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안을 가득 채운 비린 쇠맛이 목구멍을 타고 끊임없이 역류했다. 황궁의 차가운 청석 바닥 위에 흩뿌려진 선혈은 검붉다 못해 탁한 빛을 띠고 있었다. 의식이 멀어지는 찰나에도 시각 피질을 사정없이 짓누르는 붉은색 경고등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경고: 심실세동 위험 감지.] [수명 영구 차감: 240일.] [잔여 수명: 120일.]
뇌리를 찢는 기계음과 함께 왕선의 시야는 완전히 암전되었다.
* * *
나흘이 흘렀다.
개경의 호화로운 사가도, 황궁의 편전도 아니었다. 사방이 가공하지 않은 거친 화강암 벽으로 둘러싸인 곳, 서경 외곽의 비밀 계곡에 자리한 야철소의 내실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낮고 차분하지만,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왕선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이마에 얹힌 차가운 물수건을 거두는 한이린의 마른 손길이었다. 그녀의 눈밑은 며칠 밤을 지새운 듯 검게 죽어 있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지?"
왕선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가 나오자마자 가슴 깊은 곳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선(電線)을 타고 흐르는 전류처럼 척추를 찔렀다.
"나흘입니다. 폐하께서 어의를 급파하려 하셨으나, 소첩이 손을 써 전하의 환처는 단순한 신열일 뿐이라 둘러대고 이곳 서경으로 직행하였습니다. 전하의 병세가 조정에 알려지면 채충순의 잔당들이 다시 움직일 터이니까요."
한이린은 영민했다. 왕선이 가진 비밀의 실체는 모를지언정, 그의 몸 상태가 극비에 부쳐져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왕선은 상체를 일으켰다. 심장 부근에 손을 얹자, 공학 연산계의 정량적 수치가 머릿속에 투명하게 떠올랐다.
[현재 심박수: 72bpm. 심근 손상도: 14%.] [오버클록 가동 제한 권장.]
수명이 일 년도 채 남지 않았다. 백이십 일. 네 달이라는 시간 안에 거란의 대군을 막아낼 화포 체계를 완성하고, 그들을 압록강 너머로 밀어내야만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왕선은 나약한 감정을 연산에서 배제했다. 효율적이지 못한 감정 소모는 수명을 갉아먹는 독소일 뿐이다.
"서경 야철소의 가동 상황은?"
"전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3호 황토 고로의 장입(裝入)은 마쳤으나, 기술자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가마 내부의 열기가 심상치 않다며 조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태반입니다."
왕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죽 의복을 걸쳤다. 한이린이 만류하듯 그의 소맷자락을 잡았으나, 왕선의 서늘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이내 손을 거두었다.
"인도하거라. 가마의 상태를 직접 봐야겠다."
야철소 내부로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와 함께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높이 십오 척에 달하는 거대한 황토 고로 세 기가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3호 고로 앞에 모인 장인들의 표정은 흙빛이었다.
왕선은 연산계를 가동해 3호 고로의 표면을 주시했다.
[열화상 이미지 전개.] [우측 하부 4.2미터 지점, 황토 및 석회 혼합벽 내부 미세 균열 감지.] [산소 유입률 급증 중. 열팽창 계수 불균형으로 인한 붕괴 확률: 89%]
"전하! 이 가마는 버려야 합니다!" 늙은 노장이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가마 안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나옵니다. 이대로 불을 계속 때다가는 가마 전체가 터져나가 주위에 있는 인부들이 모두 몰살당할 것입니다!"
왕선은 가마의 뒤틀린 대들보와 균열 주위를 정밀하게 스캔했다. 이미 2화에서 연산계로 탐지해 두었던 황토 가마 내부의 미세 산소 균열 징조가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다. 기압과 열팽창의 역학 관계를 계산해 보니, 특정 지점의 지지대를 제거하면 가마는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방향으로 붕괴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 야철소 정문 방향에서 다급한 쇠소리와 함께 비명성이 들려왔다.
"습격이다! 채충순의 사병 놈들이 장인들을 죽이고 안으로 들이닥친다!"
가문이 몰락할 위기에 처하자 채충순의 가신들과 서경의 사리(私吏)들이 폭도로 돌변해 야철소를 파괴하러 온 것이었다. 무장한 사병 삼십여 명이 칼을 휘두르며 제철소 내부로 난입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고려의 유일한 철 생산 기지인 이곳을 잿더미로 만드는 것.
"모두 대피하라! 가마 뒤편의 수로 쪽으로 숨어라!"
왕선이 냉정하게 명령했다. 장인들과 한이린이 신속하게 움직였다. 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흉터 많은 사내가 칼을 겨누며 왕선에게 다가왔다.
"왕선! 네놈이 조정을 망치고 우리 가문을 도륙했다! 여기서 네놈의 목을 베고 가마를 부수면 끝이다!"
무장한 사병들이 3호 고로 앞, 즉 붕괴 예상 지점의 바로 아래로 집결했다. 왕선의 입가에 가느다란 호선이 그려졌다. 그는 도망치는 척하며 3호 고로의 주 지지대 역할을 하는 버팀목 체인 옆으로 이동했다.
[물리 연산 완료.] [버팀목 우측 쐐기 탈거 시, 3호 고로 전면부 붕괴각 45도.] [붕괴 도달 시간: 3.2초. 낙하물 총질량: 12톤.]
"무지한 자들이군. 열역학과 구조역학의 기초조차 모르는 무리들이 법과 가문을 논하다니."
왕선은 벨트에 차고 있던 쇠망치를 들어 올려 버팀목의 핵심 쐐기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깡-!
맑은 쇳소리와 함께 쐐기가 튕겨 나갔다. 동시에 고로 내부에서 팽창하던 가스와 열기가 미세 균열을 타고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콰아아앙!
"어, 어라?! 가마가 무너진다!"
흉터 많은 사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수천 도의 열기를 머금은 거대한 황토 벽돌과 뒤틀린 철제 대들보가 정확히 사병들이 밀집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쿠쿠쿠쿵!
단 한 번의 먼지 구름과 비명 속에서, 침입자 이십여 명이 뜨거운 황토 잔해 아래 깔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연산계가 제시한 오차 범위 5센티미터 이내의 완벽한 압사(壓死) 전술이었다. 남은 대여섯 명의 사병들은 공포에 질려 무기를 버리고 야철소 밖으로 달아났다.
먼지가 자욱한 현장에서 왕선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가마 하나를 잃었으나, 적의 습격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내부의 잠재적 위험 요소를 한 번에 제거했다. 한이린이 떨리는 눈으로 잔해를 바라보더니, 이내 왕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가마의 균열을 역용하여 적들을 묻어버리시다니... 전하의 혜안은 참으로 무섭사옵니다."
"감탄할 시간 없다. 살아남은 고로 두 기의 가동률을 극대화해야 한다. 그리고..."
왕선은 품속에서 서경의 첩보망을 통해 입수한 밀 서 한 장을 꺼냈다. 요나라 성종 야율융서의 친위대가 사용하는 '특수 연철 수냉식 돌격 찰갑'의 조립 도면이었다.
"이것이 거란 철기병의 핵심 방어구인가."
왕선은 밀서를 펼쳐놓고 연산계를 가동했다. 종이 위에 그려진 조잡한 갑옷 그림 위로 수천 개의 격자선이 겹쳐지며 삼차원 렌더링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분석 완료: 탄소 함유량 0.12% 이하의 저탄소 연철.] [수냉식 급랭 처리를 통해 표면 경도(Vickers Hardness) HV 450 달성.] [취약점 분석: 판재 간의 연결 리벳 부위 및 가열 시 급격한 연화(Softening) 특성 존재.]
"연철을 달구어 찬물에 담금질했군. 표면만 단단할 뿐 내부 인성은 극히 취약하다. 충격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능력이 떨어지니, 고속으로 회전하는 강철 탄두의 운동 에너지라면 단 한 발로 관통할 수 있다. 관건은 이를 쏘아 보낼 화포의 정밀도다."
왕선이 탁자 위에 신형 화포의 포신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할 때였다. 야철소의 가죽 들문을 열고 거구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먼지 묻은 갑옷을 걸친 노장, 서경도순검사 강감찬이었다.
* * *
강감찬은 가마가 붕괴한 참상을 묵묵히 바라보더니, 왕선이 서 있는 설계 탁자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계와 경외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전하께서 또 한 번 기적을 행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허나, 몸도 온전치 못하신 분이 어찌 이리 무리를 하십니까."
"대감, 거란의 20만 대군이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내가 누워 있을 시간은 단 한 호흡도 없습니다."
왕선은 인사치레를 생략하고 곧바로 지도를 펼쳤다.
"강 대감. 고려의 군세로 거란의 철기병을 정면에서 맞받아치는 것은 자살 행위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승산은 이곳 서경에서 주조할 '철제 장포(長砲)'와 산악 요새를 결합한 화력 방어선뿐입니다."
강감찬은 눈살을 찌푸렸다. "화포라 하심은 송나라의 화투(火毬)나 지화(地火) 같은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들은 소리만 요란할 뿐, 거란의 중장 철기병의 갑옷을 뚫지 못합니다."
"그 조잡한 연막탄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왕선은 붓을 들어 지도 위의 흥화진과 구주 일대의 산악 지형을 빠르게 찍어내려갔다.
"이것은 단순한 화약 무기가 아닙니다. 강철로 주조된 포신 내부에서 화약의 폭발 압력을 극한으로 가두었다가, 고탄소 백색주철로 만든 탄환을 포구 초속 250미터로 사출하는 병기입니다."
"포구 초속... 250미터?"
생경한 단어에 강감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왕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재로 깎아 만든 화포의 모형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앙각 12도로 포신을 고정할 시, 유효 사거리는 800보에 달합니다. 거란의 기병들이 계곡의 좁은 입구로 밀려들 때, 산사면에 배치된 세 기의 포대에서 일제 사격을 가합니다. 탄환은 공중에서 폭발하여 사방으로 수천 개의 강철 파편을 비산시킬 것입니다."
왕선은 연산계가 도출한 수치들을 막힘없이 읊조렸다.
"낙탄 지점 반경 15장(丈) 이내의 모든 인마(人馬)는 뼈와 살이 분리됩니다. 거란군이 자랑하는 수냉식 찰갑은 이 파편 폭풍 앞에서 종잇장에 불과합니다. 대감, 우리가 필요한 것은 넓은 들판에서의 회전이 아닙니다. 적을 좁은 산길로 유도하는 몰이 사냥입니다."
수치와 지형, 그리고 물리적 파괴력이 완벽하게 맞물린 왕선의 설명에 강감찬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수십 년간 전장을 누빈 백전노장이었으나, 이토록 철저하게 기하학과 물리 법칙으로 계산된 전쟁 계획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무장이 구상하는 전술이 아니라, 하늘의 이치를 지배하는 관리가 내리는 신탁과도 같았다.
강감찬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이것이... 진정 가능하단 말씀이십니까? 무쇠로 만든 통이 터지지 않고 그 거대한 힘을 견딜 수 있단 말입니까?"
"라메의 후육 원통 공식을 적용해 포미(砲尾)의 두께를 포구의 세 배로 설계했습니다. 가마의 온도 제어와 탄소 함량 조절만 완벽하다면 포신이 파열할 확률은 0.3% 미만입니다. 대감께서는 오직 한 가지만 하시면 됩니다."
왕선은 강감찬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거란군을 제가 지정한 협곡으로 밀어 넣으십시오. 나머지는 강철과 화약이 알아서 해결할 것입니다."
강감찬은 마침내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는 일종의 전율과 함께, 이 냉혹하고 기계적인 종실 왕선에 대한 두려움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전하의 뜻대로 군사들을 배치하겠사옵니다. 고려의 사직이 전하의 무쇠 통에 걸려 있음을 명심해 주십시오."
* * *
밤이 깊었다.
야철소 내부의 고밀 사격장에서는 신형 화포의 포신 시제품에 대한 압력 테스트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왕선은 연산계를 켜고 포신 표면의 열 응력 분포를 모니터링하고 있었다.
[포신 내부 압력: 1,200bar. 균열 징후 없음.] [주조 완성도: 98.7%. 극히 양호.]
"드디어 성공이군."
왕선은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 포대만 완성되면 거란의 철기병은 고려의 산악 지대를 단 한 걸음도 넘어설 수 없다. 한이린이 따뜻한 차를 내오며 미소를 지었다.
"전하, 이제 한숨 돌리셔도..."
그 순간, 연산계의 경고음이 귓전을 때렸다. 심장의 통증 경고가 아니었다. 외부 침입을 감지하는 공간 음향 연산 센서의 반응이었다.
[경보! 후방 가마 도면 보관실 주변, 비정상적 기류 및 발걸음 감지.] [침입자 인원: 3명. 이동 속도 극히 빠름.]
"습격이다!"
왕선이 소리치며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창문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검은 옷을 입은 괴한 세 명이 도면 보관실의 담을 넘어 도주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왕선이 낮에 완성했던 '고장력 포신 주조 공정 및 강철 배합 비율 도면'이 들려 있었다.
"은간사(銀牌司)의 첩자들이다!"
야철소 경비병들이 급히 활을 쏘았으나, 놈들의 신법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요나라 대장 소배압이 고려의 신무기 개발을 저지하고 그 기술을 탈취하기 위해 파견한 최정예 밀사들이었다.
"안 된다! 저 도면이 거란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연산이 무위로 돌아간다!"
왕선은 가슴을 쥐어짜는 격통을 무시한 채 첩자들이 사라진 어둠 속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왕선(王宣) 조 요약** 현종 원년 겨울, 선(宣)이 서경의 야철소에서 적의 간계를 간파하고 붕괴하는 가마를 이용하여 침입한 도적 수십 명을 한 번에 묻어 죽이니, 그 기묘한 계책에 군사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시중 강감찬이 야철소를 방문하여 선이 제시한 화포의 도면과 지형 배치를 보고 전율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고려를 구하기 위해 내린 신물(神物)이다" 하였다. 그러나 그날 밤 요나라의 밀정들이 가마의 비밀을 도둑질하여 달아나니, 선이 몸을 돌보지 않고 군士들을 이끌고 추격하였다. 국경의 밤하늘에 살기가 가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