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붉은색 경고등이 명멸하는 폐쇄된 복도. 서지훈 기획조정실장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강현이 치켜든 외환 거래 내역서 사본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혜화회의 숨통을 끊어 놓을 단두대의 칼날이었다.

"미친놈이... 감히 누굴 협박하는 거냐!"

서지훈이 이빨을 사려 물며 손을 뻗었으나, 강현은 가볍게 몸을 돌려 그 손길을 피했다.

"이 손 치우시죠, 실장님. 내일 오전 9시입니다. 이사들이 모두 모이는 그 시간, 똑똑히 보게 될 겁니다. 당신들이 소모품처럼 쓰다 버리려 했던 그 생명이 어떻게 살아나는지."

강현의 눈빛은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갑고 단단했다.

그날 밤, 바벨 워드는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비상 차단벽이 내려앉아 외부와의 접촉이 완전히 차단된 폐쇄 병동 내부. 하지만 강현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이 거대한 제국의 균열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다음 날 새벽 6시. 이사회 총회를 세 시간 앞둔 시점이었다.

강현은 바벨 워드 안쪽에 위치한 당직실의 낡은 데스크톱 앞에 앉았다. 그의 손에는 작은 USB 메모리가 들려 있었다. 그것은 전 부원장 김태섭이 자신의 파멸을 막기 위해 최고급 개인 캐비닛 속 비밀 금고에 숨겨두었던 보안 태블릿에서 추출한 의료 기기 리베이트 장부와 대리 수술 명부의 복사본이었다. 회귀 전 기억을 더듬어 김태섭의 집무실을 샅샅이 뒤져 확보해 둔 절대적인 치명타였다.

"이걸로 첫 번째 뇌관을 터뜨리지."

강현이 마우스를 클릭했다. 김태섭의 추악한 비리 장부와 함께, 서지훈이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혜화회의 불법 생체 임상 시험 비용을 송금받은 외환 거래 내역서의 일부가 병원 내부망과 이사회 공식 이메일, 그리고 의학 전문 기자들의 메일함으로 일제히 전송되었다.

동시에 바벨 워드의 메인 수술실 중계 서버가 강현의 손끝에서 강제 활성화되었다. 이사회 총회장의 대형 스크린과 전 세계 협력 병원들의 하이브리드 라이브 중계망이 강제로 동기화되는 순간이었다.

오전 8시 30분.

강현은 바벨 워드 최심부에 위치한 극비 격리 구역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한서희가 홀로 환자의 바이탈을 체크하고 있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날 정도로 마른 체구였다. 혜화회의 신약 임상 시험에 강제로 동원되었다가 다발성 장기 부전으로 버려진 불치병 환자, 한서희가 일전에 혼잣말로 가슴 아프게 언급했던 바로 그 '환자 X'였다.

"백 선생, 정말 이 수술을 강행할 생각이에요? 이사회에서 전력을 차단하거나 물리적으로 난입할 수도 있어요. 이건 의사 면허가 아니라 목숨을 거는 짓이에요."

서희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강현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은 이미 소년의 수술 준비를 완벽히 마친 상태였다. 입으로는 만류하면서도 몸은 이미 강현의 뜻을 따르고 있었다.

강현은 나직하게 웃었다.

"한 선생. 의사가 환자를 살리겠다는데 면허가 왜 필요합니까. 면허는 제도가 주는 면죄부일 뿐, 생명을 구하는 건 이 메스입니다."

강현이 소년의 침대를 밀며 메인 중계 룸으로 향했다.

바벨 워드 메인 중계 룸은 사방이 유리로 둘러싸인, 전 세계 의료진이 수술을 참관할 수 있도록 설계된 최첨단 하이브리드 수술실이었다. 수술실 내부로 들어서자, 서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스크럽을 마치고 강현의 오른편에 섰다.

서희는 도주할 기회가 충분했음에도 강현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강현에게 메스를 건넸다. 두 사람 사이에는 긴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오직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묶인 완벽한 정신적 일치였다.

"환자 X, 14세 소년. 진단명은 심장 및 폐, 간의 동시 다발성 기능 상실. 오늘 집도할 수술은 심장-폐-간 동시 다중 장기 이식 수술입니다."

강현의 목소리가 중계 마이크를 타고 전 세계로 흘러나갔다. 이사회 총회장이 위치한 본관 대강당의 대형 스크린에도 강현의 얼굴이 대대적으로 송출되기 시작했다.

총회장 단상에 서 있던 서지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당장 중계 끊어! 보안팀은 뭐 하는 거야! 저 미친놈을 수술실에서 끌어내!"

서지훈이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이사회 장내는 술렁이고 있었다. 혜화회의 비리 장부와 불법 외환 거래 내역서가 담긴 메일을 확인한 이사들은 서지훈을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게다가 전 세계 라이브 중계가 시작된 마당에 물리력을 동원해 수술을 중단시킨다면, 그것이야말로 병원의 파멸을 자초하는 꼴이었다.

수술실 내부. 강현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색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환자 명: 환자 X (이민우)] [현재 생명력: 7%] [다발성 장기 부전 및 심각한 심근 섬유화 진행 중] [수술 성공 확률: 1.2%]

7%라는 극악의 수치. 소년의 심장은 당장 멈춰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신형 수술 도구 세트 가져왔습니다."

어시스트로 참여한 레지던트가 차민우의 조력자인 의료기기 납품업자가 신관에 반입했던 최신형 티타늄 포셉과 리트랙터 세트를 강현에게 내밀었다.

강현은 포셉을 집어 들려다 멈칫했다. 그의 눈에 '생명의 장부'가 제공하는 미세 투시 능력이 활성화되었다. 포셉의 조인트 부분, 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금속 내부에 미세한 균열(Micro-crack)이 가 있었다. 수술 도중 강한 압력을 가하면 그대로 부러져 환자의 대동맥을 찢어발길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차민우가 강현을 수술 과실로 몰아가기 위해 파놓은 마지막 함정이었다.

강현은 포셉을 바닥으로 가차 없이 내던졌다.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수술실에 울려 퍼졌다.

"이딴 쓰레기 도구를 수술실에 들여놓다니. 차민우가 두고 간 모양인데, 당장 치워라. 내부 균열이 가 있는 불량품이다. 전통적인 수동 녹색 포셉으로 가져와."

강현의 서슬 퍼런 일갈에 레지던트가 사시나무 떨듯 떨며 도구를 교체했다. 중계를 지켜보던 기술진과 이사들은 강현의 압도적인 통찰력에 침을 삼켰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미세 결함을 단번에 잡아내는 기량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강현은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현재 보유 신뢰도 자원: 22,000 PT] [장부 소모 제안: '신의 손' 기능 및 '완벽한 정밀 재건' 초인적 기량 활성화] [필요 소모 포인트: 21,780 PT (보유 포인트의 99%)]

'전부 쏟아붓는다.'

강현은 망설임 없이 장부의 소모 탭에 자신의 모든 신뢰 포인트를 밀어 넣었다.

[신뢰도 99% 소모 완료.] [초인적 기량 '신의 영역'이 활성화됩니다. 제한 시간: 45분.] [경고: 포인트 잔량이 극도로 부족합니다. 제한 시간 초과 시 본인의 심장에 심각한 과부하가 발생합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심장이 터질 듯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강현의 눈빛이 황금빛으로 미세하게 빛났다. 그의 손끝에 실린 메스가 소년의 흉골을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미끄러졌다.

"메스."

서희가 묵묵히 도구를 건넸다. 그녀의 정교한 어시스트가 강현의 초인적인 속도를 완벽하게 받쳐주었다.

흉벽이 열리고, 혜화회의 독성 임상 약물로 인해 검게 변해버린 소년의 심장과 폐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폐기 가동합니다. 온혈 정지액 주입."

강현의 지시에 따라 소년의 심장이 멈추고 기계가 그 역할을 대신했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심장, 폐, 간을 동시에 적출하고 새로운 장기를 이식해야 하는, 현대 의학의 한계를 시험하는 대수술이었다.

강현의 손놀림은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정밀한 로봇 팔처럼 움직이며 썩어 들어간 조직을 도려내고, 새로운 장기의 혈관을 연결해 나갔다. 대동맥과 폐동맥의 문합부(Anastomosis)를 한 땀 한 땀 꿰매는 봉합사의 움직임은 잔상마저 남길 정도였다.

"7-0 프롤린(Prolene)."

강현이 나지막이 읊조릴 때마다 서희는 다음 동작을 예측이라도 한 듯 정확한 도구를 손바닥에 얹어주었다. 두 사람의 호흡은 완벽한 하나의 유기체 같았다.

중계 화면을 지켜보던 전 세계의 흉부외과 거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저건 인간의 손놀림이 아니다. - 세 개의 장기를 동시에 이식하면서 출혈이 거의 없다니, 말도 안 돼!

본관 총회장에서 화면을 보던 서지훈은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제국이, 자신이 쌓아 올린 혜화회의 권위가 저 새파란 펠로우 녀석의 메스 끝에서 산산이 조각나고 있었다.

"막아야 해... 어떻게든 저 수술을 멈춰!"

서지훈이 품속의 개인 단말기를 꺼내 시설팀장에게 은밀한 메시지를 보냈다.

[바벨 워드의 메인 전력을 차단해라. 지금 당장.]

수술실 내부.

이제 마지막 심장 조율만이 남은 상황이었다. 강현은 이식된 소년의 심장에 미세한 전기 자극을 가하기 위해 디피브릴레이터(Defibrillator)를 쥐었다.

[환자 생명력: 45%... 60%... 80% 상승 중]

소년의 얼굴에 핏기가 돌기 시작했다. 죽어 마땅하다고 버려졌던 생명이 강현의 손끝에서 다시금 숨을 쉬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차지(Charge) 10줄. 슛."

탁!

소년의 몸이 가볍게 튀어 올랐다. 모니터의 심전도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요동치다, 이내 일정한 파형을 그리며 뛰기 시작했다.

뚜--- 뚜--- 뚜---

"박동 시작했습니다!"

레지던트가 감격에 겨워 외쳤다. 성공이었다. 기성 제도의 가시철망을 뚫고, 오직 환자의 생명만을 바랐던 천재 의사가 일구어낸 기적 같은 승리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탁.

기분 나쁜 금속성 마찰음과 함께, 수술실의 모든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삐이이이------!

인공호흡기와 심폐기, 바이탈 모니터의 비상 배터리가 가동되는 경고음이 어둠 속에서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단순한 일시적 정전이 아니었다. 바벨 워드로 들어오는 고압 중전선 자체를 가위로 자르듯 완벽하게 차단해 버린, 서지훈과 혜화회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정전입니다! 비상 전력도 차단되었습니다!"

수술실은 순식간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한밤중의 어둠 속에 갇혀버렸다. 소년의 가슴은 아직 완전히 봉합되지 않은 채 열려 있었고, 멈췄던 심장은 이제 막 첫 박동을 시작했을 뿐이었다.

완벽한 고립과 암흑.

어둠 속에서 강현의 심장이 다시금 협심증의 격통으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정전입니다! 비상 전원마저 차단됐습니다!"

레지던트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사방을 메운 비상 경고음 사이를 뚫고 나왔다. 암흑이 내려앉은 수술실 안에서 기계들의 붉은 배터리 표시등만이 유령처럼 명멸했다.

강현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왼쪽 가슴을 움켜쥐었다. 심장 내벽을 뜨거운 달군 인두로 지지는 듯한 격통이 뇌척수까지 뻗어 나갔다. 턱 끝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수술포를 적셨다. 99%의 신뢰 포인트를 단번에 밀어 넣으며 육체의 한계를 강제로 초월한 대가였다.

[경고: 생명의 장부 자원 고갈 상태.] [본체의 심장에 급성 관상동맥 수축에 준하는 격통이 발생합니다. 남은 시간: 3분 12초.]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찢어지는 감각이 일었다. 하지만 강현은 메스를 쥔 오른손을 놓지 않았다. 손끝이 잘게 떨렸으나 힘을 빼지 않았다. 지금 손을 때면 소년의 대동맥 문합부에서 분출하는 피가 천장을 적실 터였다.

"한 선생."

강현의 목소리는 모래가 섞인 듯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헤드라이트, 수동 전환해."

서희는 이미 대답 대신 머리에 쓰고 있던 비상용 헤드라이트의 측면 다이얼을 돌리고 있었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백색 LED 불빛이 소년의 열린 흉강을 비추었다. 겨우 반경 10센티미터 남짓한 시야만을 확보할 수 있는 조악한 광량이었다.

"이 시야로는 마지막 결찰(Tie) 부위를 볼 수 없습니다. 자칫 바늘이 관상동맥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바로 심정지입니다!"

레지던트가 겁에 질려 발을 뒤로 뺐다. 그의 숨소리가 어두운 공간에서 거칠게 울렸다.

"비켜."

강현의 음성이 낮게 가라앉았다.

"눈으로 보지 않는다."

강현은 눈을 감았다. 암전된 시야 너머로 '생명의 장부'가 구축해 놓은 정밀한 3D 혈관 지도가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소년의 박동하는 심장 근육의 탄력, 대동맥 외막의 두께, 봉합사가 지나가야 할 미세한 궤적이 손가락 끝의 감각 세포로 고스란히 흘러 들어왔다.

회귀 전, 수천 번의 실패와 피눈물 속에서 완성했던 맹검(Blind) 수술의 감각이었다.

서희는 소리 없이 강현의 오른편으로 더 바짝 다가섰다. 그녀는 강현의 왼손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정확히 포셉의 끝을 고정했다. 차가운 금속이 맞부딪치는 감각을 통해,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하나의 시야를 공유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바늘이 조직을 통과하는 서늘한 마찰음만이 어둠 속에 울렸다. 강현의 손가락이 실을 감아쥐고 미끄러지듯 매듭을 지었다.

첫 번째 타이. 완벽했다.

두 번째 타이. 피 한 방울 비치지 않는 정교한 봉합이었다.

"실 자릅니다."

서희의 가위가 매듭의 끝을 단 1미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잘라냈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오직 강현의 손 움직임과 소리만으로 타이밍을 맞춘 신기(神技)였다.

[환자 생명력: 85%... 88% 상승 중] [심장 활동성 안정화 단계 진입.]

모니터의 심전도 곡선이 마침내 정상적인 파형을 그리며 뚜렷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살았다..."

레지던트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안도의 탄식을 뱉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만끽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스으으윽- 쾅!

수술실 외부의 이중 에어록 문이 수동 유압식 레버에 의해 강제로 열리는 둔탁한 파열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 저편에서 여러 명의 무거운 군화 소리가 수술실을 향해 빠르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사회 명령이다! 불법 수술을 집도 중인 백강현, 한서희를 격리 조치하고 환자를 이송한다!"

서지훈의 사냥개들이 마침내 수술실 문턱까지 들이닥친 것이었다.

동시에 강현의 시야 우측 하단에서 붉은 경고등이 격렬하게 점멸했다.

[제한 시간 초과.] [생명의 장부 페널티가 임계점을 초과합니다. 본체의 영구적 수명 감소 프로세스가 가동됩니다.]

가슴 한가운데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듯한 기괴한 감각과 함께, 강현의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내렸다. 강현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소년의 수술대 위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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