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극도의 고압 정제로 인해 노즐의 냉각수가 완전히 소모됨.] [장포 제2호, 제3호 내부의 열기 급팽창 감지.] [야철 포신 합금 인장 강도 한계치 도달. 마이크로 균열 급속 확산 중.] [예상 완전 폭발까지 남은 시간: 15초.]
머릿속을 가차 없이 짓누르는 붉은 경고등이 시야를 온통 진흙탕처럼 어지럽혔다.
화약의 폭발 압력을 견뎌내야 할 야철 포신이 용암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표면의 미세한 틈새로 푸르스름한 가스가 새어 나오는 모습이 왕선의 동공에 박혔다.
"군후! 피하셔야 합니다! 포가 울부짖고 있습니다!"
야장두가 쇠망치를 내팽개치며 왕선의 도포 자락을 잡아끌었다. 장인들의 얼굴은 이미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사직단 고로가 붕괴했을 때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들이었다. 화포가 터진다면 이 협곡에 자리한 백여 명의 병사와 장인 모두가 쇠파편에 찢겨 걸레짝이 되리라.
왕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다리는 대지에 뿌리를 내린 듯 요지부동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피비린내가 치밀어 올랐다. 심근 손상도 14퍼센트.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기계적 통증이 전신을 엄습했으나, 그는 연산계를 강제로 오버클록했다.
[물리적 열응력 분포 연산 개시.] [포강 내벽 온도: 840℃. 인장 허용 응력: 120MPa까지 급감. 폭발 임계점 12초 전.]
"물러서지 마라."
왕선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죽음을 앞둔 이의 음색치고는 기이할 정도로 평온하여, 오히려 주변의 비명을 얼려 붙였다.
"일반 물을 붓지 마라. 열충격으로 포신이 즉시 파열한다. 저기 궤짝에 든 청정 배합수를 가져와라."
"예? 그것은……."
"산성 석회와 소금, 그리고 피마자유를 달여 만든 배합수다. 표면 장력을 낮추어 열을 균일하게 빼앗는다. 가마 뒤편의 고압 분무관을 연결해 우측 3분 처에 안개처럼 분사하라. 당장!"
야장두는 군후의 서슬 퍼런 안광에 압도당해 발을 움직였다. 가죽 주머니에 담긴 특수 냉각수가 동관 노즐을 통해 벌겁게 달아오른 포신 표면으로 뿜어졌다.
치이이이익!
귀를 찢는 고주파의 마찰음과 함께 백색 증기가 폭포수처럼 피어올랐다. 차가운 물줄기를 직접 들이부었다면 유리의 균열처럼 갈라졌을 야철 합금이, 균일하게 분사되는 침투 배합수의 완충 작용 덕에 서서히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포강 내벽 온도 420℃로 급강하.] [열응력 집중 해소. 마이크로 균열 진행율 1.8%에서 고정.] [위험 수준 경고 해제. 격발 가능 상태로 회복.]
왕선은 소매 끝으로 입가에 번진 붉은 혈흔을 닦아냈다. 심장을 찌르던 둔탁한 통증이 가라앉자, 비로소 전방의 풍경이 명확히 들어왔다.
저 멀리 계곡 입구에서 거란의 장수 소율이 이끄는 후속 기병 이천 기가 말의 고삐를 죄며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기주성 남문 외곽의 흙먼지가 하늘을 가릴 듯 솟구쳤다.
그때, 거란군이 대열을 정비하는 틈을 타 계곡의 험준한 사잇길에서 요란한 수레바퀴 소리가 울렸다. 가파른 절벽 길을 타고 내려오는 일련의 마차 행렬이었다.
"군후! 수송대입니다! 안변 한씨 상단의 깃발입니다!"
전령의 외침에 왕선이 고개를 돌렸다.
가장 앞선 마차의 마부를 자처한 이는 다름 아닌 한이린이었다. 흙먼지로 범벅이 된 비단옷을 입은 그녀가 고삐를 움켜쥔 채 마차를 급정거시켰다. 그녀의 등 뒤로 수십 대의 수레가 꼬리를 물고 진지 안으로 밀려들었다.
"늦지 않았군요."
한이린이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뺨에는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손끝은 고삐에 쓸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서경 야철소에서 정제한 고밀도 흑색화약 이십 포와 군량 마차 서른 대입니다. 개경의 감시망을 피해 험로를 우회하느라 가솔들이 꼬박 사흘을 자지 못했습니다."
"잘했다."
왕선은 격려의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다만 수레에 실린 화약 상자의 건조 상태를 검지 끝으로 만져볼 뿐이었다.
"수분 함량 3% 미만. 황과 초석의 배합이 정밀하군. 이린, 너의 계산법이 상단의 목숨을 구했다."
"군후의 도면과 수치 명세서가 워낙 정교하여 어리석은 장인들도 틀릴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보다 몸은 괜찮으신지요?"
한이린의 영민한 눈동자가 왕선의 창백한 안색과 입가의 혈흔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왕선의 비밀을 아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가 이 가공할 기술을 부릴 때마다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사소한 소모다. 전장에서는 오직 승리만이 신체를 보존하는 유일한 방책이지."
왕선은 화약 상자를 야장들에게 넘기며 차갑게 지시했다.
"2호와 3호 장포에 즉시 장약을 적재하라. 거란의 본대가 움직인다."
한이린이 가져온 군량과 화약은 성내에서 농성하던 고려군 수비대에게 마른하늘의 단비와 같았다. 굶주림과 거란의 철기병에 질려 있던 병사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험로를 뚫고 들어온 구원 물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아군의 전의를 한계치까지 이끌어올렸다.
한편, 기주성 전방 삼 리 밖 요나라 본영.
황금빛 군막 앞, 거대한 군마 위에 올라탄 요나라 황제 야율융서가 서경포가 뿜어낸 연기를 매서운 눈초리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백전노장 소배압이 호위하고 있었다.
"저것이 송나라의 화약 무기더냐?"
야율융서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가 있었다.
"송의 화투(火投)나 화창(火槍)은 소리만 요란할 뿐, 우리 친위대의 찰갑을 뚫지 못한다. 허나 저 무기는 단 한 발로 소율의 철장 수레를 박살 내고 백여 기의 마갑을 찢어발겼다. 고려 놈들이 미증유의 사격기를 숨겨두고 있었군."
소배압이 말의 고삐를 당기며 아뢰었다.
"폐하, 저 무기는 발사 후 재장전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쇠를 달구어 쏘는 방식이니 필시 열기를 식히는 틈이 필요할 터입니다."
야율융서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지당한 분석이다. 아무리 대단한 신기(神器)라도 쏘지 못하면 고철에 불과하지. 전군에 명하라. 화공 면실(棉絲)을 두껍게 두른 화차를 전면에 세우라. 불길과 기름을 먹인 면실이 저들의 시야를 가리고 탄환의 기세를 꺾을 것이다. 그 뒤로 정예 기마 삼천 기를 종대로 밀착시켜 일격에 성벽을 무너뜨린다."
둥! 둥! 둥!
거란군의 군고가 기주성 벌판을 뒤흔들었다.
요나라 군의 진형이 좌우로 갈라지더니, 전면에 거대한 목제 화차 수십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차의 전면 방패판에는 기름을 흠뻑 먹인 면실 다발이 쇠사슬로 촘촘히 엮여 있었다. 그 화차들이 일제히 불을 머금으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자욱한 검은 연기와 함께 거란의 정예 기병 삼천 기가 화차의 뒤를 단단히 엄호하며 돌격을 개시했다.
땅이 울렸다. 말발굽 소리는 천둥 같았고, 화차가 토해내는 매캐한 연기가 고려군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군후! 적들이 화공 화차를 앞세워 아군의 사선을 가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조준이 불가능합니다!"
수비대장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왕선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두 눈이 기하학적 궤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관통 지오메트리 연산 가동.] [적 화차 전면 면실 두께: 12인치. 완충 계수: 0.45.] [적 정예 기병의 장갑: 수냉식 찰갑. 경도 45HRC, 그러나 내부 인성(Toughness) 극히 취약.] [결론: 단순 구형 탄환은 면실의 완충력에 무력화됨. 회전 토크를 극대화한 나선형 관통 탄두 필요.]
왕선은 허리춤에서 거란 첩자들에게 탈환했던 강철 배합 도면의 주석을 떠올렸다. 그 도면의 정수는 단순히 강한 철을 만드는 데 있지 않았다. 철의 탄소 함량을 조절해 외강내유(外剛內柔)의 나선 탄환을 주조하는 비법이 담겨 있었다.
"마환 탄환(磨環 彈丸)을 장전하라."
왕선의 명령에 야장들이 구석에 비치되어 있던 기이한 형태의 철환을 꺼내 들었다. 표면에 정교한 나선형 홈이 파여 있고, 앞부분이 송곳처럼 뾰족한 백색주철 탄환이었다.
"포신 내부의 청동 강선과 탄환의 홈이 맞물려 격발되는 순간 고속 회전할 것이다. 면실의 섬유 조직을 찢어발기며 관통하는 회전 토크(Torque)를 계산했다."
왕선은 포신 뒤편의 격발 장치를 직접 잡았다.
"조준점, 적 화차 대열의 정중앙 연결부. 거리는 사백 보."
거란의 화차와 기병 연대가 이백 보 앞까지 육박했다. 화차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의 열기가 성벽 위까지 닿을 듯했다.
"지금이다. 격발."
쿠구구구궁!
서경포 두 문이 동시에 대지를 찢는 포효를 질렀다.
포신을 떠난 두 발의 마환 탄환은 음속을 가볍게 돌파했다.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고막을 마비시켰다.
회전력을 극대화한 마환 탄환은 적들이 자랑하던 기름 먹인 면실 방패판에 부딪치는 순간, 거대한 회전 톱날처럼 변했다. 질긴 면실 다발이 단 1밀리초 만에 사방으로 갈갈이 찢겨 날아갔다. 화차의 두꺼운 참나무 판재는 회전하는 철환의 운동 에너지를 이기지 못하고 폭발하듯 비산했다.
"무엇이냐!"
화차 뒤를 따르던 거란 기병들의 눈이 경악으로 뒤집혔다.
방패막이가 순식간에 사라진 자리에, 초속 수백 미터로 회전하는 백색주철 탄환이 들이닥쳤다.
퍼어억! 퍼버버벅!
요나라 성종이 자랑하던 친위대의 수냉식 찰갑은 표면만 단단할 뿐, 고속 회전하는 탄환의 종파 충격을 견디지 못했다. 탄환이 찰갑 표면에 닿는 순간, 강철 찰갑 조각들이 마치 깨진 유리창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무사들의 가슴과 목을 관통했다.
그것은 단순한 관통이 아니었다. 인성이 약한 철갑이 스스로 붕괴하며 아군을 살상하는 부메랑이 된 것이다.
탄환은 멈추지 않고 종대로 밀착해 있던 기병 삼천 기의 대열을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한 줄로 늘어선 말과 무사들이 한꺼번에 꿰뚫리며 붉은 선혈의 분수가 계곡을 물들였다. 단 두 발의 마환 탄환이 지나간 자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고기와 철편의 구덩이로 변했다.
"이…… 이럴 수가…… 신벌이다! 강철의 신벌이야!"
소율은 공포에 질려 말에서 떨어졌다.
무적을 자랑하던 요나라의 정예 기병 삼천 기가 단 몇 초 만에 먼지처럼 사라진 광경은 인간의 전술을 초월한 영역이었다.
"퇴각하라! 퇴각하라!"
거란의 생존자들이 무기를 내팽개치고 북쪽을 향해 미친 듯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주성 벌판에는 주인을 잃은 군마들과 거란군의 군기가 널브러져 있었다.
고려군의 함성이 협곡을 가득 메웠다. 야장들과 백성들은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왕선은 여전히 포신 옆에 서서 식어가는 서경포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창백했으나, 눈빛만큼은 강철과 같이 단단했다.
"이린."
"예, 군후."
"적의 본영이 버리고 간 군수품과 마차를 수색하라. 소율이 황급히 도망치느라 지휘관 마차를 버려두고 갔다."
한이린은 왕선의 의도를 즉각 알아차리고 가솔들을 이끌고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반각쯤 지났을까. 적의 지휘관 마갑 마차를 수색하던 한이린의 손길이 멈추었다. 마차 내부의 비밀 수납장 깊은 곳에서 정교하게 칠해진 자개 상자 하나가 발견되었다. 상자의 전면에는 요나라 황제의 인장인 거란 국새의 붉은 낙인이 찍혀 있었다.
"군후, 이것을 보십시오."
한이린이 상자를 들고 성벽 위로 올라왔다.
왕선은 상자의 잠금장치를 손끝으로 가볍게 부수고 내부의 가죽 문서를 꺼내 들었다.
문서를 펼친 왕선의 안광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종이 위에 쓰인 글씨는 요나라 황제 야율융서의 친필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고려 조정의 최고위 귀족들의 서명과 수결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고려 성황 조정 내통 귀족 대상 극비 종전 맹약서]**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서경을 함락하는 즉시, 개경의 문벌 귀족들이 황제를 유폐하고 강화를 요청할 것이며, 그 대가로 서경 이북의 땅을 요나라에 영구 할양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내통자 명단의 가장 첫머리에는 선명한 글씨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門下侍郞 平章事 蔡忠順(문하시랑 평장사 채충순).**
한이린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이것은…… 단순한 내통이 압니다. 사직을 통째로 넘기려 한 대역죄의 증좌입니다."
왕선은 맹약서를 천천히 접어 품에 넣었다. 그의 입꼬리가 냉혹하게 올라갔다.
"채충순, 네놈이 고려를 팔아 가문의 안위를 사려 했구나."
서경포의 열기는 식었으나, 고려 조정을 피바람으로 몰고 갈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 방금 막을 올리고 있었다.
*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 삼 권 - 현종 신해년 정월 기록 요약** *종실 왕선이 기주성에서 다시 신형 마환탄(磨環彈)을 쏘아 적의 화공 화차와 정예 기병 삼천 기를 일격에 궤멸시켰다. 적의 장수 소율이 군기를 버리고 북으로 달아나니, 우리 군이 적의 마갑 마차를 수습하였다. 그 안에서 요나라 황제의 극비 서신과 개경의 내통자 명부가 나오니, 군후 선이 이를 거두어 품에 비장하고 군을 정돈하였다. 조정의 신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전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