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사흘 뒤 밤, 개경 연경궁(延慶宮)을 둘러싼 장벽 너머로 차가운 북풍이 몰아쳤다.

기주성에서 거란의 화공 화차를 가루로 만들고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말을 달려 당도한 개경이었다. 왕선은 안장 위에서 가슴을 짓누르는 둔탁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뇌리 깊은 곳에서 차가운 기계음과 함께 붉은색 반투명 연산계 경고창이 어른거렸다.

[경고: 심실세동 위험 감지.] [심근 손상도: 14.2%] [잔여 수명: 117일 12시간]

오버클록의 대가는 뼛속까지 시려 오는 오한과 심장을 쥐어짜는 압박감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왕선은 입가에 고인 핏방울을 소매로 닦아내며 품속의 자개 상자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 안에는 요나라 황제의 국새가 찍힌 고려 귀족들의 내통 맹약서가 들어 있었다.

"군후, 몸을 더 추스르셔야 합니다. 서경에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하셨습니다."

어둠 속에서 가죽 갑옷을 갖춰 입은 한이린이 다가와 그의 고삐를 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염려와 단호함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시간이 없다."

왕선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차가웠다.

"채충순이 이끄는 사병들이 황궁의 신문고와 건덕전 후원을 장악하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나라 군세가 구주에서 지체되는 것을 보고 급해진 것이다. 황제를 내세워 강화를 맺고 우리를 반역자로 몰아 처단하려 하겠지. 1분 1초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다."

"안변 한씨의 사병 삼백 명이 이미 장화전(長和殿) 후방의 통로를 차단했습니다. 채충순의 사가에서 움직인 사병 무리는 약 오백. 무장의 수준은 조잡한 가죽 찰갑에 연철 도검이 전부입니다."

한이린은 품에서 개경 도성의 수비 병력 배치도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은 황제를 감금하려는 채충순의 사병대가 진입하는 외곽로였다.

"가자. 법과 제도의 허울을 쓰고 사직을 팔아넘기려 한 자들의 목을 거둘 시간이다."

왕선의 명령에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서경의 철갑 기병들과 한이린의 가솔들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건덕전 서편 모퉁이, 횃불을 죽인 채 은밀히 황제의 침소로 향하던 채충순의 사병대장 임의는 눈앞에 나타난 거대한 철갑의 무리를 보고 숨을 들이켰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서경 병기창에서 주조한 탄소강 흉갑을 입고, 장포신 수화총(手火銃)을 겨눈 왕선의 정예병들이었다.

"움직이면 사살한다."

왕선의 냉혹한 선언과 함께, 수화총의 약실에 장전된 황색 화약의 매캐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번졌다. 임의는 검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도 사방을 포위한 안변 한씨의 기사들과 서경군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 * *

같은 시각, 연경궁 인근의 비밀 객관.

중립을 유지하며 조정의 향방을 살피던 문벌 귀족의 거두, 문하시중 대숭림(大崇林)은 제 발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온 한이린과 왕선을 바라보며 찻잔을 든 손을 부르르 떨었다.

"군후…… 서경의 방어선을 버리고 어찌 이 야삼경에 개경에 나타나신 게요? 이는 명백한 군율 위반이자, 황명 없이 군사를 움직인 대역죄-"

"대감."

왕선은 대숭림의 말을 자르고 품에서 가죽 문서를 꺼내 탁자 위에 던졌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가죽 문서의 하단에는 요나라 황제 야율융서의 친필 인장과 함께 익숙한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대숭림은 안경을 고쳐 쓰고 문서를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의 노안이 경악으로 찌그러졌다.

"이, 이것은…… 거란과의 맹약서가 아닌가! 채충순 이자가 정녕 제정신이 아니었단 말인가!"

"채충순뿐만이 아닙니다."

한이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대숭림의 시선을 가로챘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황실의 생리를 꿰뚫는 예리함이 담겨 있었다.

"대감의 방계 가문인 대가(大家)의 인장도 여기 찍혀 있군요. 거란군이 서경을 함락하면 개경의 성문을 열고 황제를 폐위한 뒤, 서경 이북의 땅을 할양하는 대가로 가문의 영지를 보존받기로 약조하셨더군요."

대숭림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왕선이 뿜어내는 기계적인 안광에 압도당해 다시 주저앉았다.

"대감의 가문 전체를 반역죄로 삼족을 멸하는 것은 내게 아주 쉬운 일입니다."

왕선이 차갑게 말했다. 그의 뇌리에서는 이미 대숭림의 가문이 가진 사유 광산의 매장량과 인력 수송 비용의 연산이 끝난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비효율적인 학살을 즐기지 않습니다. 대감께서 지금 이 순간부터 채충순을 조정에서 철저히 고립시키고, 그를 지지하는 호족들의 연판장 지분을 모조리 회수해 오십시오. 그리하면 대감의 가문은 이 맹약서에서 이름이 지워질 것입니다."

"그, 그것이 정녕 가능하겠소?"

"선택은 대감이 하시는 겁니다. 가문의 멸문지화냐, 아니면 채충순을 제물로 바치고 살아남느냐."

대숭림은 마른침을 삼켰다. 왕선의 눈빛에는 타협이나 자비가 없었다. 오직 철저한 계산과 이익의 교환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알겠소. 내 당장 날이 밝는 대로 채충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서경군에 대한 군량 조달을 방해하던 호족 가문들의 자금줄을 동결하겠소."

한이린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맹약서 원본을 거두었다. 조정의 권력 구도가 단 한 장의 문서로 인해 완전히 재편되는 순간이었다.

* * *

그러나 승전의 기쁨이 개경에 닿기도 전에, 서경에서 급파된 전령이 헐떡이며 연경궁의 편전에 들이닥쳤다.

"보, 보고드립니다! 구주 통과에 실패한 거란의 태황 야율융서가 격노하여, 압록강 인근에 대기 중이던 철갑 기마 정예군 20만을 모조리 집결시켰습니다! 황제가 직접 주력을 이끌고 남하를 강제 가속화하고 있으며, 그 선봉이 이미 청천강을 넘었다 하옵니다!"

편전에 모인 대신들이 비명을 지르며 웅성거렸다.

야율융서가 고려의 신형 화포에 일격을 맞고도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전군을 총동원해 고려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결사항전의 기세로 밀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20만의 강철 기마 군단은 고려의 사직을 통째로 짓밟기에 충분한 규모였다.

"군후, 어찌해야 합니까? 20만이라니요……!"

신료들이 왕선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왕선은 대답 대신 황궁의 조례를 펼쳤다.

"왕실 종친의 권한으로 개경 도성방위사령권을 발동한다. 채충순을 지지하며 군량과 철광석을 은닉하던 가문들은 지금 즉시 반역 공모죄로 체포한다."

"군후! 아직 채충순의 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거늘, 어찌 사사로이 군을 움직여 사대부의 가문을 짓밟으려 하십니까!"

채충순의 측근인 평장사 박충경이 소리를 질렀다.

왕선은 그를 향해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성벽으로 가자."

왕선의 명령에 따라 서경에서 끌고 온 신형 서경포(西京砲) 4문이 개경의 남대문 성벽 위로 방렬되었다. 80밀리미터 구경의 청동-강철 하이브리드 포신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포구 주위로 장약의 무게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서경 병기창의 장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목표, 남대문 외곽 2리 밖의 황무지 바위 언덕."

왕선이 공학 연산계를 가동했다.

[목표 거리: 1,200m] [풍향: 북서풍 4m/s] [앙각 조정: 12.4도] [장약량: 4.5kg 고밀도 초석 화약]

"사격 개시."

포수가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쿠우우웅-!*

개경 도성 전체를 흔드는 거대한 폭음과 함께 포구가 치명적인 화염을 뿜어냈다. 성벽 아래에서 시위를 벌이던 호족들과 채충순의 사병들이 귀를 막고 비명을 지르며 땅에 엎어졌다.

수 초 뒤, 1,200미터 밖의 거대한 바위 언덕이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며 사방으로 돌가루를 흩뿌렸다. 밤하늘을 수놓은 붉은 화염은 개경 천지에 왕선의 압도적인 무력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다음 포탄의 낙하 지점은 채충순의 사가와 그 동조 가문들의 장막이 될 것이다."

왕선이 차갑고 건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지금 즉시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거부하는 가문은 삼족을 멸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군비로 충당하겠다."

성벽 아래에 있던 호족들과 사병들은 무기를 버리고 무릎을 꿇었다. 왕선의 무자비하고 압도적인 기술 치트 앞에, 천 년을 이어온 귀족의 권위는 단 일격에 분쇄되었다. 반역을 모의하던 호족 가문 전원에 대한 일망타진이 단 하루 만에 완료되는 순간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 연경궁 지하의 깊은 감옥.

쇠사슬에 묶여 피투성이가 된 채 벽에 기대어 있던 채충순은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왕선을 향해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그의 입술은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고, 관복은 찢겨 나가 흉물스러웠다.

"왕선……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감히 법도를 무시하고 사대부를 이리 가두다니! 하늘이 네놈의 무도함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다!"

왕선은 채충순의 눈앞에 가죽 맹약서를 떨어뜨렸다.

"법도를 논하기 전에, 네놈이 요나라 황제와 나눈 이 거래장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탄소 함량도 맞추지 못하는 저질 연철 검을 쥐여주며 백성들을 사지로 몰고, 뒤로는 가문의 안위를 위해 영토를 팔아넘기려 한 효율 제로의 쓰레기 같은 계획을 말이다."

"크윽……!"

채충순은 맹약서를 보며 피눈물을 흘렸다. 가문의 영광과 고려의 기존 질서를 지키려 했던 그의 모든 계획이 왕선이라는 기계적인 괴물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너는 죽는다, 채충순. 네놈의 자산과 광산은 모두 서경 병기창의 국유 자산으로 환수되어 거란을 격멸할 화포의 철광석으로 쓰일 것이다."

왕선이 뒤를 돌아 감옥을 나가려 할 때였다.

채충순이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크게 소리쳤다.

"하하하! 으하하하! 왕선, 네놈이 그 알량한 구멍 뚫린 포신과 얇은 탄창 화포로 거란의 대군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왕선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무슨 소리지?"

채충순이 이빨 사이로 피를 흘리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은간사(銀間社)의 첩자들이 네놈의 그 오만한 도면을 그냥 가져간 줄 아느냐! 요나라의 천자, 야율융서께서는 이미 네놈의 화포가 가진 한계를 알고 계신다! 네놈의 얇은 강철판 탄창과 약한 포신을 일격에 무력화할 특수 동갑 중철기(銅甲 重鐵騎)가 이미 완성되어 남하하고 있단 말이다! 네놈의 불벼락도 그 두꺼운 구리 장갑 앞에서는 한낱 불꽃놀이에 불과할 것이다!"

왕선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7화에서 스파이를 통해 입수했던 '야율융서의 특수 화공 방조용 찰갑 조립 밀서'의 내용이 뇌리 속 연산계의 데이터 시트와 겹쳐지며 빠르게 계산되기 시작했다.

구리 합금을 덧댄 이중 장갑 기병. 화포의 충격파를 분산시키고 열전도를 차단하는 특수 방호 구조.

[연산 시뮬레이션 가동.] [기존 80mm 유탄의 관통 확률: 24.1%] [적 중장갑 돌파 시 아군 방어선 붕괴 확률: 81.3%]

심장이 다시 한번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왕선은 가슴을 움켜쥐며 차가운 감옥의 벽을 짚었다. 거란의 태황 야율융서는 고려의 기술을 역이용해, 왕선의 목을 조여올 최종병기를 완성해 밀고 내려오고 있었다.

*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 삼 권 - 현종 신해년 정월 기록 요약** *종실 왕선이 개경에 급거 입성하여 내통의 증좌를 폭로하니, 문하시중 대숭림 등이 굴복하여 참판 채충순을 탄핵하였다. 선이 남대문 성벽 위에서 신형 서경포를 쏘아 백 리 밖의 산돌을 가루로 만드니, 도성의 반역 호족들이 겁에 질려 전원 투항하였다. 채충순을 옥에 가두고 그 가산을 몰수하여 서경 병기창의 군비로 삼았으나, 거란의 주력 20만이 특수한 귀갑(龜甲) 장갑을 갖추고 청천강을 건너오니 온 나라가 다시금 전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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