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지독한 회색빛이었다.

빌딩 숲을 가득 채운 매연과 사람들의 날 선 언어들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날들이었다. 수석 디자이너라는 화려한 직함은 미련 없이 던져 버렸다. 믿었던 동료들의 배신과 표절 시비는 영혼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았다.

한여울은 도망치듯 서울 변두리의 낡은 동네, 청록동의 좁 가파른 골목길을 올랐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쯤, 골목길 끝자락에 시간이 멈춘 듯 서 있는 이층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벽돌 담벼락 위로 담쟁이덩굴이 엉겨 붙어 있고, 입구에는 햇빛에 바랜 나무 간판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은빛 바늘 아틀리에]

할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운영하시던 낡은 인형 병원. 그리고 이제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여울에게 상속된 유일한 유산이었다.

여울은 녹슨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찰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뽀얗게 가라앉아 있던 먼지 냄새와 오래된 나무의 알싸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햇살이 창살 틈으로 가늘게 쏟아져 들어와 먼지 입자들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평생을 이 좁고 어두운 아틀리에에서 실과 바늘을 쥐고 살았던 할아버지. 여울은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작업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먼지 쌓인 재봉틀과 색색의 실타래들, 그리고 주인을 잃고 덩그러니 놓인 낡은 인형들이 그녀를 맞이했다.

—결국 갈 곳이 없어 이곳으로 돌아왔구나.

쓸쓸한 자조가 채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이었다.

쿵!

조용하던 아틀리에의 낡은 나무문이 거칠게 박살 나며 안쪽으로 꺾여 들어왔다. 고요하던 공간을 깨부순 것은 먼지 섞인 구두 굽 소리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셋이 흙발로 아틀리에 안을 짓밟으며 걸어 들어왔다.

"여기가 그 영감탱이가 쓰던 고물상인가?"

가장 앞에 선 사내가 거칠게 침을 뱉었다. 뺨에 깊은 흉터가 있는 사내의 가슴팍에는 '골드 디벨롭먼트'라는 로고가 선명히 박힌 명찰이 걸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인감도장이 찍힐 자리만 비어 있는 철거 동의서가 들려 있었다.

"누구시죠? 남의 사유지에 무단으로 침입하시는 건 범죄입니다."

여울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덜덜 떨리는 손끝은 숨길 수 없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유지? 이봐, 아가씨. 네 할배가 죽기 전에 이 땅 개발 동의서에 도장 찍기로 약속했어. 상속인이라며? 군말 말고 여기 지장이나 찍어."

흉터 부하가 서류를 여울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종이에서 풍기는 거친 인쇄 잉크 냄새가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는 이 아틀리에를 넘기겠다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당장 나가세요. 경찰에 신고하겠습니다."

여울이 휴대폰을 꺼내려 하자, 다른 용역이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억센 악력에 뼈가 으스러질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어디서 어리광이야? 곱게 말할 때 찍어. 어차피 이 동네는 곧 다 밀어버릴 거니까. 이 낡아 빠진 나무때기 집구석에 미련 둬서 뭐 하려고 그래?"

사내들은 여울을 작업대 구석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강압적인 힘에 밀려 여울의 몸이 작업대 위로 쓰러지듯 엎어졌다. 그 충격으로 작업대 선반 위에 얹혀 있던 낡고 때 묻은 갈색 곰 인형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바닥을 구른 인형의 옆구리가 터지며 누런 솜이 비어져 나왔다.

"이거 놔요! 놓으라고!"

여울은 어떻게든 손치검을 피하려 발버둥 쳤다. 그 과정에서 작업대에 꽂혀 있던 녹슨 돗바늘이 여울의 검지손가락 끝을 깊게 찔렀다.

"아윽!"

날카로운 통증과 함께 붉은 피 한 방울이 솟아올랐다. 여울이 통증에 몸을 움츠리는 순간, 떨어진 핏방울이 우연히도 바닥에 굴러 떨어진 갈색 곰 인형의 터진 옆구리 속으로 정확히 스며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아틀리에 내부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진동이 일었다.

빛바랜 갈색 곰 인형의 몸체에서 푸른빛의 미세한 광선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용역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울 역시 고통도 잊은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할아버지의 낡은 서랍장 가장 깊은 곳,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던 가죽 상자가 스스로 덜컹거리며 열렸다. 그 안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두꺼운 갈색 가죽 제본의 책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영혼의 수선 장부]

금빛 활자가 가죽 표지 위로 선명하게 살아 움직이며 허공에 정렬되었다. 책장이 스스로 파르르 넘어가며 아틀리에 전체를 신비로운 청색 광채로 가득 채웠다.

"이, 이게 무슨 개수작이야?!"

당황한 흉터 사내가 서둘러 여울의 손가락을 붙잡아 억지로 인감 패드에 문지르려 했다. 강제로 서류에 지장을 찍으려는 비열한 폭력이었다.

바로 그 찰나, 영혼의 수선 장부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푸른 파동이 가옥 전체를 폭풍처럼 뒤덮었다.

콰아앙—!

"끄아아악!"

여울을 붙잡고 있던 사내들과 뒤에 서 있던 용역들이 보이지 않는 강력한 힘에 밀쳐져 뒤로 날아갔다. 수백 킬로그램의 물체에 부딪힌 듯, 그들은 아틀리에 입구의 깨진 문짝 너머 마당 바닥으로 사정없이 굴러떨어졌다.

"이, 이게 대체 뭐야? 귀신인가?!"

바닥을 뒹굴며 먼지를 가득 뒤집어쓴 사내들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아틀리에 입구를 가로막은 듯, 그들은 감히 안으로 한 걸음도 들여놓지 못하고 엉금엉금 뒤로 물러섰다.

여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상처 난 검지손가락 끝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다. 대신 은은한 은빛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믿기 힘든 홀로그램 텍스트가 반투명하게 떠올랐다.

--- [영혼의 수선 장부 각성 완료] - 소유주: 한여울 (초보 수선공) - 아틀리에 온기 지수: 0% - 동조율: 15% (경고: 동조율이 낮을 시 감각 과부하 리스크가 증가합니다.)

[수선 대상 식별] - 대상: 낡은 갈색 곰 인형 - 깃든 영혼: '백구' (진돗개 혼종 / 사망 당시 14세) - 상태: 영혼의 훼손도 심각. 차가운 이별의 기억으로 인해 온기가 소실됨. ---

"백구……?"

여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백구는 여울이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과 방황 속에서 유일하게 제 편이 되어주었던 충견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영영 찾지 못했던, 가슴속 가장 아픈 흉터로 남아 있던 녀석이었다.

할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잃어버린 백구의 영혼을 찾아 이 인형 속에 담아두고 계셨던 것이다.

그때, 여울의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윽……!"

갑작스러운 두통과 함께 극심한 오한이 전신을 덮쳐왔다. 이가 덜덜 떨리고 손발 끝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추워. 너무 춥고, 무서워. 누나, 어디 있어? 나 두고 가지 마.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오는 것은 짐승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슬픔이었다. 그것은 백구가 차가운 아스팔트 길거리에서 홀로 죽어가며 느꼈던 극심한 외로움과 공포, 그리고 육체적 고통이었다.

오감을 마비시키는 듯한 감각 과부하가 여울의 척추를 타고 강행 돌파했다. 숨이 막혀 턱컥 소리가 났다. 심장이 떨어져 나갈 듯이 아팠다. 동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느꼈던 고통을 온전히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장부의 혹독한 대가였다.

—이게…… 백구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고통이었구나. 이렇게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 나를 기다렸던 거구나.

여울은 주저앉아 자신을 잠식하는 어둠에 맞섰다.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과거의 배신과 상처 때문에 늘 사람을 피하고 숨어들었던 그녀였지만, 자신을 위해 온몸을 던져 위로해 주었던 백구의 영혼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내가…… 내가 고쳐줄게. 백구야."

여울은 이가 부러질 정도로 입술을 짓씹으며 바닥을 기어 작업대로 향했다.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할아버지의 유산인 낡은 바늘을 쥐는 순간 이상하리만치 중심이 잡혔다.

그때, 작업대 구석 먼지 쌓인 나무 궤짝 틈새에서 은은한 은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여울은 홀린 듯 궤짝 틈새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것은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먼지를 털어내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할아버지의 재봉 보관함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던 정체불명의 실타래였다.

달빛을 자아내어 만든 것처럼 찬란하고 영롱하게 빛나는 '은빛 바늘 실' 한 타래였다.

그 실을 손에 쥐는 순간, 전신을 짓누르던 백구의 통증과 오한이 한풀 꺾이며 따스한 온기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실이라면…… 너를 다시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여울은 눈물을 닦아내고 은빛 실을 바늘귀에 꿰었다.

그러나 아틀리에의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밖으로 튕겨 나갔던 골드 디벨롭먼트의 용역들이 악에 받친 얼굴로 다시 일어섰다. 그들의 손에는 마당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공사용 곡괭이와 쇠파이프가 들려 있었다.

"이 미친 기집애가 무슨 약을 쓴 거야?! 문 부수고 들어가서 다 쓸어버려!"

흉터 사내가 광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쾅! 쾅! 쾅!

격노한 용역들이 아틀리에의 낡은 대문을 곡괭이로 사정없이 내리치기 시작했다. 얇은 목조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침입하기 일초직전의 절체절명의 위기.

그 순간, 대문 밖 장벽 너머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에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음마저 단숨에 찢어발기는 처절하고 날카로운 야간 동물의 울음소리가 허공을 갈랐습니다.

"깨갱—! 깽!"

그것은 단순한 짐승의 소리가 아니었다.

피비린내와 함께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섞인, 살려달라는 처절한 비명이었다. 여울의 가슴속 수선 장부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새로운 붉은 경고등을 켜기 시작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문짝을 부수려던 흉터 사내가 쇠파이프를 멈추고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떴다.

아틀리에의 깨진 대문 틈새로 들이친 것은 청록동 골목의 차갑고 축축한 밤공기만이 아니었다. 어둠을 뚫고 마당으로 굴러 들어온 것은, 한눈에 보아도 처참하게 짓이겨진 작은 생명체였다.

석탄을 짓이겨 놓은 듯 새까만 털을 가진 작은 믹스견 한 마리.

녀석은 한쪽 뒷다리를 기괴한 각도로 꺾은 채, 피가 섞인 진흙을 온몸에 묻히고 기어 오고 있었다. 헐떡이는 숨결마다 선홍빛 피거품이 입가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녀석은 앞이빨로 무언가를 부서져라 꽉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때 가득 탄 투명한 플라스틱 뼈다귀 장난감이었다.

"깽…… 깨갱……!"

녀석이 아틀리에 입구를 향해 필사적으로 앞발을 뻗었다.

그 처절한 몸짓이 아틀리에 입구의 '쪽빛 향나무 문턱'에 닿는 순간, 여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벼락이 치는 듯한 격통이 휘몰아쳤다.

"아아악!"

여울은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숨이 턱 막히며 폐포 깊숙한 곳까지 시큼하고 차가운 약품 냄새가 밀려들었다. 뒤이어 왼쪽 다리를 거대한 펜치로 으스러뜨리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여울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지며 눈앞이 하얗게 번졌다.

—아파, 아파서 터질 것 같아. 하얀 옷을 입은 인간들이 주사기를 꽂았어. 날 가두고, 다리를 부러뜨렸어. 살려줘, 제발 살려줘 누나……!

머릿속을 헤집는 것은 짐승의 왜곡된 기억과 날것의 공포였다.

백구의 슬픔에 더해진 실시간의 고통. 두 마리 동물의 감각이 한꺼번에 뇌리를 강타하자, 여울의 가는 목울대가 팽팽하게 긴장하며 핏줄이 돋아올랐다. 이대로 영혼이 찢겨 나갈 것 같은 과부하였다.

"쳇, 웬 더러운 똥개 새끼가 굴러 들어와서 재수를 털어?"

흉터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의 손에 들린 묵직한 쇠파이프가 밤공기를 가르며 차갑게 치켜들려졌다. 녀석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칠 기세였다. 당장이라도 작은 머리통이 깨져 나갈 듯한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안 돼.

여울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요동쳤다.

더 이상 상처받기 싫어 마음을 닫아걸었던 방어벽이, 눈앞의 잔혹한 폭력 앞에서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다리가 꺾이는 고통을 악물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문턱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작은 것에 손대지 마!"

여울의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은빛 바늘 실'이 반응하듯 눈부신 백은색 광채를 뿜어냈다.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영혼의 수선 장부가 사정없이 덜컹거리며 피처럼 붉은 새로운 경고창을 눈앞에 띄웠다.

--- [긴급 상황: 새로운 영혼의 공명 감지] - 대상: 유기견 '깜이' (믹스견 / 2세 추정) - 상태: 미확인 화학 약물 중독 및 대퇴골 복합 골절. 생명력 급격히 저하 중. - 특이사항: 대상을 수선하기 위해서는 소유하고 있는 '은빛 바늘 실'의 온전한 개방이 필요합니다. - 동조율: 45% (경고: 동조율 급상승으로 인한 자아 상실 위험 발생!) ---

"이 미친 기집애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눈이 뒤집힌 사내가 여울을 향해 쇠파이프를 사정없이 휘둘렀다.

쇠붙이가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이 여울의 귓가를 잔인하게 파고들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바로 그 순간, 골목길 저편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거친 배기음이 한밤의 정적을 박살 내며 아틀리에 마당으로 곧장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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