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실 문 위에 붉게 켜져 있던 '수술 중' 표시등이 툭, 소리를 내며 꺼졌다. 동시에 녹색의 '수술 완료' 전광판이 선명한 빛을 뿜었다.
환자 X의 무너진 좌심실벽을 더블 벨루어 데크론 패치(Double-velour Dacron patch)로 완벽히 재건하고 인공심폐기 이탈까지 성공한 직후였다. 수술실 내부에 안도의 한숨이 채 퍼지기도 전, 자동문이 열리며 흘러나온 차가운 공기 너머로 복도의 험악한 고성이 들이쳤다.
"비키세요! 병원 이사회 지시로 나온 보안팀입니다. 한서희 전공의, 당신을 의료기기 납품업체와의 유착 및 병원 내부 기밀 무단 유출 혐의로 긴급 격리 조치합니다."
수술실 초입, 멸균 구역의 경계선에서 한서희가 사설 보안 요원 서너 명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의 얇은 손목 위로 차가운 금속 수갑이 번뜩였다. 서지훈 기획조정실장이 그 뒤편에서 뒷짐을 진 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장 차림으로 오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 실장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한 선생은 방금 끝난 수술의 정식 어시스트였습니다!"
마취과 의사가 소리쳤지만, 서지훈은 대꾸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턱 끝을 치켜세웠다. 보안 요원들이 서희의 가녀린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고 뒤로 꺾으려 들었다. 서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팩트와 수치만을 따지며 늘 차분하게 굴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철컥!
수술실 안쪽의 무거운 납 차폐문이 파괴적인 소리를 내며 박차고 열렸다. 피가 군데군데 튄 초록색 수술복을 입은 백강현이 걸어 나왔다. 아직 멸균 장갑조차 벗지 않은 상태였다.
강현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으려던 사설 보안 요원 한 명의 가슴팍을 어깨로 밀쳐내며, 그는 순식간에 한서희의 앞을 가로막았다.
"손 치워."
강현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뼈를 깎아내는 듯한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백강현 선생, 이건 이사회의 정당한 조치입니다. 비공개 수술 기구 정보를 외부 세력에 흘린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보안 팀장이 강현의 기세에 주춤하면서도 테이저건에 손을 올렸다.
"내가 손 치우라고 했을 텐데."
강현이 한 걸음 더 내딛자, 보안 요원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섰다. 강현은 서희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사내의 손목 관절을 정확하게 내리눌렀다.
아악!
짧은 비명과 함께 사내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강현은 서희를 자신의 등 뒤로 끌어당겼다. 차가운 수술실 바닥 위로 강현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서희는 강현의 넓은 등 뒤에서 비로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백강현.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서지훈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현을 쏘아보았다.
"여기는 내 수술방 앞입니다, 서 실장님. 그리고 내 수술방에 들어온 스태프는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데려갈 수 없습니다."
"허락? 일개 펠로우 분수가 하늘을 찌르는군. 네놈이 방금 살려낸 환자 X가 누군지는 알고나 입을 놀리는 거냐?"
서지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 순간, 참관실 유리창 너머로 취재 열기에 불타오르던 의학 기자들이 복도로 쏟아져 나왔다. 카메라 플래시가 두 사람의 얼굴을 사정없이 비추었다.
"기자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강현이 피 묻은 멸균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지며 기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빛은 매서운 칼날과 같았다.
"방금 성공적으로 끝난 환자 X의 수술은 단순한 난치성 심장 질환 재건 수술이 아닙니다. 이 환자는 한국대학교병원 이사회와 혜화회가 신관 20층 VIP 바벨 워드 극비 격리 구역에서 저질러 온 '미승인 신약 불법 생체 임상 시험'의 명백한 피해자입니다."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복도를 가득 채웠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백강현! 유언비어로 병원의 명예를 훼손한 죄까지 더하고 싶으냐!"
서지훈의 정제된 얼굴에 처음으로 핏대가 섰다.
"유언비어인지 아닌지는 이 내용이 증명해 줄 겁니다."
강현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화면을 터치했다.
"과거 김태섭 전 부원장이 최고급 개인 캐비닛 속 숨겨진 보안 태블릿에 암호화하여 숨겨두었던 리베이트 장부와 비리 문건 전체를 지금 서울중앙지검과 각 언론사 데스크로 동시 전송했습니다. 그 안에는 서지훈 실장 당신이 주도한 불법 임상 시험의 구체적인 대상자 명단과 자금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복도 벽면에 설치된 대형 모니터들이 일제히 깜빡이더니,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비밀 장부의 스캔본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김태섭의 친필 서명과 서지훈의 결재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문서들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강현은 수술 카트 위에 놓여 있던, 찌그러진 독일제 신형 포셉을 들어 올렸다.
"차민우 선생이 내 수술을 방해하기 위해 의료기기 납품업자와 결탁해 고의로 반입한 신형 수술 도구입니다. 이 포셉은 단순한 불량이 아닙니다. 내부 미세 균열을 고의로 방치하여 수술 도중 장력에 의해 부러지도록 정밀하게 가공된 '살인 도구'였습니다. 이 기구의 시리얼 넘버와 납품업체의 리베이트 내역 역시 방금 송부한 파일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백 선생! 그게 사실입니까?" "혜화회가 실제로 환자들을 마루타처럼 사용했다는 건가요?" "이 장부에 적힌 외환 송금 내역은 무엇입니까?"
기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이 아수라장이 된 복도를 찌를 듯 채웠다. 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져 서지훈의 눈가에 허연 잔상이 남았다. 백강현은 뒤틀린 금속 포셉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서지훈의 어깨 너머, 두 명의 거구의 원내 보안요원에게 붙잡혀 있는 한서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뭘 하고 있나! 당장 저 유언비어 유포자와 배임 혐의 기밀 유출자를 격리해!"
서지훈이 핏대를 세우며 고함을 질렀다. 단정한 포마드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 위로 흘러내렸다. 그의 손짓에 보안요원들이 한서희의 가녀린 팔을 억세게 움켜쥐고 비상구 쪽으로 끌고 가려 했다. 한서희의 하얀 의사 가운이 거칠게 구겨지며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
강현의 발걸음이 먼저 반응했다.
그는 한 걸음에 복도를 가로질렀다. 가로막는 기자의 어깨를 거칠게 밀쳐내고, 한서희를 끌고 가던 거구의 요원 앞을 완전히 막아섰다. 강현의 손이 요원의 두꺼운 손목을 움켜쥐었다. 쇠집게 같은 악력에 요원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강현은 요원의 손목을 바깥쪽으로 꺾으며 그대로 밀쳐냈다.
"놔."
낮게 깔린 목소리가 복도의 소음을 일순간 지워버렸다. 강현은 다른 요원의 어깨를 강하게 짚고 중심을 무너뜨린 뒤, 한서희의 어깨를 감싸 제 등 뒤로 당겨 세웠다. 서희의 거친 숨결이 강현의 젖은 수술복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의 넓은 등판이 완벽한 방벽이 되어 그녀를 가로막았다.
"법적 영장도 없이, 병원 사설 보안팀이 현직 의사를 강제로 납치하듯 연행하는 법은 대한민국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없습니다."
강현이 서지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은 메스의 날 끝처럼 차갑고 예리했다.
"기자 여러분, 똑똑히 보십시오. 이것이 혜화회가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무력 진압입니다. 법과 원칙을 운운하던 서지훈 실장이 지금 사설 용역을 동원해 증인을 물리적으로 묵살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 렌즈가 일제히 사설 보안요원들과 서지훈의 일그러진 얼굴로 향했다. 플래시 불빛이 기괴할 정도로 번쩍였다. 서지훈의 개인 비서들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카메라를 가로막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백강현, 네놈이 감히 이사장실의 권한에 대항하겠다는 거냐?"
서지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평소의 냉철한 이성은 껍데기만 남은 지 오래였다. 주먹을 쥔 그의 손끝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권한이라뇨. 지금 무너지고 있는 건 당신들의 썩은 왕국입니다."
강현은 등 뒤의 한서희를 든든하게 지탱하며, 품에서 수술용 라텍스 장갑을 벗어 던졌다. 딱 소리 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고무장갑은 마치 결투를 신청하는 장갑처럼 차가운 침묵을 만들어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언론인 여러분께 선언합니다. 저는 내일 오전, 혜화회가 강제로 폐쇄하고 은폐하려 했던 바벨 워드의 극비 격리 구역에서 불법 임상 시험의 부작용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환자의 재수술을 집도할 것입니다. 이 수술은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생중계될 것이며, 서지훈 실장 당신들이 저지른 범죄의 종지부를 찍는 자리가 될 겁니다."
선언은 엄정했고 잔혹하리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사위가 얼어붙은 듯 고요해졌다. 병원 내부의 공기가 무겁게 침강했다.
서지훈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잘게 떨렸으나, 더 이상 그를 옹호해 줄 명분은 복도 바닥에 흩어진 서류 뭉치와 함께 짓밟힌 지 오래였다. 백강현의 도발적인 수술 선언은 복도에 모인 언론인들의 수첩과 렌즈 위로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새겨지고 있었다.
서지훈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해갔다. 그의 등 뒤에 선 비서가 다급하게 다가와 스마트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실시간으로 병원 노조 웹사이트와 대형 커뮤니티에는 백강현의 라이브 수술 성공 소식과 함께 혜화회의 폭로 문서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었다.
지잉-!
강현의 시야에 푸른빛의 시스템 메시지가 폭발하듯 떠올랐다.
[대중의 신뢰도가 임계치를 초과하여 폭발합니다.] [병원 노조 및 대중 신뢰 포인트 15,000 PT 적립!] [누적 신뢰도 자원: 22,000 PT] [장부 상태: 극도의 흑자 전환] [심장 내막의 영구적 손상 복구율이 15% 상승합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따뜻한 온기가 퍼져 나가며, 수술의 피로와 미세한 통증이 완전히 씻겨 내려갔다. 완벽한 승기였다.
그러나 서지훈은 쉽게 무너질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옷깃을 단정히 여미며 차가운 고소를 지었다.
"백강현. 네가 가진 그 알량한 증거들로 대한민국 의료계를 뒤흔들 수 있을 것 같으냐? 혜화회는 이 병원의 심장이다. 심장이 멈추면 환자들도 존재할 수 없어."
서지훈이 품안에서 빨간색 보안 카드를 꺼내 벽면의 마스터 콘솔에 긁었다.
삐-! 삐-! 삐-!
경고음과 함께 VIP 바벨 워드의 모든 출입구가 육중한 방화벽으로 차단되기 시작했다. 두꺼운 철문이 내려앉으며 복도는 순식간에 폐쇄된 요새로 변했다.
"기자들의 통신을 모두 차단해. 방역 비상사태를 선포한다. 원내에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감염 우려가 발생했으니, 바벨 워드 전체를 영장 없이 잠정 폐쇄한다."
서지훈의 명령에 보안 요원들이 기자들의 카메라를 빼앗고 통신 차단기를 가동했다. 순식간에 복도는 외부와 단절된 무덤처럼 변해버렸다.
"백강현, 그리고 한서희. 너희들의 주치의 자격을 이 시간부로 박탈한다. 너희는 이 차단벽 너머로 단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
사방을 메운 철문들이 육중한 메탈 소리를 내며 완전히 닫혔다. 탈출구는 없었다. 완벽한 고립이었다.
기자들이 당황하여 철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서지훈은 어둠이 내리앉은 복도 끝에서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백강현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느린 미소가 걸렸다. 강현은 서지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품속에서 아직 공개하지 않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서지훈이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혜화회의 임상 시험 자금을 송금받은 외환 거래 내역서의 사본이었다.
"서 실장님. 착각하지 마십시오."
강현의 목소리가 붉은 경고등이 명멸하는 폐쇄된 복도에 나직하게 울렸다.
"내일 오전 9시, 당신들이 자랑스럽게 개최할 이사회 총회 시간에 맞춰 이 바벨 워드 한가운데서 전 세계 의료계에 생중계되는 '하이브리드 완전 수동 수술'을 기습적으로 단독 집행할 겁니다. 도망칠 구멍은 없습니다. 내일, 당신들의 제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십시오."
강현의 선언에 서지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