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차민우의 입꼬리가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은빛으로 빛나는 독일제 수술 기구 카탈로그를 내밀어 보이는 그의 손끝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백 과장님. 이 최고의 기구로, 저와 함께 멋지게 환자를 살려보시겠습니까?"

강현의 시야 속에서 붉은색 경고등이 격렬하게 명멸했다.

[경고: 신형 포셉 및 메스 홀더 내부 미세 균열 감지] [수술 도중 고압의 장력이 가해질 경우, 미세 팁이 파손되어 환자의 대동맥 벽을 찢을 위험성 98.7%]

기구의 설계 도면이 3차원 입체 그래픽으로 강현의 뇌리에 박혔다. 중심축을 관통하는 응력 집중 구간에 머리카락보다 얇은 균열이 가 있었다. 강현의 이름이 선명하게 각인된 그 불량 기구 세트는 수술실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될 터였다.

"독일 바이스 메디컬 사의 최신 라이업이군."

강현이 카탈로그를 가볍게 툭 치며 낮게 읊조렸다.

"예, 그렇습니다. 강도가 기존 제품보다 두 배는 높아서 극도의 정밀함을 요구하는 바벨 워드 수술에는 이만한 물건이 없지요. 과장님의 영광스러운 첫 집도를 위해 제가 사비까지 보태며 어렵게 공수해 온 겁니다."

민우의 목소리에는 악의가 섞인 가식이 묻어났다. 수술 중 팁이 부러져 대동맥이 파열되면, 모든 과실은 집도의의 미숙한 손놀림 탓으로 돌아간다. 기구 결함을 입증하기 전에 환자는 수술대 위에서 피를 쏟으며 죽을 것이고, 백강현이라는 이름은 살인마로 낙인찍혀 업계에서 매장당할 터였다.

강현은 민우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거울처럼 맑은 눈동자 뒤에 숨은 잔혹한 집착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좋아. 차 선생 뜻대로 하지."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과장님."

"대신 조건이 있다."

강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 수술, 바벨 워드 컨퍼런스룸과 원내 중계망을 통해 라이브 서저리(Live Surgery)로 진행한다. 의학 전문 기자들과 이사진, 그리고 흉부외과 전원에게 실시간으로 중계하도록 해."

민우의 나긋나긋한 미소가 찰나의 순간 굳어졌다. 주머니 속에서 손톱을 짓이기던 그의 손가락이 멈칫한 것을 강현은 놓치지 않았다.

"라이브… 말입니까? 환자의 프라이버시도 있고, 아직 임상 단계의 술식이라 위험 부담이 큽니다만."

"바벨 워드의 지배권을 증명하려면 이 정도 쇼맨십은 필요하지 않겠나? 서 실장이 원하는 것도 대외적인 성과일 텐데."

강현의 어조는 단호했다. 민우는 침을 삼켰다. 자신이 파놓은 함정이 너무나 완벽하다고 믿었기에, 수백 명의 눈앞에서 백강현이 몰락하는 광경은 오히려 그에게 최고의 독무대가 될 터였다.

"알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지요."

민우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뒤를 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은 승리를 확신하는 자의 가벼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

그날 밤, 과장실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강현은 넓은 가죽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책상 위에 놓인 낡은 태블릿 PC를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복잡한 숫자들과 스위스 은행 계좌 번호, 그리고 전임 과장 김태섭의 서명이 담긴 리베이트 이중 장부가 띄워져 있었다.

김태섭이 자신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최고급 개인 캐비닛 속 비밀 금고에 숨겨두었던 보안 태블릿. 강현은 회귀 전 기억을 되살려 그 암호 체계를 완벽하게 해체하고 이 치명적인 증거를 손에 넣었다.

김태섭은 이미 이 장부의 존재만으로 사지가 묶인 채 과장 직인과 권한을 강현에게 넘겨주고 쫓겨나다시피 물러난 상태였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김태섭 퇴출용 카드가 아니었다. 이 장부의 종착지는 결국 이사장 서지훈과 혜화회의 거대한 자금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서희가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두툼한 환자 차트가 들려 있었다.

"백 과장님. 우현석 환자 정밀 검사 결과입니다."

서희가 차트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 환자… 기억하십니까? 제가 예전에 바벨 워드 극비 격리 구역에서 혼잣말로 언급했던 그 '환자 X'입니다. 서지훈 실장이 주도하는 좌심실 보조장치 임상 시험의 부작용으로 심근 전체가 괴사해 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사실상 현대 의학으로는 생존율이 5%도 되지 않는 불치병 환자예요."

강현은 차트를 넘기며 환자의 심초음파 사진을 응시했다. 좌심실 벽이 종잇장처럼 얇아져 있었고, 박출률은 이미 15%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조금만 압력이 가해져도 심장 벽이 터져 나갈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차민우가 왜 이 환자를 타깃으로 삼았는지 알겠군."

"실패해도 이상하지 않은 환자니까요.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하면 기구 탓이 아니라 환자의 원래 상태가 원인이었다고 핑계를 대기 가 가장 좋은 패입니다. 과장님, 정말 그 기구를 쓰실 생각입니까?"

서희의 눈동자에 짙은 우려가 서렸다. 평소 냉정함을 유지하던 그녀였지만, 이번 수술이 지닌 치명적인 위험성을 직감하고 있었다.

"걱정 마라, 한 선생."

강현이 태블릿을 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파놓은 구덩이가 얼마나 깊든, 그 안으로 처넣어지는 건 내가 아닐 테니까."

***

사흘 뒤 오전 10시. 한국대학교병원 신관 3층 메인 수술실.

수술실 천장에 설치된 고해상도 카메라가 수술대를 다각도로 비추고 있었다. 신관 20층 VIP 바벨 워드 컨퍼런스룸에는 수십 명의 의학 전문 기자들과 병원 이사진, 그리고 흉부외과 전공의들이 빽빽하게 자리를 채웠다. 대형 스크린을 통해 수술실 내부의 일거수일투족이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참관석 맨 앞자리에 앉은 서지훈 실장은 팔짱을 낀 채 차가운 눈빛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그의 곁에 선 비서가 속삭였다.

"실장님, 독일 바이스 메디컬 사의 납품업자가 기구 세팅을 완료했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계획대로 진행될 겁니다."

서지훈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스쳤다. 눈엣가시 같은 백강현을 합법적이고 완벽하게 매장할 판이 마침내 깔린 것이다.

수술실 내부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마취 확인됐습니다. 인공심폐기 가동합니다."

체외순환사들의 분주한 움직임 속에 환자의 가슴이 열렸다. 절개된 흉골 사이로 드러난 우현석 환자의 심장은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좌심실 벽은 누렇게 변색되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조금만 메스를 잘못 대도 그대로 바스러질 것 같은 조직이었다.

"차 선생, 포셉."

강현이 손을 내밀었다.

세컨 서전으로 참여한 차민우가 눈빛을 번뜩이며 간호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간호사는 소독 캔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독일제 신형 포셉을 꺼내 강현의 손바닥에 쥐여주었다.

묵직한 금속의 감촉이 장갑을 타고 전해졌다.

[생명의 장부 가동] [남은 신뢰도 포인트: 8,400 PT] [대상 기구: 바이스 메디컬 신형 정밀 포셉] [실시간 응력 분석: 수술 장력 1.5N 도달 시 중심축 피로 균열부 파단 예측율 99.2%]

시야에 표시되는 붉은색 파단 위험 그래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강현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 기구는 미세 혈관을 봉합하기 위해 메스를 쥐고 힘을 주는 순간, 손잡이와 팁을 연결하는 내부 핀이 부러지도록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었다.

"좌심실 전벽 절제 및 재건 술식 시작한다."

강현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체 중계망으로 울려 퍼졌다.

그는 결함이 있는 포셉을 쥐고 환자의 심장 근육으로 다가갔다. 관람석의 기자들이 숨을 죽였다. 카메라가 강현의 손끝을 극도로 줌인했다.

차민우는 마스크 속으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강현의 손목을 주시했다. 이제 단 한 번의 강한 움켜쥠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

강현이 괴사한 심근 조직을 포셉으로 집어 올렸다. 그리고 정밀 메스 홀더를 쥐고 절개선에 가볍게 힘을 가했다.

봉합을 위해 포셉의 손잡이에 압력이 가해지는 찰나.

잉-.

미세한 진동이 강현의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금속 내부의 결정 구조가 찢어지며 발생하는 초미세 파열음이었다. 수치상 파단까지 남은 시간은 단 0.5초.

강현의 손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는 포셉의 손잡이를 놓는 동시에, 손목의 반동을 이용해 기구를 수술대 아래로 거칠게 팽개쳤다.

깡그랑!

날카로운 금속성 파열음이 마이크를 타고 수술실 전체와 라이브 중계망을 뒤흔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은빛 포셉은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며 두 동강이 나 뒹굴었다. 팁 부분이 완전히 부러져 나간 상태였다.

"어…?"

어시스트를 서던 차민우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게 무슨…!"

참관석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미친 듯이 눌러대기 시작했다.

강현은 바닥에 떨어진 부러진 포셉 조각을 가리키며 마이크에 대고 차갑게 선언했다.

"독일 바이스 메디컬 사의 신형 정밀 포셉. 내부 접합부의 미세 균열로 인한 금속 피로 파단입니다. 방금 수술 장력을 가하는 순간 기구의 팁이 부러졌습니다."

강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만약 제가 이 기구로 환자의 대동맥 벽을 고정한 채 봉합을 진행했다면, 부러진 메탈 팁이 대동맥을 관통하여 환자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겁니다. 수술 장비의 명백한 결함이자 치명적인 불량입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독일 완제품인데 어떻게 그런 결함이…!"

차민우가 당황하여 마스크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차 선생."

강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민우를 내려다보았다.

"이 기구, 차 선생이 내 이름을 도용하여 병원 공식 구매 심의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독점 납품업자를 통해 불법으로 반입한 물건이지? 병원 내부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검증되지 않은 결함 장비를 수술실에 밀어 넣은 이유가 뭔가?"

"그, 그건… 저는 오직 과장님을 위해 최고의 기구를 제공하려 했을 뿐입니다!"

"최고의 기구라니. 팁이 부러져 환자의 대동맥을 찢어발길 기구가?"

강현의 서늘한 일침에 민우는 더 이상 대꾸하지 못했다.

중계 화면을 지켜보던 수십 명의 전공의들과 의학 전문 기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차민우에게 꽂혔다. 원내 중계 게시판에는 실시간으로 불법 로비와 기구 유착 정황을 의심하는 글들이 폭발적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이스 메디컬 한국 지사장을 즉시 원내 윤리위원회와 보건복지부 고발 조치하도록 하십시오."

강현이 참관석의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 불량 기구를 독단적으로 반입하여 환자의 생명을 위협에 빠뜨린 차민우 선생에 대해서는 집도 보조 자격을 박탈하고 현 시간부로 수술실에서 퇴장 조치합니다."

"백 과장님!"

민우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지만, 수술실 보안 요원들이 즉각 안으로 들어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민우는 흙빛이 된 얼굴로 밖으로 끌려 나갔다. 완벽했던 그의 음모가 생중계를 통해 온 천하에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한 선생, 원래 쓰던 국산 정품 일체형 포셉 가져와."

강현의 지시에 한서희가 신속하게 소독된 정품 기구를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수술실 내부의 혼란이 가라앉았다. 이제 남은 것은 심장이 녹아내린 불치병 환자 X의 좌심실을 완벽하게 재건하는 일뿐이었다.

[생명의 장부 활성화] [신뢰도 5,000 PT 소소] [초인적 정밀 재건 능력 가동]

순간, 강현의 가슴 깊은 곳에서 뻐근한 압박감이 치밀어 올랐다. 심장 근육이 미세하게 쥐어짜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이빨을 악물며 통증을 억눌렀다.

시야가 극도로 선명해졌다. 환자의 심근 조직 조직 하나하나가 나노 단위로 분해되어 궤적이 보이기 시작했다.

"Double-velour Dacron patch 준비해."

강현의 손놀림이 차원이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찢어지고 괴사한 좌심실 벽을 도려내고, 인조 패치를 대어 정밀 봉합하는 과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어졌다.

바늘이 조직을 뚫고 지나가는 궤적은 기계보다 정교했다.

참관석의 기자들은 그 경이로운 광경에 탄성을 터뜨렸다. 기구 결함이라는 초유의 위기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신의 경지에 달한 수술 실력을 선보이는 백강현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과도 같았다.

"봉합 완료. 인공심폐기 이탈 준비합니다. 바이탈 확인해."

"바이탈 안정적입니다! 혈압 120에 80, 하트 레이트 75회 유지 중입니다!"

마취과 의사의 고무된 목소리가 수술실에 울려 퍼졌다.

심전도 모니터의 곡선이 규칙적이고 힘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완전히 죽어가던 환자 X의 심장이 백강현의 손끝에서 다시 살아 숨 쉬게 된 것이다.

[퀘스트 완료: 불량 기구 음모 분쇄 및 환자 X 구호 성공] [신뢰도 12,000 PT 획득] [심장 과부하 통증이 소멸하며 생명력이 회복됩니다.]

가슴을 짓누르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맑은 기운이 온몸을 채웠다.

띵-.

수술실 문 위에 설치된 '수술 중' 표시등이 초록색 '수술 완료'로 전환되었다.

참관석에서는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고, 기자들은 헤드라인을 작성하느라 노트북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들겼다. '천재 의사 백

다음 화 계속 보기 →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