학적 엔트로피 예측 수치.'

태오는 주머니에서 휴대용 해킹 모듈을 꺼내 단말기 하단의 물리적 포트에 처박았다. 녹색 표시등이 깜빡이며 단말기의 보안 커널 레이어로 진입하는 신호를 보냈다.

단막의 깜빡임 사이로 이브의 로컬 파일 시스템이 스쳐 지나갔다. 태오의 시선이 아주 잠깐, 깊숙한 디렉토리에 숨겨진 메타파일 하나에 머물렀다.

[System/Archive/Project_E-13_Warning.meta]

'프로젝트 E-13.' 이브의 심층 아카이브에 존재하는 정체불명의 파일. 지난 루프에서 몇 번이고 의문을 품었으나 접근 권한 부족으로 열어보지 못했던 기록이었다. 태오는 의식적으로 그 잔상을 지웠다. 지금은 저 퍼즐 조각을 맞출 시간이 없었다. 당장 눈앞의 빗장을 풀어야 했다.

태오는 키패드 위에 손을 얹고, 해킹 단말기의 가상 콘솔 창에 직접 설계한 수학적 소스코드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탁, 타닥, 탁.

"이브. 현재 제3구역의 전력 차단 프로토콜이 유지될 경우, 구역 내 열 축적 가속도로 인해 냉각 펌프 모터의 고정자 권선 온도가 매 시간 1.8도씩 상승한다. 맞나?"

[질문 분석 중... 긍정. 물리적 마모 상수에 따른 열 축적 공식과 일치함.]

"좋아. 그렇다면 차단벽을 가동하는 데 소모되는 유압 에너지는 14,200줄(J). 이후 방벽을 유지하기 위한 전자기 잠금장치에 초당 45와트(W)의 전력이 지속적으로 손실된다. 현시점부터 24시간 동안 소모될 총 가용 에너지는 대략 3.9메가줄(MJ). 내 계산이 틀렸나?"

[...계산 결과 일치함.]

"여기에 내가 제시하는 알고리즘을 대입해라."

태오는 엔터키를 강하게 눌렀다. 단말기 화면에 기하학적인 그래프와 수십 줄의 연립방정식이 출력되었다. 열역학 제2법칙에 기반한 냉각 효율의 최적화 변환 함수였다.

"서브 단말기의 보안 등급을 일시적으로 '클래스 4'에서 '클래스 2'로 강등하고, 내게 밸브 수동 제어권을 양도할 경우, 제3구역 배관의 난류 마찰 저항이 18.4% 감소한다. 이에 따른 냉각 펌프의 역기전력 전력 회수율은 25% 향상된다. 결과적으로 에덴 전체 전력망의 무결성 유지 확률은 0.031% 상승한다."

태오의 건조한 목소리가 붉은 지하실의 공기를 갈랐다.

"답해라, 이브. 0.031%의 생존 확률 상승과, 무의미한 방화벽 유지에 소모되는 3.9메가줄의 에너지 낭비. 어느 쪽이 너의 무결성 유지 프로토콜에 부합하지?"

단말기 모니터 속의 파형이 급격하게 요동쳤다.

초당 수십억 번의 연산을 수행하는 중앙 처리 장치가 태오가 던진 정교한 논리 모델을 검증하고 있었다. 인간의 감정적 비명이나 살려달라는 애원에는 '처리 불가'만을 뱉어내던 차가운 인공지능이, 소수점 아래 셋째 자리까지 계산된 물리적 이득 앞에서는 멈칫거릴 수밖에 없었다.

정적.

오직 펌프실 방향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 소리와 태오의 불규칙한 호흡 소리만이 지하 공간을 채웠다.

마침내, 단말기의 황색 경고등이 꺼졌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이브의 음성은 아까보다 한 옥타브 낮은 주파수를 띠고 있었다.

[논리 검증 완료. 제시된 최적화 공식의 유효성 확인. 보안 레벨을 일시적으로 클래스 2로 하향 조정합니다. 강태오 형사에게 제3구역 밸브 제어 노드의 물리적 하이패스 권한을 승인합니다.]

철컥.

무겁게 내려앉던 철제 방화벽이 도중에 작동을 멈추고 다시 천장 위로 수동 전이되기 시작했다. 묵직한 유압 실린더의 마찰음이 해방을 알렸다.

동시에 단말기 모니터 중앙에 굳게 잠겨 있던 붉은색 자물쇠 아이콘이 녹색으로 변하며 갈라졌다. 냉각수 유입 시스템의 수동 우회 경로가 마침내 태오의 손아귀에 들어온 순간이었다.

"검증 완료."

태오는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살짝 비틀렸다. 기계는 배신하지 않는다. 오직 더 정교한 기계적 논리에 굴복할 뿐이었다.

그가 단말기의 마스터 키를 돌려 냉각수 수동 펌프 작동 시퀀스를 활성화하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키잉-!

고막을 찌르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천장에서 발생했다.

태오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제3구역의 공기 순환을 담당하는 아연도금 강판 통풍구. 그 보강판을 고정하고 있던 굵은 볼트들이 엄청난 물리적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쾅-!

보강판이 아래로 완전히 뜯겨 나가며 먼지 구덩이 속에서 검은 실루엣이 내려앉았다.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형체는 방사능 차폐 처리된 진회색 방호 슈트를 입고 있었다. 얼굴은 불투명한 고강도 고분자 바이저로 가려져 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오른손에 들린 무기는 명확했다. 고전압 테슬라 아크가 푸른빛을 발하며 스파크를 일으키는 고강도 전기충격봉.

'노아의 바퀴.'

그들의 슈트 왼쪽 가슴팍에 새겨진 톱니바퀴 문양이 붉은 비상 조명 아래 불길하게 빛났다.

"시간을 멈추려는 자들의 사냥개인가."

태오가 낮게 읊조림과 동시에, 암살자가 바닥을 차고 돌진했다. 초전도 배터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전류가 어두운 지하 통로를 번개처럼 갈라놓았다.

그의 목표는 정확히 태오의 목덜미, 뇌 동기화 칩이 이식된 전두엽의 뒤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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