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훈의 안경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순간은 기이할 정도로 느리게 흘렀다.
쨍그랑.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무테안경이 처참하게 금 가며 굴렀다. 정적을 깨뜨린 것은 그 가벼운 파열음뿐이었다. 복도에 늘어선 비서들과 보직 의사들은 숨을 들이켠 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누구도 서지훈의 꺾인 고개와 붉게 달아오르는 뺨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병원 권력의 정점, 이사장 서지훈의 안면을 후려친 손길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고, 고문님……?"
서지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뺨을 움켜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안광은 당장이라도 눈앞의 노인을 찢어발길 기세였으나, 입꼬리는 기괴할 정도로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본능적인 분노를 이성이 억누르는 위선적인 미소였다.
"이따위 돌팔이 새끼를 내 몸에 대라고 허락한 게 너였나, 서 실장?"
설창국 고문은 숨을 헐떡이지도 않았다. 칠십을 넘긴 고령에 대수술을 받은 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그의 음성에는 청중을 압도하던 정계 거물의 서슬 푸른 위압감이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저 무능한 놈의 칼끝에 내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 대학병원의 실장이라는 자가, 환자의 생명을 두고 정치질을 해?"
설창국의 마른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는 차민우가 있었다. 차민우는 이미 사색이 된 채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 엄지손톱 밑은 이미 피가 배어 나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자신의 완벽한 수술 계획이, 아니, 백강현을 묻어버리려던 그 정교한 덫이 도리어 자신들의 목을 죄는 올가미가 되어 돌아온 것을 직감한 탓이었다.
"그, 그것은 오해이십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고문님의 안위를……."
서지훈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변명을 시도했다. 하지만 설창국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시끄럽다!"
복도가 울릴 정도의 호통에 서지훈이 입을 다물었다. 설창국은 차가운 가운 자락을 펄럭이며 품 안에서 두꺼운 서류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서지훈의 가슴팍에 사정없이 내던졌다.
퍼억, 소리와 함께 봉투가 터지며 종이 몇 장이 바닥으로 흩날렸다. 그중 가장 두꺼운 종이 상단에 찍힌 붉은 직인과 굵은 서체가 서지훈의 깨진 안경알 너머로 선명하게 박혔다.
[임명장: 흉부외과 과장 겸 VIP 바벨 워드 총책임자 백강현]
"오늘부로 이 병원의 진짜 실세는 백강현 선생이다. 서 실장, 네 놈이 가진 모든 권한을 백 선생에게 이양해라. 이의 있나?"
설창국의 서늘한 질문이 복도를 지배했다.
서지훈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임명장에서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그의 눈이 백강현의 얼굴을 향했다.
강현은 그 모든 난장판을 한 걸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분노도, 환희도 없는 무표정. 그러나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은 철저한 계산 끝에 승리를 거머쥔 사냥꾼의 미소였다.
"……고문님의 뜻이 정 그러하시다면."
서지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뺨의 붉은 자국이 여전한데도, 그의 목소리는 다시 평정을 되찾아 가라앉아 있었다.
"따라야지요. 백강현 선생의 탁월한 실력은 저 역시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절차상의 조율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서지훈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임명장을 직접 주워 올렸다. 그리고 먼지를 털어내듯 종이를 톡톡 친 뒤, 강현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깨진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은 그의 맨눈이 뱀처럼 차갑게 빛났다.
"축하하네, 백 과장. 역대 최연소 바벨 워드 총책임자군."
"과찬이십니다, 실장님."
강현이 임명장을 건네받으며 짧게 대답했다. 서지훈의 손끝이 임명장을 잡은 강현의 손등을 스치듯 지나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
"기대하겠네. 그 자리가 얼마나 무겁고, 또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 곳인지 스스로 증명해 주길 바라지."
서지훈은 그 말을 남기고 뒤를 돌았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보직 의사들과 비서들의 발걸음이 다급하게 멀어졌다. 구석에 서 있던 차민우 역시 강현을 향해 불타는 듯한 증오의 시선을 쏘아 보낸 뒤, 서지훈의 뒤를 쫓아 황급히 사라졌다.
복도에 정적이 찾아오자, 강현의 눈앞으로 푸른색의 빛무리들이 어지럽게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오직 강현의 망막에만 보이는 거대한 장부가 허공에 펼쳐졌다.
[‘생명의 장부(Ledger of Life)’가 동기화됩니다.] [환자 ‘설창국’의 완전한 구호 및 신뢰도 정산] [정계 거물의 극적인 신뢰 자원 유입: +8,500 PT] [바벨 워드 내 대기 중인 VIP 관망자들의 신뢰도 동시 정산: +3,000 PT] [현재 보유 신뢰도 포인트: 12,200 PT]
눈을 의심케 하는 수치였다. 만 단위를 넘어선 포인트가 장부의 흑자 칸을 가득 채웠다. 그와 동시에 장부의 테두리가 황금빛으로 물들며 새로운 메시지가 뇌리를 때렸다.
[신뢰도 누적 기준치 돌파.] [생명의 장부 등급이 상승합니다: ‘숙련가’ -> ‘거장(Master)’] [거장 등급 혜택 개방:] 1. 초인 기량(신의 손) 활성화 시 소모 포인트 30% 감소 및 지속 시간 대폭 연장. 2. 부작용 페널티 완화: 무리한 성능 과부하 시 발생하는 급성 협심증 격통의 역치가 상승합니다. 3. 환자의 미세 병변 및 혈류 흐름 투시 능력 정밀도 향상.
가슴을 찌르던 둔탁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협심증으로 조여들던 관상동맥이 넓어지며 차가운 생명력이 전신으로 뻗어 나가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강현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산소가 이토록 달콤했던 적이 없었다.
"백 선생님."
뒤에서 들려오는 건조한 목소리에 강현은 허공의 장부를 거두며 고개를 돌렸다. 3년차 전공의 한서희가 차트를 가슴에 안은 채 서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평소처럼 냉정했으나, 손끝은 차트 모서리를 강하게 쥐고 있었다.
"축하드려요. 이제 진짜 과장님이시네요."
"축
"축하만 받기에는 상황이 아주 더럽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서희가 목소리를 한 단계 낮추며 강현의 가슴팍에 차트 한 권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강현은 묵직한 차트를 받아 들며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바벨 워드 극비 격리 구역에 있던 환자입니다. 기조실에서 방금 이 환자의 주치의를 백 과장님으로 변경 등록했습니다. 결재 도장도 찍히기 전에 전산부터 넘어왔더군요."
강현이 차트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환자의 이름은 우현석. 서른두 살의 젊은 환자였다. 진단명 칸에 적힌 거친 활자들이 강현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진단명: 확장성 심근병증(Dilated Cardiomyopathy), 약물 유발성 심근 괴사(Myocardial Necrosis)]
"혜화회에서 비밀리에 진행하던 3상 임상 신약의 부작용입니다."
서희가 주위를 살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심장 근육을 강화하겠다며 투여한 신물질이 도리어 심근 세포를 녹여버렸습니다. 현재 심박출률(EF)은 겨우 15% 미만. ECMO(체외막산소공급장치)에 겨우 의지해 목숨만 붙여 놓은 상태입니다. 서지훈 실장이 이 환자를 과장님께 던진 건, 대놓고 무덤을 파라는 뜻입니다."
죽어가는 환자를 넘겨주어 수술실에서 사망하게 만든 뒤, 새로 얻은 과장 자리를 박탈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하려는 서지훈의 독수(毒手)였다.
강현의 눈앞에 다시 한번 장부의 반투명한 스크린이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 '녹아내린 심장'의 구호] - 난이도: 극상(SS) - 제한 시간: 48시간 이내 수술 집도 - 실패 페널티: 신뢰도 10,000 PT 차감 및 급성 심근경색 유발
강현은 차트를 덮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들이받아야지."
"그게 다가 아닙니다."
서희가 차트 맨 뒷장에 숨겨져 있던 얇은 서류 몇 장을 꺼내 강현에게 건넸다. 복사 상태가 불량해 글씨가 흐릿했지만, 상단의 붉은색 워터마크는 선명했다. 다국적 제약사 '메디텍'의 로고였다.
"서지훈 실장이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혜화회의 불법 임상 자금을 송금받은 정황입니다. 가짜 외환 거래 내역서예요. 이 우현석이라는 환자의 임상 실패를 덮기 위해 수십억 원의 뒷돈이 오고 갔습니다. 제가 원내 전산망을 뒤져 겨우 확보한 원본의 일부입니다."
강현의 손가락이 서류 모서리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정보 획득: 서지훈 이사장의 불법 외환 거래 내역 일부] [생명의 장부에 관련 단서가 기록됩니다. 폭로전 돌입 시 결정적 증거로 활용 가능.]
"잘했다, 한 선생."
강현의 나직한 칭찬에 서희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뱉었다. 그녀의 목젖이 크게 요동쳤다. 목숨을 건 내부 고발이었다. 강현은 서류를 가운 안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이건 내가 들고 간다. 자네는 우현석 환자의 실시간 바이탈을 5분 간격으로 내 폰에 전송해."
"알겠습니다."
강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본관 3층에 위치한 흉부외과 과장실이었다.
과장실 문을 거칠게 열자, 먼지 냄새와 함께 짐을 싸고 있던 김태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상자 몇 개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 김태섭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 이 병원의 절대 권력 중 하나였던 사냥개의 비참한 퇴로였다.
"백…… 강현."
김태섭이 이빨을 갈며 강현을 노려보았다. 뺨의 근육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네 놈이 감히 내 자리를 찬탈해? 서 실장님이 널 가만히 둘 것 같으냐!"
"이미 실장님은 자기 코가 석 자이십니다, 과장님. 아니, 이제 전(前) 과장님이시죠."
강현은 김태섭을 지나쳐 방 한구석에 놓인 최고급 개인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김태섭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너, 거기서 뭐 하는……!"
"여기 재미있는 게 들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강현은 주저 없이 캐비닛의 자석식 측면 패널을 강하게 눌렀다. 툭, 소리와 함께 숨겨진 이중 벽이 열리며 검은색 가죽 케이스에 담긴 태블릿 PC가 모습을 드러냈다.
회귀 전, 김태섭이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해 자랑했던 그 비밀 금고였다. '내 목숨줄이자 서지훈의 목을 죌 밧줄'이라며 혀가 꼬인 채 떠들던 기억이 강현의 머릿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 그거 내 놔! 도둑놈 새끼야!"
김태섭이 비명을 지르며 강현에게 달려들었다. 강현은 가볍게 몸을 돌려 그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고 태블릿의 전원을 켰다. 화면에 복잡한 구도의 패턴 잠금 창이 나타났다.
강현의 손가락이 망설임 없이 화면 위를 미끄러졌다. ㄷ자 형태를 두 번 꼬아 만든, 김태섭 특유의 기괴한 암호였다.
띠리링.
잠금이 해제되며 수백 개의 PDF 파일과 엑셀 시트가 화면 가득 쏟아져 나왔다.
[한국대학병원 흉부외과 리베이트 수혜 명단] [서지훈 실장 비공식 비자금 전달 내역] [김태섭 집도 대리 수술 일지 및 합의서]
김태섭의 무릎이 대리석 바닥에 사정없이 꺾였다. 털썩, 소리와 함께 주저앉은 그의 입술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어 어떻게……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 거지? 암호를 어떻게……."
강현은 태블릿을 자신의 가방에 집어넣었다. 회귀 전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더러운 '침묵의 의료 연대'를 완전히 박살 낼 칼날이 마침내 그의 손에 쥐어졌다.
"곱게 나가십시오, 김 교수님. 그래야 법정에서 정상참작이라도 비벼볼 것 아닙니까."
강현의 서늘한 경고에 김태섭은 더 이상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넋이 나간 채 바닥을 긁을 뿐이었다.
강현이 과장실을 나와 복도로 들어선 순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움직였다.
차민우였다.
그는 평소의 나긋나긋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강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서 손톱을 짓이기고 있는 듯, 가운 자락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과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백 선생님. 아니, 이제 과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용건만 해, 차 선생."
강현의 차가운 태도에도 민우는 생글거리며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것은 수술 참여 신청서였다.
"우현석 환자 수술 말입니다. 서 실장님이 제게 세컨 서전으로 들어가라 지시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심장이 다 녹아내린 환자라, 집도 보조가 확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을 품은 뱀이 아가리를 벌리는 듯한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마침 잘된 일이 있습니다."
차민우가 들고 있던 또 다른 카탈로그를 강현의 눈앞에 펼쳤다.
"제 조력자 분께서 이번에 독일에서 직접 들여온 신형 정밀 무균 수술 기구 세트가 있습니다. 미세 혈관 봉합에 특화된 최첨단 장비지요. 과장님의 기념비적인 첫 바벨 워드 수술을 위해, 제가 특별히 과장님 성함을 박아서 수술실에 세팅해 놓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카탈로그에 인쇄된 은빛 메스의 사진을 보는 순간, 강현의 망막에 붉은색 경고등이 점멸했다.
거장 등급으로 진화한 생명의 장부가 기구의 내부 도면을 투시하여 강현의 뇌리에 직접 각인시켰다.
[경고: 신형 포셉 및 메스 홀더 내부 미세 균열 감지] [수술 도중 고압의 장력이 가해질 경우, 미세 팁이 파손되어 환자의 대동맥 벽을 찢을 위험성 98.7%]
차민우가 파놓은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수술 도중 기구 결함으로 환자의 혈관이 터지면, 모든 과실은 집도의인 백강현의 손끝으로 귀결될 터였다.
비열한 덫을 숨긴 채, 차민우는 눈꼬리를 접으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백 과장님. 이 최고의 기구로, 저와 함께 멋지게 환자를 살려보시겠습니까?"
강현의 침묵 속에서, 수술실의 차가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짓누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