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심박수 백칠십이. 관상동맥 혈류량 급감. 오버클록 가동 한계 시간 삼십 초 전."

망막을 짓누르는 붉은색 경고 박스가 시야를 온통 난도로질했다.

왕선은 가슴을 쥐어짜는 격통에 침을 삼켰다. 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쇠 냄새가 올라왔다. 허나 멈출 수 없었다. 지금 도주하는 저 세 개의 검은 그림자들의 품에는 고려의 사직을 바꿀 ‘고장력 포신 주조 공정 및 강철 배합 비율 도면’이 들려 있었다.

"전하! 무리하시면 아니 되옵니다! 심화(心火)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이리 뛰시면……!"

뒤를 따르는 한이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거친 야풍에 흩어졌다. 그녀가 거느린 안변 한씨의 사병들이 횃불을 밝히며 필사적으로 추격했으나, 요나라 대장 소배압이 직속으로 길러낸 은간사(銀牌司) 최정예 첩자들의 신법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놈들은 야철소 후방 담벼락을 가볍게 차고 넘어가며, 어둠이 짙게 깔린 서경 외곽의 계곡 숲길로 짓쳐 들어갔다.

"저들이 국경을 넘는 순간, 우리가 흘린 피와 쇠의 무게는 고스란히 거란의 말발굽이 되어 돌아온다."

왕선은 차갑게 뱉어내며 연산계의 시각 추적 필터를 최대치로 개방했다.

[대상과의 거리: 일백사십 이 보.] [이동 벡터: 북북서 방향, 고도 변화율 십오도 경사면.] [추적 목표의 발자국 압력 분석: 평균 칠십오 킬로그램. 도면 보관용 구리 상자의 무게 약 삼 킬로그램 포함.]

첩자들은 단순한 도망자가 아니었다. 골짜기 어귀에 다다르자, 미리 매복해 있던 십여 명의 괴한들이 장도를 뽑아 들며 왕선의 추격대를 가로막았다. 서경의 토착 호족세력이 요나라 은간사에게 매수되어 퇴로를 확보해 주기 위해 배치해 둔 사병들이었다.

"여기서부터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죽어라!"

사병들이 좁은 골짜기 입구를 방패와 장도로 빽빽이 막아서며 살기를 뿜어냈다. 지형의 좁은 폭은 고작 삼 보. 이들을 힘으로 돌파하려면 최소 반 시진 이상의 육탄전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왕선의 머릿속 연산계는 이미 가동 중인 야철소 외곽의 모든 구조물 데이터를 훑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골짜기 옹벽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폐쇄된 '이호 황토 가마' 건물에 머물렀다.

[이호 황토 고로 구조 분석.] [내부 응력 한계점 초과율: 구십이 퍼센트.] [가마 내부 우측 대들보(길이 사 미터, 참나무 재질)의 소성 변형 진행률: 구십오 퍼센트.] [쐐기 지지대 장력: 사만 이천 뉴턴. 특정 충격 인가 시 구조적 연쇄 붕괴 확률 구십구 점 팔 퍼센트.]

이것은 지난겨울, 고로 내부의 온도 불균형으로 인해 미세 산소 균열이 발생하여 가동을 중단하고 해체를 앞두고 있던 낡은 가마였다. 2화에서 수집했던 가마 내부의 미세 균열 데이터가 왕선의 뇌리에서 입체적인 3D 도면으로 재구성되었다.

왕선은 허리춤에서 소형 분화통을 꺼내 들었다. 흑색화약 유인 탄환이 장전된, 주먹만 한 철제 화기였다.

"모두 엎드려라."

"예? 전하, 갑자기 무슨……!"

"엎드리라고 했다. 내 연산에 오차는 없다."

왕선의 검지가 격발 장치를 당겼다.

*콰아아앙!*

화염과 함께 발사된 고탄성 철제 탄환이 정확히 이호 가마 지지대의 핵심 쐐기점을 타격했다. 인장 강도가 한계에 달해 있던 참나무 대들보가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순간, 옹벽 위의 황토 가마 벽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번지더니, 수십 톤에 달하는 연마용 황토벽과 거대한 대들보가 골짜기 입구로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어, 어어?! 가마가 무너진다!"

"피해라! 으아악!"

철저하게 계산된 물리적 붕괴였다. 쏟아져 내린 황토 벽돌과 뒤틀린 참나무 대들보는 길을 막아서던 호족의 사병 십여 명을 그대로 덮쳤다. 둔탁한 파쇄음과 비명이 골짜기를 메웠다. 단 한 발의 사격으로 적의 방어선이 흙먼지 속에 매몰되었다.

"먼지가 걷히기 전에 진입한다."

왕선은 기침을 터뜨리며 붕괴한 가마의 잔해를 밟고 뛰어넘었다. 가슴팍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에 심장이 불규칙하게 요동쳤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계곡 깊은 곳,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수풀 속으로 도망치던 은간사 첩자 세 명은 뒤편에서 들려온 거대한 굉음에 고개를 돌렸다.

"방어선이 단숨에 무너졌다고? 고려인들에게 이런 술수가 있단 말인가!"

"상관없다. 주조 도면만 확보하면 소배압 장군께서 우리 가문을 요나라 최고의 명문으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서둘러라!"

그들이 발걸음을 재촉하려는 순간, 머리 위 하늘에서 기이한 파찰음이 들려왔다.

*슈우우우- 픽!*

공중으로 쏘아 올려진 무언가가 정점을 찍은 순간, 눈을 멀게 할 것만 같은 극도의 백색 광명이 계곡 전체를 집어삼켰다.

"아악! 내 눈!"

"이, 이게 무슨 빛이냐!"

왕선이 미리 준비해 둔 '연산 고조도 반사경 기장'이었다.

구리판을 정밀하게 포물선 형태로 깎아내고 질산으로 은도금한 특수 반사경 장치였다. 그 중심부에서 고농도의 인과 백린, 그리고 황을 배합한 흑색화약 유인 탄환이 격발하면서 발생한 고열의 빛이 반사경을 통해 계곡 바닥으로 일제히 수렴되었다. 현대의 서치라이트와 다름없는 백색 광선이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첩자들의 나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대상 식별 완료.] [좌측 첩자: 거리 구십 보. 이동 속도 초속 사 미터.] [중앙 첩자(도면 소지자): 거리 구십오 보. 이동 궤적 예측 필터 가동.]

왕선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정식 강철 거대 쇠뇌(강철 노)의 견착대를 어깨에 밀착시켰다. 스프링 강철 탄판으로 제작된 이 신형 쇠뇌는 일반 목궁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풍속 일 점 오 미터. 낙차 이 인치. 조준점 수정."

*퉁-!*

강철 시위가 울리는 소리는 둔탁했다. 그러나 발사된 납합금 탄환의 속도는 음속에 가까웠다.

중앙에서 도면 상자를 메고 달리던 은간사 수장의 오른쪽 허벅지가 그대로 파열되었다. 탄환이 뼈를 부수고 관통하자, 수장은 비명을 지르며 진흙 바닥 구굴렀다.

"적에게 퇴로는 없다. 전원 포위하라!"

계곡 사잇길의 어둠 속에서 한이린의 깃발이 나부꼈다. 그녀가 이끄는 은가 전위 궁병대 오십여 명이 미끼로 비워둔 사잇길의 능선을 이미 선점하고 있었다.

"시위를 당겨라! 반항하는 자는 즉시 사살한다!"

한이린의 서릿발 같은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강철 촉을 단 화살 수십 발이 도주로를 촘촘하게 메웠다. 살아남은 두 명의 첩자가 검을 휘두르며 저항하려 했으나,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 앞에서는 무력했다. 어깨와 어깨, 무릎에 화살이 박힌 채 그들은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완벽한 야간 차단전이었다. 고려의 지형과 스스로 개발한 병공학적 광학 기술을 조합한 왕선의 수치적 전술이 거란 최정예 첩보 부대를 단 한 명의 아군 손실도 없이 생포해 낸 것이다.

* * *

왕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은간사 수장에게 걸어갔다. 그의 입가에는 얇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전하! 몸을 보존하셔야 합니다!"

한이린이 급히 다가와 손수건으로 그의 입가를 닦아내려 했으나, 왕선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밀쳐냈다.

"비켜라. 시간이 없다. 내 수명이 깎여 나간 만큼의 가치를 회수해야 한다."

왕선의 차가운 안광이 은간사 수장의 품을 향했다. 그는 단검을 뽑아 들어 수장의 가슴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가죽 갑옷을 찢어발겼다. 그 안에서 정교하게 제작된 소형 철제 상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요나라 황실의 은간사 문양이 새겨진 삼중 잠금장치의 상자였다.

"이것은 요나라의 비전 자물쇠다. 열쇠가 없으면 내부의 화공 장치가 작동해 도면과 서신을 모두 태워버리도록 설계되어……."

수장이 피를 토하며 비웃었으나, 왕선은 이미 연산계를 통해 상자 내부의 기계적 메커니즘을 투시하고 있었다.

[철제 상자 내부 핀 텀블러 배치 분석 완료.] [화공 뇌관 트리거 위치: 우측 상단 삼 밀리미터 지점.] [단검 끝을 이용한 기계적 고정 가능 확률: 구십칠 퍼센트.]

왕선은 단검 끝을 자물쇠 틈새로 밀어 넣었다. 미세한 손끝의 감각만으로 자물쇠 내부의 스프링을 누르고, 화공 장치의 도화선을 가볍게 끊어냈다.

*딸깍.*

경쾌한 소리와 함께 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그 안에는 탈취당했던 강철 배합 비율 도면뿐만 아니라, 기름종이로 겹겹이 싸인 수십 장의 서신들이 들어 있었다.

왕선이 서신을 한 장 펼쳐 들자, 횃불 불빛 아래로 낯익은 인장과 필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은……."

한이린이 서신을 훔쳐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채충순……! 이 늙은이가 가택 연금 중에도 이런 짓을 벌였단 말입니까?"

서신에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려 조정의 중신이자 문벌 귀족의 우두머리인 채충순이 요나라 대장 소배압에게 보낸 연판 서신이었다.

[고려 황실이 서경의 야철 기술을 이용해 신무기를 제조하고 있으니, 거란 대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 서경을 우회하여 개경으로 직행할 수 있는 영토 길잡이와 방어선 지도를 제공하겠음. 그 대가로 전후 고려 영토 내의 사철 광산 및 야철소 지배권을 본 가문에 영구히 귀속시키고, 황실의 제철 독점 조례를 폐지할 것을 요구함.]

서신의 끝에는 채충순의 가문 인장과 호족 연합을 맹약하는 수십 명의 귀족 서명이 붉은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사직을 제 가문의 사유 재산 정도로 생각하는 자들이군."

왕선의 목소리에는 분노조차 섞여 있지 않았다. 오직 철저한 계산만이 가득 찬 기계적인 평온함이었다.

"거란의 철기병이 우리 강철 화포에 무너지기 전에, 이 내부의 녹부터 닦아내야겠다. 이린, 안변 한씨의 사병들을 소집해라. 서경 도호부로 가 사정(司正) 절차를 밟는다. 법의 이름으로 저들의 목을 칠 명분이 완성되었다."

"예, 전하. 즉시 가마를 준비하겠사옵니다."

한이린의 눈동자 역시 실리와 생존을 향해 차갑게 타올랐다.

* * *

**고려사(高麗史) 세가(世家) 현종(顯宗) 원년 겨울 조 요약** 요(遼)의 은간사(銀牌司) 무리가 서경의 기밀 야철 도면을 훔쳐 달아나니, 선(宣)이 밤을 틈타 기이한 조광(照光) 기구와 무쇠 쇠뇌를 사용하여 계곡에서 적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적의 품에서 가택 연금 중이던 채충순(蔡忠順)이 요나라와 내통하여 사철 광산의 이권을 탐하고 황실을 배반하려 한 연판장(聯判狀)을 노획하니, 조정과 야대가 모두 경악하였다. 선이 이를 가지고 서경 도호부로 가 법을 세우려 하였으나, 가문의 파멸을 두려워한 역적들의 무리가 길목을 막아서며 도성에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 * *

새벽안개가 서경 외곽의 고갯길을 자욱하게 메웠다.

왕선은 가마 안에서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채충순의 연판장을 품에 넣었다. 심장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으나, 그의 머릿속 연산계는 이미 다음 단계인 '채충순 가문의 자산 몰수 및 서경 병기창으로의 귀속 비율'을 계산하고 있었다.

"전하, 전방의 안개가 심상치 않사옵니다."

마부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가마가 급격히 멈춰 섰다.

*스스스슥-*

안개 속에서 수십 개의 그림자가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그들의 손에는 고려 군부의 제식 무기가 아닌, 검게 그을린 장도와 무거운 쇠뇌가 들려 있었다. 괴한들의 가슴팍에는 거친 무쇠로 주조된 붉은 표식이 박혀 있었다.

"철혈방(鐵血房)이다……!"

호위 무사 하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철혈방. 호족 채충순이 사적으로 은밀히 육성하여 뒤처리를 도맡아 하던 잔혹무도한 사설 자객 집단이었다. 자신들의 가문이 반역죄로 멸문지화에 처할 위기에 놓이자, 가택 연금 중이던 채충순이 마지막 가산과 인맥을 털어 왕선을 암살하기 위해 보낸 결사대였다.

"왕선의 목을 가져오라 하셨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다 죽여라!"

자객들의 우두머리가 검을 뽑아 들며 사선(死線)을 그렸다. 오십 명이 넘는 무장 자객들이 왕선의 가마 행렬을 정면과 측면에서 완벽한 사선 형태로 포위해 들어왔다.

서경 도호부를 고작 한 마장 앞두고 벌어진 처절한 포위망이었다.

왕선은 가마 문을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서늘한 새벽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시야에 가득 찬 자객들의 숫자와 무장 상태를 확인한 머릿속 연산계가 다시 한번 붉은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위기 상황 발생. 적대 개체수: 오십네 명.] [적의 장력 및 화기 분석: 수동식 탄판 쇠뇌 이십 기 보유.] [아군 호위 병력: 열두 명. 생존 확률 구 점 사 퍼센트.] [돌파를 위한 오버클록 가동 필요성: 매우 높음. 잔여 수명 추가 차감 예고.]

"또 수명을 깎아야 하는군."

왕선은 입가에 고인 피를 닦아내며, 소매 속에서 두 번째 분화통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대안이 없는 전장, 그의 심장이 다시 한번 가혹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