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나무아미타불이라도 외며 살려달라 빌 줄 알았더냐, 이 가당치 않은 황족 놈아."

거구의 승병 대장이 들고 있는 은빛 철퇴가 횃불 빛을 받아 번뜩였다. 그의 발걸음이 내딛어질 때마다 사찰 지하 창고의 흙바닥에 깊은 발자국이 패였다. 쉰 명이 넘는 승병들이 병장기를 맞부딪치며 좁혀오는 포위망은 숨이 막힐 정도로 치밀했다. 비린내 나는 쇠 냄새와 기름 가득한 횃불 연기가 좁은 지하실을 채웠다.

왕선은 도망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승병 대장의 얼굴이 아닌, 그들의 머리 위를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황토 가마의 하부 옹벽과 대들보로 향해 있었다.

망막 위에 청색의 연산식들이 어지럽게 명멸하기 시작했다.

[대상: 광명사 지하 연계 황토 가마 하부 옹벽] [구조적 결함 검출: 2화 기록 데이터 동기화 완료] [미세 산소 균열 폭: 14.8mm] [대들보 잔여 허용 하중: 8,400N] [임계점 도달율: 98.2%]

2화에서 사직단 고로를 설계할 당시, 왕선은 광명사 지하 창고와 지상의 가마가 열 배출구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밀 분석해 두었다. 지상의 가마는 이미 미세한 산소 누출로 인해 내부 균열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가마를 지탱하는 주 대들보는 겨우 버티고 있는 화약고나 다름없었다.

"이린."

왕선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 한 줌의 떨림도 없었다.

"예, 전하."

뒤에 선 한이린이 소매 속에서 조용히 소형 점화용 수철(쇠부싯돌)을 꺼내 쥐었다. 그녀의 영민한 눈동자는 왕선이 무엇을 노리는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저기 쌓인 초석 상자들의 봉인을 뜯어라. 날림으로 정제된 거친 탄소 가루와 배합한다. 비 비율은 일 대 구."

"미쳤구나! 감히 부처님의 전각 아래에서 수작을 부리려 드느냐!"

승병 대장이 철퇴를 치켜들며 돌진했다. 사슬이 거칠게 쓸리는 소리가 지하 창고의 벽을 울렸다.

"던져."

왕선의 명령과 동시에, 야철소 사병 두 명이 초석 가루와 가마 수리용 황 분말이 뒤섞인 가죽 주머니를 지상 가마와 연결된 통기구 틈새로 정확히 밀어 넣었다. 한이린이 튕긴 불꽃이 도화선을 타고 번개처럼 빨려 들어갔다.

"엎드려라."

왕선이 한이린의 어깨를 잡아끌어 바닥으로 처박음과 동시에, 지독한 폭음이 지하를 뒤흔들었다.

콰아아앙!

황토 가마 내부에서 급격히 팽창한 가스 압력이 미세 산소 균열 부위로 일시에 분출되었다. 가마를 받치고 있던 황토 옹벽이 거대한 비명과 함께 쩍 갈라졌다. 구조적 한계를 넘은 주 대들보가 굉음을 내며 비틀렸다.

"어, 어어?!"

돌진하던 승병 대장의 머리 위로 수백 근에 달하는 가마의 황토 벽돌과 불타는 숯더미가 해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쿵! 쿠구구궁!

"으아아악!"

"살려다오! 가마가 무너진다!"

단 한 번의 연쇄 폭발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가마 하부의 대들보가 무너지며 승병들의 절반 이상이 비명 횡사했다. 무너진 흙더미와 깨진 벽돌에 깔린 승병들이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먼지와 연기 속에서 은빛 철퇴는 무참하게 꺾인 채 흙먼지 속에 처박혀 있었다.

"콜록! 전하, 아직 잔당들이 남았습니다."

한이린이 먼지를 털어내며 차갑게 속삭였다. 붕괴를 피해 살아남은 이십여 명의 승병들이 눈이 뒤집힌 채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죽여라! 저놈들을 죽여야 우리가 산다!"

그들의 외침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방포(放砲)!"

지하 창고 입구의 무너진 돌계단 위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강감찬이 대동한 현풍 강씨 가문의 사병들과 한이린이 미리 대기시켜 둔 야철소 방포대원들이 열을 맞추어 나타났다. 그들의 손에는 소형 화승총과 화살에 기름천을 감은 노궁이 들려 있었다.

타당! 타다당!

자욱한 매연을 뚫고 철환과 불화살이 살아남은 승병들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비명과 함께 승병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강감찬의 가병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열을 유지한 채 잔당들의 목을 베어 넘겼다.

"사찰의 승병이라 하기에 그 기세가 대단한 줄 알았더니, 결국은 재물에 눈이 먼 도적 떼에 불과했군."

강감찬이 가죽 장갑에 묻은 피를 닦으며 걸어 내려왔다. 그의 매서운 눈매가 왕선을 향했다.

"종실의 몸으로 사찰을 폭파하고 승병을 도륙하다니. 개경의 대신들이 이 사실을 알면 상소문이 산을 이룰 것입니다."

"알게 두십시오."

왕선은 옷에 묻은 황토 먼지를 털어내며 무너진 가마 잔해로 다가갔다.

"법벌을 운운하던 자들이 조정을 속이고 군수 자원인 염초를 밀수해 쌓아두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면 채충순조차 이들을 비호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황실의 군령을 집행한 나를 탄핵하려 드는 자가 역적의 우두머리로 몰릴 것입니다."

왕선의 시선은 이미 무너진 가마 아래에서 붉게 이글거리는 용융물로 향해 있었다. 가마는 무너졌으나, 가마 하부의 도가니와 외부 공기 차단 격벽은 오히려 붕괴한 흙더미에 덮여 완벽한 밀폐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다시 한 번 연산계의 광막이 켜졌다.

[경고: 공학 연산계 연속 가동 시간 초과] [사용자 수명 단축 위험 감지. 심박수: 142bpm] [도가니 내부 온도: 1,580℃] [탄소 함량: 1.2% (강철 임계 영역 진입)]

쿵. 쿵. 쿵.

가슴 깊은 곳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목구멍으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왔으나 왕선은 침을 삼키듯 그것을 억눌렀다. 지금 가마 내부의 산소 유입을 미세 제어하지 않으면, 수개월 동안 준비한 제철 작업이 수포로 돌아간다. 고려의 저질 자철석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고순도 백선철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수력 벨로즈(송풍기)를 최대로 가동하라! 도가니 내부의 온도를 1,550도 이하로 떨어뜨리지 마라!"

왕선이 소리쳤다. 생존한 장인들이 겁에 질린 채 무너진 가마 뒤편의 송풍 장치로 달려가 손잡이를 미친 듯이 돌렸다.

"석회석 분말을 투입해라! 산성 슬래그를 완전히 분리해야 한다!"

왕선은 머릿속 설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슬래그의 점도와 규산염의 화학 반응을 실시간으로 계산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는 도가니 배출구의 열림 각도를 조절했다.

[연산 완료. 출탕(出湯) 개시.]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도가니 하부의 진흙 마개가 깨져 나갔다.

그 순간, 황토 가마의 어둠 속에서 눈이 시릴 정도로 눈부신 은백색의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기존 고려의 야철소에서 보던 검붉고 탁한 쇳물이 아니었다. 불순물이 완벽히 제거되어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순도 99%에 육박하는 고순도 백선철(白銑鐵)이었다.

"이, 이것이 정녕 철이란 말인가?"

늙은 장인 한 명이 쇳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얼굴을 가리며 경악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빛깔이… 은(銀)과 같습니다. 잡철의 기운이 단 한 푼도 보이지 않습니다!"

완성된 백선철 배출 샘플이 거푸집에서 식어가며 점차 푸르스름한 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왕선은 식어가는 철판을 집게로 집어 올렸다.

두께 5밀리미터의 고탄소 강철판.

이 정도 강도와 인성이라면 거란의 정예 기병이 착용하는 하북성제 찰갑을 종잇장처럼 뚫어버릴 수 있는 신형 화포의 포신과 강철 탄판을 제조하기에 충분했다. 현대 병공학의 정밀 수치 비례를 고려의 황토 가마라는 원시적인 환경에서 마침내 구현해 낸 순간이었다.

"해냈군요, 전하."

한이린이 철판의 빛깔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눈에는 이 강철이 가져올 거대한 부와 권력의 지도가 그려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서경의 모든 병기창을 무장시킬 수 있습니다. 채충순과 개경의 늙은이들도 이제는 전하의 발아래 엎드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왕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차갑게 식은 강철 샘플을 목재 궤에 담았다.

"기뻐하기엔 이르다. 이 강철을 황상께 직접 보여드리고 서경 직영 병기창의 전권을 공식화해야 한다. 즉시 마차를 준비하라. 개경으로 간다."

야철소 정문 앞,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도로 위로 수십 대의 마차가 도열하기 시작했다. 최초로 양산된 고순도 강철 샘플과 광명사에서 몰수한 초석 상자들이 붉은 천에 덮인 채 마차에 실렸다.

그러나 그들이 야철소의 거대한 목조 정문을 열고 나가려던 바로 그 순간.

두구두구두구!

안개 속에서 수십 필의 군마가 대열을 지어 나타나 야철소의 정문을 완전히 포위했다. 그들의 갑옷 위에는 황실의 근위대가 아닌, 개경 중추원과 문하부의 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말 고삐를 잡은 중년의 고위 관료가 차가운 눈빛으로 품속에서 황금색 비단으로 감싸인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어명이오! 서경 야철소 판관 겸 종실 왕선은 들으라!"

그의 목소리가 새벽의 야철소 마당에 엄하게 울려 퍼졌다.

"사찰을 무단으로 침범하여 승려들을 학살하고, 황실의 자원을 사사로이 유용했다는 탄핵이 중추원에 접수되었다. 문하평장사 채충순 대감의 명에 따라, 왕선의 모든 직무를 정지하고 현 시간부로 개경 중추원 의형대로 압송한다!"

관료의 뒤로 철갑을 두른 문하부 소속 사병들이 창검을 겨누며 마차 행렬을 가로막아 섰다.

왕선의 눈이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궤 속에 담긴 차가운 강철 샘플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권구(卷九) 역수(譯粹) 요약** 현종 원년(1010년) 11월, 종실 왕선(王宣)이 서경 광명사(廣明寺)의 지하지고를 수색하여 은닉된 염초 수천 근을 적발하였다. 사찰의 무장 승도들이 군령에 항거하여 병장기를 휘두르니, 선이 가마의 화기(火氣)를 이용해 이를 진압하였다. 이때 얻은 쇳물은 그 빛깔이 은과 같고 강도가 이성(異姓)의 철과 달라 이를 '백갱철(白坑鐵)'이라 불렀다. 개경의 간신 채충순(蔡忠順)등이 선의 공을 시기하여 군사를 보내 선을 압송하려 하니, 서경의 군민들이 길을 막고 울부짖었다.

"의형대(義刑臺)라."

왕선은 마차의 차가운 붉은 천에서 손을 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의 구두굽이 핏물과 황토가 뒤섞인 진흙바닥을 밟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의 눈동자는 감정의 동요 없이, 오직 눈앞에 도열한 중추원 사병들의 무장 상태를 수치로 환산하고 있었다.

[분석 대상: 중추원 소속 갑사 42명] [무장: 탄소 함량 0.3% 이하의 연철제 어린갑, 2.4미터 장창] [대열 간격: 1.2미터 (방어적 저지 대형)] [특이사항: 전방 좌측 3인, 갑옷 내부 수색 시 거란식 호신도(護身刀) 소지 확률 89.4%]

왕선의 눈이 가늘어졌다. 중추원의 사병이라 칭하는 자들 중 일부의 걸음걸이와 견갑의 비틀림이 고려의 군례와 달랐다. 말을 타는 유목민 특유의 O자형 골반 발달도가 연산계의 골격 분석 필터에 붉은색 경고등으로 명멸했다.

단순한 채충순의 사법적 압송이 아니었다. 이 안개 속에 뱀이 섞여 있었다.

"서경 판관 왕선은 어명을 받들지 않고 무엇을 망설이는가!"

말 위에 탄 관료, 중추원 부사(副使) 임몽익이 채찍을 들어 마차를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개경 문벌 귀족 특유의 오만함과 조급함이 동시에 묻어났다.

"그 뒤에 실린 가당치 않은 쇠붙이들과 사찰에서 약탈한 염초 역시 모두 국고로 귀속될 것이니, 당장 말에서 내려 오라를 받으라!"

"임 부사."

왕선이 걸음을 멈춘 곳은 임몽익이 탄 군마의 코앞이었다. 말머리가 왕선의 서늘한 기세에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왕선은 품속에서 한 장의 가죽 종이를 꺼내 들었다. 사흘 전, 채충순의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중추원 군령장이었다.

"이것이 무엇으로 보입니까?"

"그까짓 군령장은 서경의 가마터를 수리하라는 명일 뿐이다! 사찰을 피로 물들이고 승려들을 도륙하라는 면죄부가 아니란 말이다!"

"고려 율령 형법 제7조."

왕선의 입에서 나온 것은 감정적인 항변이 아닌, 건조하고 딱딱한 법전의 자구였다.

"전란 시 군기(軍器)의 제조와 원료 조달을 방해하는 자는 신분을 막론하고 즉결 처분할 수 있다. 또한, 태조 대왕께서 세우신 분사(分司) 제도에 따르면 서경의 야철소는 개경의 중추원이라 할지라도 황상의 친필 밀조 없이는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성역이다. 임 부사, 당신이 가져온 교지에 황상의 수결(手決)이 있는가?"

임몽익의 얼굴이 순간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급히 두루마리를 품 안으로 감추려 했으나, 왕선의 서늘한 시선이 이미 그 종이의 질감과 먹의 건조 상태를 관통한 뒤였다.

[분석: 황금색 비단 교지] [지질: 황주산 닥종이 (왕실 전용 경지 아님)] [인장 분석: 중추원 관인 위조율 12.5%, 서경 도호부 날인 누락] [인장 잉크의 수분 증발도: 92% (개경에서 서경까지의 물리적 이동 시간 3일과 불일치, 서경 인근에서 급조된 위조 서류)]

"황상의 수결은커녕, 중추원의 공식 관인조차 위조된 가짜 교지군."

왕선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마당을 울렸다.

"뭐, 뭐라고? 이 무슨 망발인가!"

"서경에서 개경까지 파발을 보내 교지를 받아오려면 적어도 사흘이 걸린다. 광명사의 염초 적발은 어젯밤의 일이다. 어찌 개경의 중추원이 하루 만에 서경의 일을 보고받고 황상의 교지를 내려 이곳에 도달한단 말인가? 당신들이 가진 교지는 채충순의 사가(私家)에서 위조된 사문서다."

임몽익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가 미처 반박하기도 전에, 왕선의 뒤에 서 있던 강감찬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에 찬 환도의 자루에 가 있었다.

"임 부사. 자네가 문하평장사의 수하로서 서경의 정세를 어지럽히러 온 것은 알았으나, 감히 위조된 어명으로 종실을 압송하려 할 줄은 몰랐네. 이것은 단순한 이권 다툼이 아니라 역모(逆謀)일세."

강감찬의 묵직한 목소리에 중추원 사병들의 동요가 시작되었다. 창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왕선의 심장 부근에서 참을 수 없는 격통이 휘몰아쳤다.

"윽…!"

[경고: 심박수 182bpm 돌파] [뇌 신경 전달 물질 과부하로 인한 좌심실 수축 장애] [수명 잔여 수치 급감: 180일 차감]

왕선은 입안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피를 묵묵히 삼켰다. 공학 연산계를 연속으로 가동하며 가마의 대들보 붕괴를 계산하고, 방금 전 위조 교지의 미세 분자 구성을 정밀 연산한 대가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고, 다리에 힘이 풀리려 했다.

'지금 쓰러지면 모든 것이 끝난다.'

그는 이빨을 악물고 식어가는 백갱철 판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그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기계적인 이성이 육체의 비명을 강제로 억눌렀다.

"전하!"

한이린이 그의 이상을 눈치채고 급히 곁으로 다가와 왕선의 팔을 부축했다. 그녀의 손길을 통해 전달되는 서늘한 체온이 왕선의 정신을 겨우 붙잡아 주었다.

"물러서지 마라, 이린."

왕선은 낮게 속삭이며 임몽익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임 부사. 위조된 교지로 황족을 겁박한 죄, 그리고 무엇보다…"

왕선의 시선이 임몽익의 뒤편, 창을 쥐고 몸을 잔뜩 웅크린 세 명의 사병에게 고정되었다.

"그대들의 대열 속에 숨어든 거란의 세작들을 비호한 죄를 어떻게 씻으려 하는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사병들 사이에 서 있던 세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거란식 곡도(曲刀)를 뽑아 들었다.

"발각되었다! 종실 놈의 목을 베어라!"

거란어로 부르짖는 날카로운 파음과 함께, 세 명의 살수가 임몽익을 밀쳐내며 왕선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도약했다. 안개 속에서 은빛 칼날이 뱀처럼 허공을 갈랐다.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권제십오(卷第十五) 요약** 현종 원년 겨울, 문하평장사 채충순의 도당인 임몽익이 가짜 어명을 지니고 서경 야철소에 이르러 종실 왕선을 체포하려 획책하였다. 이때 요(遼)의 세작들이 사병으로 위장하여 섞여 있었으니, 선이 이를 간파하고 꾸짖었다. 세작들이 흉기를 드러내어 선을 해치려 하매, 야철소의 군민들이 대경실색하였다. 선은 기운이 쇠하여 각혈하면서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강철을 쥐고 호령하니, 그 기상이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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