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실 왕선은 들으라!"
최기의 앙칼진 목소리가 서경 야철소의 잿빛 공기를 갈랐다. 가죽 주머니를 쥔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으나, 기고만장한 조소만큼은 감추지 못했다. 말 등에 올라탄 채 아래를 내려다보는 최기의 눈빛은 이미 승리를 거머쥔 사냥꾼의 그것이었다.
왕선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뜨거운 화덕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야철소 마당, 사방에 흩어진 철재 찌꺼기들이 붉은 저녁노을을 받아 핏빛으로 빛났다.
[심박수: 147 bpm] [경고: 심근 과부하 임계치 도달 32% 전] [대상 분석: 어사인(御使印) 날인 가죽 주머니. 봉인 상태 양호. 내부 조서 규격 확인 중……]
뇌리 속에서 차가운 청색 광선이 교차하며 눈앞의 최기와 그가 든 문서를 육안 너머의 영역까지 분해해 들어갔다. 왕선의 호흡은 오히려 느려졌다. 모든 상황을 수치와 인과율로 치환하는 그의 차가운 머리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 선 한이린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감각계의 가장자리에서 감지되었다. 안변 한씨 가문의 명예를 뿌리째 뒤흔드는 파혼이라는 단어는, 이 시대의 여식에게 단순한 결별이 아닌 사회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어찌 무릎을 꿇지 않는가!"
최기가 가죽 주머니에서 황색 비단으로 감싼 교지를 꺼내 들며 호통쳤다.
"황상의 밀조다! 종실의 신분으로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심산이냐!"
"밀조라."
왕선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황제의 권위를 대하는 신하의 두려움 따위는 털끝만큼도 섞여 있지 않았다. 섭씨 1,200도의 용융액을 다룰 때처럼, 오직 물리적 사실관계를 확인하려는 기술자의 건조함만 가득했다.
"그 가죽 봉투에 찍힌 어사인의 낙인, 그리고 비단의 규격을 보니 참으로 정교하군. 채충순 부사가 중추원의 권력을 동원해 황상의 조령을 급히 받아내느라 꽤나 재물을 부린 모양이다."
"무슨 망발을! 감히 황상의 친필이 담긴 조령을 모독하려 드느냐!"
최기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왕선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최기의 말머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미세한 오차도 없었다. 한 걸음의 보폭은 정확히 이 자(尺) 두 치.
"모독이라니. 나는 그저 고려의 법 제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왕선이 최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공학 연산계가 추출해 낸 고려의 율령 데이터가 그의 망막 위에 조목조목 나열되었다.
"고려국 건국 이래, 태조 성헌대왕께서 공표하신 훈요십조 제10조와 성종 12년에 수립된 대령(大令)에 따르면, 종실의 혼맥과 영지 몰수는 반드시 세 가지 영(令)을 거쳐야 한다. 어사대의 공식 탄핵 상소, 중추원 소속 승선들의 연서(聯署), 그리고 종실을 관장하는 문종 조 이전의 구례에 따른 종실 가문의 합의서다. 최 도사, 네놈이 들고 있는 그 종이쪼가리에 어사대의 연서와 중추원 판사의 서명이 모두 찍혀 있느냐?"
최기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가 가져온 것은 조정의 공식적인 절차를 거친 교서가 아니었다. 채충순이 사적으로 현종을 알현해 고려의 장래를 걱정하는 척하며 받아낸 일방적인 '사조(私詔)', 즉 밀조에 불과했다. 정식 조칙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문서는 법적인 강제력을 지닐 수 없었다.
"이, 이것은 황상께서 친히 내리신 밀조이거늘! 어찌 일개 종실이 절차를 따지며 조령을 멸시한단 말이냐!"
"절차를 따지지 않는 권력은 참람한 찬탈에 불과하다."
왕선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고려 조정은 가문들의 연합체다. 황제라 할지라도 법과 구례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방적 명령으로 종실의 영지를 빼앗고 가문의 정혼을 찢을 수는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오늘 밤 당장 채충순의 가문 역시 황상의 말 한마디로 가산이 몰수되고 온 가족이 노비로 전락해도 할 말이 없겠군. 네놈은 지금 황상을 법을 초월한 독재자로 만들어, 고려의 모든 문벌 귀족을 잠재적 역적으로 규정하는 불충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무, 무슨……!"
최기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왕선이 제시한 논리는 고려 조정의 지배 구조인 호족 연합체의 역린을 정확히 건드리는 것이었다. 만약 사적인 밀조 하나로 종실의 사유 재산과 혼맥을 박살 낼 수 있다면, 전국에 널린 호족들의 광산과 사병 역시 언제든 황제의 붓끝 하나에 날아갈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는 채충순을 지지하는 문벌 귀족들조차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맹점이었다.
그때,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한이린이 차갑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고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은 어느새 사라지고, 눈동자에는 지독할 정도의 영민함이 서려 있었다.
"도사께서는 안변 한씨 가문을 너무 우습게 보신 듯합니다."
한이린이 예법에 맞춰 손을 모았으나, 그 자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최기를 압도했다.
"저희 가문이 비록 서경의 변방에 처해 있으나, 대대로 사직을 위해 군마를 바치고 국경을 지켜온 공신 가문입니다. 가주의 서명과 동의가 없는 정혼 단절은, 황실이 공신 가문의 명예를 무참히 짓밟는 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채 부사께서 이토록 무리한 밀조를 청탁하신 이유가 정녕 사직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 가문이 소유한 사철산의 이권을 독식하기 위함입니까?"
"한 소저! 감히 조정의 중신을 무고하려 드는가!"
"무고라니요."
한이린이 소매 안에서 자그마한 한지 두루마리를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최기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것은 채 부사의 가신들이 우리 가문의 광산 경계선에 사사로이 말뚝을 박고, 황실의 명을 사칭해 철광석의 반출을 막으려 했던 일자별 기록입니다. 서경의 안무사조차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더군요. 황상의 밀조가 내려지기도 전에 이미 사유 재산을 강탈하려 모의한 정황이 이토록 명백한데, 이를 어찌 사직을 위한 공무라 하겠습니까?"
왕선과 한이린의 협공은 빈틈이 없었다. 왕선이 고려의 대법전과 구례라는 거대한 명분으로 최기의 발목을 묶자, 한이린은 실제적인 이권 침탈의 증거를 들이밀며 채충순 가문의 탐욕을 천하에 폭로한 것이다.
주변에서 눈치를 보던 압류군 사병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그들 역시 지방 호족들의 사병이거나 서경의 하급 군졸들이었기에, 사유 재산 침탈이라는 공통의 위협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단체로 역모를 꾀하려는구나!"
최기가 채찍을 내리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왕선은 눈동자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망막 위로 새로운 연산 정보가 떠올랐다.
[정보 업데이트: 요나라 밀정 '소태안'의 서신 경로 추적 완료] [연결점: 채충순 가문의 서경 대리인 이영보] [내용: 서경 야철 장악을 전제로 한 요나라 측의 세폐 인상 조율 및 국경지대 철광 유출 묵인 협약]
왕선은 사전에 수집해 둔 이 치명적인 정보를 꺼내 들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모든 전쟁과 정치는 수치와 효율의 싸움이며, 상대의 가장 약한 연결고리를 끊어내는 것이 가장 빠른 해결책이었다.
"최 도사."
왕선이 품속에서 붉은 비단실로 묶인 밀서를 꺼냈다. 그것은 요나라 간첩단의 국내 밀정들이 채충순 세력에게 비밀리에 접촉해 보낸 서신이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 그것이 무엇이기에……."
"요나라 성종 야율융서의 친위 세력이 서경의 야철 장인들과 철광석을 확보하기 위해, 개경의 특정 가문과 접촉한 기록이다. 그 서신에 적힌 수신인의 이름이 참으로 흥미롭더군. 중추원 부사 채충순의 서경 대리인, 이영보의 직인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으니 말이다."
야철소 마당에 찬바람이 들이쳤다. 사병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거란과의 전쟁이 폭풍처럼 다가오는 시국에, 요나라 밀정과 내통했다는 증거는 가문의 멸족을 의미했다.
"채 부사가 이 서경의 야철소를 그토록 탐낸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황상의 눈을 가리고, 종실의 혼맥을 끊어 나를 변방으로 쫓아낸 뒤, 이 고순도 철산과 제철 기술을 요나라에 통째로 넘겨주려 한 부역의 증거지. 건국 조령의 황족 혼인 조례까지 제멋대로 흔들어가며 이권을 탐한 자가 누구인지, 이제 명백해지지 않았는가?"
왕선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강철 침처럼 죄인들의 심장을 찔렀다. 최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 고삐를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왕선이 제시한 밀서의 존재는 그 자체로 채충순 세력의 목을 조르는 외통수였다. 그것이 진짜든, 왕선이 정교하게 설계한 덫이든 간에, 이 자리에서 밀조를 집행하려 들다가는 자신들이 먼저 반역죄로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내, 내가 어찌 이를 알겠느냐! 나는 그저 중추원의 명을 수행했을 뿐……!"
최기가 말머리를 돌리려 했다. 허둥지둥 도망치려는 꼴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돌아가서 채 부사에게 전하라."
왕선이 최기를 향해 마지막 경고를 던졌다.
"이 왕선의 철은 고려의 사직을 지키는 칼이 될 것이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도적들에게는 그 가문을 베는 작두가 될 것이다. 감히 다시는 이 계곡에 발을 들이지 말라."
최기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채찍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대여섯 명의 사병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계곡 입구로 황급히 퇴각했다. 그들이 흘리고 간 황색 비단 교지는 붉은 흙바닥 위를 뒹굴었다.
야철소에 모여 있던 장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대군장님 만세!" "안변 한씨 가문 만세!"
장인들의 환호성이 계곡을 메웠다. 한이린은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깊은숨을 내쉬며 왕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왕선은 여전히 감정의 동요가 없는, 차갑고 거대한 강철 가마와 같았다. 아랫사람들이 목숨을 건 싸움에서 이겼다고 환호하는 순간에도, 왕선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저 상황이 종료되었음을 뜻하는 수치적 안정만을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것으로 당분간 채충순이 관군을 동원해 방해하진 못할 것입니다."
한이린이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그들은 곧 다른 음모를 꾸밀 터. 서경의 야철 가마를 하루빨리 완성해 실질적인 결과물을 내놓아야 조정을 완전히 침묵시킬 수 있습니다."
"당연한 소리."
왕선이 가마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전쟁은 명분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물리적인 질량과 화력으로 끝나는 법이다. 예법의 틈새를 이용한 장난질은 이번 한 번으로 족하다. 이제 진짜 강철을 뽑아내야……."
바로 그때였다.
야철소 저편, 서경 사직단 뒤편의 비밀 계곡 방향에서 하늘을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땅이 미세하게 흔들렸고, 먼 산의 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올랐다.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고압의 가스가 가마의 벽을 찢고 분출될 때 발생하는 특유의 파열음이었다.
"무, 무슨 소리냐!"
장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직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왕선이 독자적인 흙법 제철 가마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극비리에 건설 중이던 황토 고로가 있는 자리였다.
저 멀리 계곡 사이로 시꺼먼 매연과 함께 붉은 화염이 솟구치는 것이 보였다.
[위험: 비밀 야철장 제1호 황토 고로 이상 고온 감지] [압력 수치 임계치 돌파: 240% 부하] [돌발 분쇄 폭발 발생 완료]
왕선의 뇌리 속 연산계가 붉은 경고등을 미친 듯이 깜빡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한 통증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대군장님! 대군장님!"
비밀 야철장을 지키던 청지기가 피범벅이 된 채 계곡 언덕을 굴러 내려왔다. 그의 옷자락은 검게 그을려 있었고, 얼굴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사직단 뒤편... 황토 고로가... 연기를 뿜더니 완전히 분쇄 폭발해 버렸습니다! 가마를 지키던 장인들이 무너진 황토 더미와 쇳물 아래 깔렸습니다!"
청지기의 비보가 야철소의 환호성을 단숨에 지옥의 비명으로 바꾸어 놓았다. 왕선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그의 망막 위에 미세한 산소 균열 징조가 기록되어 있던 지난날의 연산 데이터가 불길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 * *
**[고려사(高麗史) 권 兵器志 요약]** 현종 원년 11월, 종실 왕선이 안변 한씨 한이린과 함께 어사대 및 중추원의 법적 오류를 들어 황상의 밀조를 파기하니, 채충순의 수하들이 감히 대적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로써 사철산의 소유권을 온전히 보존하였으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경 사직단 뒤편에 세워둔 기이한 황토 가마가 돌연 폭발하여 무너져 내렸다. 쇳물이 사방으로 넘쳐흐르고 수많은 장인이 더미에 깔리니, 왕선의 공업 대업이 시작부터 미증유의 난관에 봉착하였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