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어전의 대들보가 흔들릴 듯한 소란 속에서, 채충순의 노구는 얼어붙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역반의 명백한 증거가 담긴 연판장이 왕선의 손아귀에서 펄럭이는 순간, 그의 가문이 쌓아 올린 수십 년의 가업은 사상누각처럼 무너져 내렸다. 조정 관료들의 비명과 현종의 탄식이 뒤섞여 이전투구를 이루는 와중에도, 왕선의 시선은 오직 허공의 한 점만을 꿰뚫고 있었다.

망막 위에 붉은 낙인처럼 찍힌 연산계의 경고창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위험: 기주성 요새 외곽 고루, 요나라 선봉 기병단에 기습 돌파당하기 직전.] [예상 완전 함락 시간: 04시간 12분.] [경보: 기주성 함락 시, 혜음사 지하실의 은닉 초석 밭 보급로 영구 차단.]

심장 내부에서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입 안 가득 비릿한 철분이 고였다. 왕선은 소매로 입가에 번진 붉은 흔적을 급히 훔쳐내며, 굳어 버린 어전을 향해 차갑게 읊조렸다.

"전하, 사직의 안위가 경각에 달렸사옵니다. 채충순의 치죄는 의금부와 대간에 맡기시고, 신에게 즉시 서경군과 기주성을 통제할 전권을 내려주소서."

"왕 종실, 지금 적의 오천 기병이 기주성을 두드린다는데 정녕 가겠다는 말이오?"

현종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왕선은 대답 대신 품에서 서경 야철소의 병기 명부를 꺼내 바닥에 내던지듯 펼쳤다.

"지금 가지 않으면, 서경에서 주조한 화포들은 단 한 줌의 화약도 얻지 못한 채 요나라의 노획품이 될 뿐입니다. 허락해 주소서."

말을 마친 왕선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심근 손상도 14퍼센트의 여파는 생각보다 깊었다. 하지만 허약한 육신의 한계를 돌아볼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 * *

사흘 뒤, 기주성 남쪽 십 리 요새 초입.

말의 발굽이 얼어붙은 진흙탕을 짓밟을 때마다 둔탁한 소리가 대기를 찢었다.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왕선의 곁으로, 안변 한씨 가문의 사병들을 이끌고 합류한 한이린이 말을 바짝 붙였다. 그녀의 고운 뺨은 칼바람에 붉게 터져 있었으나, 눈동자만큼은 얼음판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군후(君侯), 건원사(乾元寺)의 승려들이 철문을 걸어 잠그고 조정을 비판하며 버티고 있사옵니다. 태조 대왕께서 내리신 사급 사찰의 면세 특권을 내세우며, 군사의 진입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습니다."

왕선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기주성 요새의 배후에 위치한 건원사는 단순한 불교 사찰이 아니었다. 4화에서 채충순 일가의 탈세 경로를 추적하던 중 점찍어 두었던, 거대한 은닉 초석 밭이 숨겨진 지하 창고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사찰의 면세 혜택이라."

왕선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고려의 법률에 명시된 '국경 비상시 군수 물자 강제 징발 조례'는 태조의 훈요십조보다 상위에 존재한다. 불법으로 초석을 은닉하여 화약 원료를 밀거래한 자들이 불법(佛法)을 논하는가."

절 문 앞에 도달하자, 황색 가사를 걸친 주지 승려가 수십 명의 승병을 거느린 채 장봉을 들고 길을 막아섰다.

"이곳은 황실의 원당이거늘, 어찌 군화발로 성스러운 도량을 더럽히려 하십니까! 당장 물러가시옵소서!"

왕선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품에서 채충순의 서명이 날인된 압수 수색 영장과 황제의 어인을 찍은 군령장을 낮게 흔들었다.

"건원사는 지난 삼십 년간 매년 오백 석의 소금을 불교 의례용이라 속여 수입한 뒤, 사찰 지하실의 건조한 지열을 이용해 고순도의 초석을 불법으로 제조, 유통했다. 이는 단순한 탈세가 아니라 병기 제조업의 조정을 사유화하려 한 반역죄에 해당한다."

"무, 무슨 터무니없는 모함을……!"

"또한 고려 형법 제십조, '전란 시 군량 및 군수 기밀 원료를 은닉한 자는 삼족을 멸하고 그 자산을 군문에 귀속한다'는 규정을 적용하겠다. 비켜라. 거역하는 자는 적국 요나라와 내통한 세작으로 간주하여 즉시 목을 벨 것이다."

왕선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타협도 없었다. 그의 기계적인 수치주의는 사찰의 권위나 승려들의 신앙심 따위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초석 수량이 초당 몇 그램의 연소 속도를 보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계산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군사들은 들어라. 지하실의 철문을 부수고 초석을 전부 끌어내라."

"예!"

도끼와 쇠지렛대가 건원사의 불전 지하 철문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문이 떨어져 나가자, 어둠 속에서 퀴퀴하고 알싸한 냄새가 뿜어져 나왔다.

[연산계 가동. 화학 물질 성분 분석 개시.] [질산칼륨(KNO3) 함량: 68.4%. 수분 함량: 12.1%.] [정제 소요 시간 연산: 강제 탄화법 적용 시 2시간 15분.]

"시간이 없다. 가마를 걸고 물을 끓여라!"

왕선이 직접 지하실로 걸어 들어갔다. 흙바닥 여기저기에 하얗게 피어난 초석의 결정들이 횃불 빛을 받아 은빛으로 일렁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백색 가루를 찍어 혀끝에 대었다. 짭조름하면서도 혀를 찌르는 강렬한 산미가 느껴졌다.

"석회와 목화재(木灰)를 가져와라! 물의 온도를 팔십 도 선으로 유지하며 불순물을 침전시킨다. 정제되지 않은 초석은 연소 시 다량의 잔여물을 남겨 포신을 막히게 한다. 반드시 이 자리에서 재결정화를 마쳐야 한다."

"하지만 군후, 적들이 기주성 요새의 이선 방어선까지 육박했다 하옵니다!"

한이린이 다급하게 보고했다. 왕선은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연산계의 수치를 응시했다.

"강감찬 장군이 보낸 지원군은 어디쯤 와 있는가?"

"장군께서 직접 이끄는 오백의 별동대가 이미 기주성 동문 관문에서 적의 선봉대를 가로막았사옵니다. 허나, 오천의 기병을 상대로 오백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왕선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수치상으로 오백 명의 보병이 오천 명의 중장기병을 개활지에서 막아내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적의 사거리 진입을 늦추고 초석 정제 시간을 벌기 위해, 강감찬은 백성들의 피로 시간을 사고 있는 것이었다.

"오백 명의 목숨값이다."

왕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바친 분(分)과 초(秒)를 단 일 찰나도 낭비해선 안 된다. 화재의 칼륨 성분 배합비를 정확히 일점 오 배로 늘려라. 수분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도 급격한 폭발력을 얻을 수 있도록 질량비를 75대 15대 10으로 고정한다."

그의 손끝이 정제 가마의 표면 온도를 짚었다. 손바닥의 감각 수용체를 통해 들어오는 열역학 수치를 뇌 속의 공학 연산계가 실시간으로 소수점 셋째 자리까지 조율했다.

[경고. 단시간 내 격렬한 뇌파 사용으로 심박수 145회 돌파.] [심부 온도의 급격한 상승 검출. 각혈 위험도 증가.]

"하아, 윽……!"

왕선은 가슴을 쥐어짜며 무릎을 꿇었다. 목구멍을 타고 가쁜 숨과 함께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한이린이 비명을 지르며 그의 어깨를 부축하려 했으나, 왕선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건드리지 마라.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석회수를 더 부어라! 불순물이 침전되는 속도를 높여야 한다!"

그의 안광은 광기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승리에 대한 집착이 아닌, 설계를 완성해야만 하는 공학자의 냉혹한 집념이었다.

* * *

같은 시각, 기주성 동쪽 관문 계곡.

"밀리지 마라! 뒤는 서경이다! 우리가 무너지면 서경의 삼십만 권속이 거란의 말굽 아래 짓밟힌다!"

강감찬의 호통소리가 계곡의 칼바람을 뚫고 울려 퍼졌다. 그의 갑주는 이미 적의 피와 아군의 피가 뒤엉켜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오백 명의 고려 보병들은 거대한 참나무 방패를 서로 맞댄 채, 요나라 기병들의 가공할 돌격을 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쿠구구구구!

대지가 흔들렸다. 거란의 선봉장 소율(蕭律)이 이끄는 정예 마갑 연대는 말과 무사 모두가 두꺼운 철제 찰갑으로 무장한 괴물들이었다. 그들이 한 번 달릴 때마다 고려군의 방어선은 수십 보씩 뒤로 밀려났다.

챙강! 콰드득!

창날이 부러지고 방패가 박살 나는 비명이 사방에서 고막을 찢었다.

"장군! 서쪽 보루가 뚫렸습니다! 적들이 철제 충각 수레를 끌고 본영 문전까지 들이닥쳤습니다!"

부장의 처절한 외침에 강감찬은 이가 부러져라 악물었다. 요나라 군세의 선두에는 십여 마리의 힘센 군마가 끄는 거대한 '철제 고성능 충각 수레(鐵裝衝角車)'가 서 있었다. 송나라 기술자들을 징발해 제작한 그 공성 병기는 앞부분이 두꺼운 강철 판으로 덮여 있어, 화공(火攻)이나 화살 따위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으아아악!"

충각 수레의 거대한 쇠말뚝이 기주성 본영의 외곽 성문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쿠콰쾅! 대포 소리와도 같은 파괴음과 함께, 수백 년간 기주성을 지켜온 해묵은 참나무 성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돌격하라! 고려인들의 목을 베어 성벽에 걸어라!"

소율이 백도(白刀)를 치켜들며 포효했다. 요나라 기병들이 부서진 성문 틈새로 썰물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성벽 뒤 공터에 기이한 형상으로 거치되어 있는 세 문의 거대한 쇳덩어리였다. 그것은 서경 야철소에서 밤을 새우며 주조해 낸 신형 '강철 장포(鋼鐵長砲)'였다.

그리고 그 포신 뒤에, 창백한 안색의 왕선이 서 있었다. 그의 입가에는 아직 굳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조준각 하향 삼 도."

왕선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차분했다.

"장약 충전 완료."

"군후! 정제가 너무 급박하여 화약의 온도가 아직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포신 내부의 열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야철소 야장(冶匠)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으나, 왕선은 연산계의 붉은 경고를 수치로 읽어 내려갈 뿐이었다.

[경고. 포신 내부 온도: 섭씨 185도.] [화약 임계 발화 온도 접근 중. 강제 발사 시 포신 파열 확률 34%.]

거란의 충각 수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삼십 보 앞까지 짓쳐 들어왔다. 말들의 거친 콧김과 번뜩이는 찰갑의 금속 광택이 왕선의 망막에 고스란히 담겼다.

"발사해라."

왕선이 명령했다.

화동(火童)이 횃불을 도화선에 갖다 대었다.

쉬이이익! 치지직!

찰나의 정적이 흐른 뒤, 천지를 개벽하는 듯한 대폭음이 기주성 요새 전체를 뒤흔들었다.

콰아아앙!

포구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화염과 백색 연기가 계곡을 가득 메웠다. 정제법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고밀도 흑색화약의 폭발력은 이전의 조잡한 화약과는 궤를 달리했다. 포신을 떠난 수십 개의 강철 산탄(霰彈)과 백색주철 포탄이 공기를 찢는 파열음을 내며 요나라 기병들의 대열을 정면으로 관통했다.

퍼억! 퍼버벅!

가장 앞서 달리던 충각 수레의 두꺼운 철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그 뒤를 따르던 거란 기병들의 말들이 다리가 잘려 나가며 앞으로 처박혔고, 찰갑으로 무장한 무사들의 신체가 고속으로 회전하는 강철 파편에 무참히 찢겨 나갔다.

단 한 발의 사격으로, 기주성 본영을 가득 메웠던 요나라의 철기 대열 선두가 붉은 선혈의 계곡으로 변했다.

"이, 이것이 무슨 역량인가……!"

말에서 떨어져 흙바닥을 구른 소율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수냉식 찰갑이 허무하게 뚫려 나간 광경은 유목민들의 상식을 완전히 초월한 지옥도였다.

그러나 승리의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전, 왕선의 머릿속에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삡! 삡! 삡!

[위험! 극도의 고압 정제로 인해 노즐의 냉각수가 완전히 소모됨.] [장포 제2호, 제3호 내부의 열기 급팽창 감지.] [야철 포신 합금 인장 강도 한계치 도달. 마이크로 균열 급속 확산 중.] [예상 완전 폭발까지 남은 시간: 15초.]

"군후! 포신이…… 포신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포가 터집니다!"

야장의 비명과 함께, 강철 장포의 외벽이 용암처럼 붉은 빛을 띠며 미세하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거란의 후속 기병 이천 기가 아직 살아남아 무기를 치켜들고 돌격을 준비하는 상황이었다.

왕선의 시야가 붉게 물들며,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수명이 깎여 나가는 고통 속에서, 그는 붉게 달아오른 포신을 응시했다.

*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제 삼 권 - 현종 신해년 정월 기록 요약** *종실 왕선이 기주성에서 군을 이끌고 거란의 정예 마갑 오천 기와 대치하였다. 선이 건원사의 은닉한 초석을 징발하여 신형 포약(砲藥)을 제조하니, 그 위세가 뇌전과 같아 적의 철장 수레를 일격에 깨뜨렸다. 거란의 장수 소율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을 물렸으나, 우리 군의 야철 포신이 열기를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붕괴할 위기에 처하니, 백성들이 이를 두고 강철의 신벌(神罰)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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