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직단 뒤편…… 황토 고로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청지기의 핏기 없는 외침이 허공을 갈랐다. 혼인 교지를 찢어발기고 승리에 도취해 있던 야철소의 공기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왕선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몸을 돌렸다. 자락이 거칠게 펄럭였다.

"대군장님! 위험합니다! 아직 연기가 자욱하고 불길이……!"

"비켜라."

청지기의 만류를 힘으로 밀쳐내며 왕선은 사직단 뒤편 비밀 계곡을 향해 내달렸다. 차가운 겨울 바람을 뚫고 달리는 그의 시야 너머로, 시커먼 매연과 붉은 화염이 뒤엉킨 채 솟구치는 계곡의 입구가 보였다. 한이린 역시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거친 숨소리가 서리처럼 허공에 흩어졌다.

계곡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매캐한 유황 냄새와 타들어 가는 흙먼지가 사정없이 폐부를 찔러왔다. 가마가 있던 자리는 처참했다. 황토로 정교하게 쌓아 올렸던 십여 장 높이의 용광로는 허리가 완전히 끊어진 채 무너져 내려 있었고, 붉은 쇳물이 진흙 바닥으로 흘러내려 치익 하는 비명과 함께 하얀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아아…… 내 가마가, 대군장님의 가마가……!"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는 노장인의 손끝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무너진 황토 더미 아래로 사람의 손과 발이 불길하게 뻗어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왕선은 그 참상을 응시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는 슬픔이나 분노 대신, 극도로 차가운 이성으로 빛나고 있었다.

'연산계 기동.'

망막 위로 푸른빛의 스펙트럼이 펼쳐지며 붕괴한 황토 가마의 잔해가 삼차원 입체 도면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제1호 황토 고로 파손도: 92%] [내부 응력 한계 초과율: 280%] [연소 가스 배출구 미세 균열 전파 확인] [원인: 고온 영역에서의 산소 공급 과다 및 황토 접합부의 미세 산소 균열]

뇌리를 스치는 연산의 결과는 가혹했다. 지난번 가마를 증축할 때 감지되었던 미세한 산소 균열 징조를 무시하고 송풍량을 급격히 늘린 것이 화근이었다. 백선철(고탄소 주철)을 얻기 위해 가마 내부 온도를 1,200도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황토 가마의 구조적 한계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간 것이다.

쿵쾅! 쿵쾅!

오버테크놀로지 연산을 지속하자 가슴 깊은 곳에서 고동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심장이 조여드는 가혹한 통증에 왕선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맛이 감돌았다. 뇌와 심장에 가해지는 가혹한 연산의 대가였다. 신체 수명이 또다시 깎여 나가는 감각이 뼛속까지 시리게 전달되었다.

"대군장님! 괜찮으십니까?"

한이린이 급히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했다. 그녀의 손길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왕선의 안위를 살피느라 예리하게 빛났다.

"괜찮다. 수치 오류일 뿐이다."

왕선은 차갑게 손을 흔들어 그녀를 물렸다. 그리고 무너진 가마의 잔해를 향해 걸어갔다.

"백선철을 얻으려면 이 가마를 반드시 복구해야 한다. 그러나 황토만으로는 강도를 버틸 수 없다. 내화 벽돌의 접합력을 높일 탄산칼슘과 점토의 배합비를 다시 계산해야 해."

"하지만 대군장님, 가마를 다시 세운다 한들 거란의 침공까지 남은 시간은 단 두 달입니다. 이 철로 무기를 만들어 봐야 화약이 없으면 요나라의 철기병을 저지할 수 없습니다. 화약의 핵심인 초석(질산칼륨)은 고려 땅에서 나지 않사옵니다. 송나라에서 수입하는 소량의 초석으로는 대포 한 문도 제대로 쏘지 못합니다."

한이린의 지적은 정확했다. 철이 뼈대라면 화약은 심장이다. 아무리 단단한 강철 포신을 깎아내도, 그것을 밀어낼 추진약이 없다면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왕선이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훔치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고려 땅에 초석이 없다고 누가 그러더냐."

"예? 하지만 조정의 기록에도 초석은 전량 수입에 의존한다고……."

"기록은 권력자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조작하는 숫자의 나열일 뿐이다."

왕선이 손가락을 뻗어 서경 사직단 동편, 울창한 숲 너머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웅장한 기와지붕을 자랑하는 대형 사찰, 광명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찰의 지하를 뒤져야 한다."

"사찰 말씀이십니까? 불가에서 어찌 초석을 가지고 있단 말입니까?"

"사찰은 면세 구역이다. 또한 향을 피우고 불상을 금박으로 도금하며, 가죽을 가공하는 염색업을 독점하고 있지. 결정적으로, 그들은 전국의 수많은 신도에게서 시주라는 이름으로 온갖 물화를 빨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염초(초석)의 원료가 되는 질산나트륨과 가죽 무두질용 화합물이 대량으로 유입된다. 절간의 마구간과 해우소 밑바닥 흙을 파내어 정제하면, 송나라에서 들여오는 것보다 수십 배 많은 천연 초석을 얻을 수 있다."

한이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의 명민한 머리가 왕선의 의도를 즉각 파악했다.

"그들이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 창고 깊숙이 은닉해 둔 원료들을…… 합법적으로 몰수하시겠다는 뜻이군요."

"그렇다. 법과 제도는 지키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적의 목을 조르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니까."

"참으로 지독한 계산법이로군."

연기 자욱한 계곡 입구에서 묵직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선이 고개를 돌렸다. 잿빛 연기를 헤치고 한 노인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도포 차림에 평범한 유학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그 눈빛만큼은 수십만 대군을 호령하는 명장의 그것처럼 깊고 날카로웠다.

서경의 방비를 점검하기 위해 조정에서 비밀리에 내려온 중추사, 강감찬이었다.

"나라의 종실이라는 자가 불법으로 사철을 녹이고 가마를 터뜨리더니, 이제는 부처의 도량까지 털어 불 지르려 하는가?"

강감찬의 목소리에는 뼈가 있었다. 그의 뒤로는 삼엄한 기세를 풍기는 호위 무사 서넛이 병장기에 손을 얹은 채 대기하고 있었다.

왕선은 예법을 갖춰 읍하는 대신, 품에서 서경 병기창의 세입 명세가 적힌 가죽 첩을 꺼내 들었다.

"중추사 대감. 오랜만에 뵙습니다만, 쓸데없는 예법과 훈계는 생략해 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제 가슴뼈가 부러질 듯 아파서 긴말을 나눌 여유가 없어서 말입니다."

"이 오만무도한 놈이……!"

호위 무사가 칼자루를 쥐며 앞으로 나서려 하자, 강감찬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강감찬은 왕선의 흙빛이 된 안색과 입가에 묻은 핏자국을 유심히 살폈다.

"네놈이 이곳에서 기이한 짓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이 허물어진 흙더미가 거란의 20만 대군을 막아줄 방책이란 말이냐? 요나라의 철기병은 하북의 송나라 성벽마저 부순 자들이다. 겨우 무너진 쇠가마 따위로 사직을 지키겠다고?"

왕선이 차갑게 실소를 터뜨렸다.

"요나라 철기병의 평균 장갑 두께는 2.5밀리미터에서 3밀리미터 사이입니다. 말의 가슴을 덮는 마갑까지 합하면 총중량은 400킬로그램에 육박하지요. 이것들이 시속 40킬로미터로 돌격해 올 때 발생하는 운동에너지는 약 2만 4천 줄(Joule)입니다. 현재 고려군이 보유한 청동 검이나 활로는 이 에너지를 상쇄하는 것이 불리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대감의 노련한 전술로도 백성들의 시체로 산을 쌓지 않고서는 그 돌격을 멈출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강감찬의 미간이 좁혀졌다. '운동에너지', '줄'이라는 생경한 단어들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차가운 수치의 위압감은 뼛속 깊이 와닿았다.

"하지만."

왕선이 무너진 가마에서 흘러나온 쇳물 덩어리를 흙발로 짓밟으며 말을 이었다.

"제가 설계한 고탄소 백선철 포탄은 폭발 시 매초 800미터의 속도로 파편을 비산시킵니다. 단 한 발의 포격으로 반경 15장 이내의 모든 생명체를 찢어발길 수 있지요. 2만 줄의 돌격 에너지를 수백만 줄의 폭발력으로 분쇄하는 것. 이것이 제가 계산한 유일한 전쟁의 해법입니다."

"그 화포라는 것을 만들려면…… 저 절간의 흙이 필요하다는 말이냐?"

"흙이 아니라 그 밑에 묻힌 초석입니다. 광명사는 매년 송나라 상인들과 밀거래를 하며 수천 근의 염초를 수입해 지하 창고에 은닉해 왔습니다. 불상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면세를 받아 가면서 말입니다. 이는 명백한 국법 위반이자 탈세입니다."

왕선은 한이린을 바라보았다. 한이린이 기다렸다는 듯 소매 안에서 장부를 꺼내 보였다.

"광명사가 지난 3년간 서경 세무소에 제출한 도금용 원료 대장과, 저희 안변 한씨 상단이 파악한 실제 수입량의 차이입니다. 정확히 오천 사백 근의 염초가 장부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는 조정의 허가 없이 사찰이 군수 물질을 무단으로 축적한 반역죄에 해당합니다."

강감찬의 눈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그는 왕선이 단순히 미친 기술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법과 제도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권모술수 가문 출신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불가의 반발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광명사는 서경 호족들의 위패를 모신 원찰(願刹)이다. 그들의 사병 역할을 하는 승병만 해도 수백에 달해. 조정조차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곳이다."

"조정이 손대지 못한다면, 제가 대행하겠습니다."

왕선이 강감찬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태조 대왕께서 세우신 '훈요십조'와 '사찰 군수물 무단 축적 금지원칙'을 적용하면, 사찰의 면세 특권은 그 즉시 박탈됩니다. 또한 현종 황상께서 내리신 서경 방비 전권 밀조가 제 손에 있습니다. 군령으로 이들을 압수수색하는 것은 완벽한 합법입니다."

"네놈은…… 처음부터 이 폭발을 예견하고 사찰을 칠 명분을 쌓아둔 것이냐?"

"우연을 믿는 것은 무능한 자들의 핑계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와 확률의 계산 하에 움직입니다."

왕선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온기도 없었다. 오직 철저한 효율과 국익, 그리고 생존을 위한 기계적 연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강감찬은 잠시 침묵하다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좋다. 내 네놈의 그 오만한 계산이 맞는지 지켜보마. 군령장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중추원의 도장을 찍어주지. 단, 실패한다면 네 목숨은 물론이고 안변 한씨 가문 전체가 대역죄로 멸문지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거래 성립이군요."

왕선은 고맙다는 인사조차 건네지 않고 즉시 몸을 돌려 가마터의 장인들을 소집했다.

"가마 복구 작업과 동시에 광명사 지하 창고 습격을 가동한다. 움직여라."

* * *

서경의 밤은 차가웠다.

사직단 뒤편 계곡에서 횃불을 밝힌 군사들과 야철소 사병들이 광명사의 무거운 목조 정문을 부수고 들이닥쳤다.

쾅!

"황상의 밀조와 중추원의 군령이다! 광명사 지하의 모든 밀수품과 염초를 압수한다!"

왕선의 우렁찬 외침이 법당의 고요를 깨뜨렸다. 장인들과 사병들이 쇠지렛대를 들고 법당 바닥의 거대한 불상 뒤편, 비밀 지하 통로의 입구를 사정없이 찍어 내렸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돌판이 들어 올려지자, 지하 창고에 가득 쌓인 거대한 나무 상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를 쪼개자 백색의 결정체들이 횃불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천연 초석이었다. 그 양은 언뜻 보아도 수천 근에 달했다.

"찾았다."

왕선의 눈이 번뜩였다. 이 정도 양이면 서경 병기창의 모든 화포를 한 달 내내 쏘아대고도 남을 화약을 제조할 수 있었다.

"이 무도한 도둑놈들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부처님의 도량에서 칼을 휘두르는 가!"

그때, 지하 창고 입구와 법당 주변의 어둠 속에서 횃불이 일제히 켜졌다.

스스스슥!

어둠 속에서 나타난 자들은 가사를 걸쳤으나 머리를 깎은 승려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는 잘 갈아진 월도(月刀)와 쇠사슬, 그리고 은빛으로 빛나는 철퇴가 들려 있었다. 광명사가 사유 재산과 밀수품을 지키기 위해 육성해 온 사찰의 무장 승병들이었다.

그 수만 해도 어림잡아 쉰 명이 넘었다. 그들의 눈에는 자비 대신 날카로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황상의 군령이라 한들, 우리 광명사의 물건에는 손을 댈 수 없다! 당장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가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부처님의 법벌을 내릴 것이다!"

거대한 철퇴를 어깨에 멘 거구의 승병 대장이 이빨을 드러내며 가마 수리 장비와 초석 상자 사이에 서 있는 왕선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쉰 명의 승병들이 병장기를 부딪치며 왕선과 한이린, 그리고 몇 안 되는 야철소 사병들을 겹겹이 포위해 들어왔다.

서늘한 쇠 냄새가 법당 가득 진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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