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한 선생, 이 기구들을 깨끗이 소독해서 내 개인 캐비닛에 보관해 두십시오. 아주 특별한 순간에 쓰게 될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한서희가 독일제 특주 마이크로 니들 홀더 케이스를 소중히 품에 안고 입꼬리를 올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이이-!

바벨 워드의 고요한 정적을 찢어발기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복도를 타고 격렬하게 몰아쳤다. 신관 20층 천장에 매달린 적색 경보등이 피처럼 붉은 빛을 토해내며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간호 스테이션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붉은색 경고 창을 띄웠다.

"201호 격리실! 환자 바이탈 떨어집니다! 어레스트(Arrest) 가능성 있습니다!"

간호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201호 격리실. 한서희가 일전에 혼잣말로 속삭였던, 이 병동 전체에서 가장 은밀하고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던 불치병 환자 '환자 X'의 거처였다.

한서희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가셨다. 품에 안고 있던 기구 케이스를 쥔 손가락끝이 잘게 떨렸다. 차민우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조심스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한 선생, 기구 내려놓고 당장 따라와!"

강현은 지체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이미 그의 시야 속에서는 201호 격리실 너머로 붉은색 장부가 피처럼 타오르며 경고 수치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상: 환자 X (우병갑, 58세)] [상태: 급성 대동맥 파열 및 저혈량성 쇼크 (Hemorphagic Shock)] [생존 확률: 3.2%] [경고: 180초 이내에 지혈 및 대동맥 차단(Clamping)이 이루어지지 않을 시 사망.]

강현은 바람처럼 복도를 가르며 달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서희가 기구 케이스를 스테이션에 거칠게 내려놓고 그 뒤를 쫓았다. 차민우 역시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허둥지둥 발걸음을 옮겼다.

201호 격리실의 이중 슬라이딩 도어가 열리자마자 비릿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찔렀다.

안쪽은 단순한 병실이 아니었다. 최첨단 수술 장비와 혈관 조영 장비가 결합된 하이브리드 수술실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수술대 위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흡인기(Suction) 더 강하게 걸어! 시야 확보가 안 되잖아!"

수술대 앞에서 피범벅이 된 채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은 차민우의 수술 팀원들이었다. 아니다. 그들의 뒤에서 멸균 가운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내, 차민우의 심복이자 펠로우인 강태윤이 메스를 쥐고 있었다.

"혈압 계속 떨어집니다! 60에 40! 맥박 145회! 이대로는 마취 유지도 안 됩니다!"

마취과 의사의 다급한 외침이 수술실을 채웠다.

강현은 한눈에 상황을 파악했다. 차민우가 백강현의 눈을 피해, 이 바벨 워드의 상징인 '환자 X'를 독점하여 수술하려 했던 것이다. 자신의 입지를 완벽하게 굳히기 위해 무모한 하이브리드 대동맥 스텐트 삽입술(TEVAR)을 시도했으나, 환자의 혈관 상태를 오판하여 대동맥에 천공을 낸 것이 분명했다.

"비켜."

강현이 수술대 앞으로 수성처럼 걸어 들어갔다.

"백, 백강현? 네가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강태윤이 피가 묻은 지침기(Needle holder)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취과, 수액 풀 로드로 공급해. 에피네프린 1엠플 투환하고, 메인 라인 하나 더 잡아."

강현은 그의 폭언을 가볍게 무시하며 마취과 의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마취과 의사는 강현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차트를 조작하며 수액 조절기를 끝까지 열었다.

"이봐! 이건 내 수술이야! 기조실장님과 과장님이 직접 나한테 일임하신 환자라고!"

차민우가 격리실 안으로 뛰어들어오며 강현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와 분노로 뒤섞여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술이 실패했다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순간, 그의 영광스러운 커리어는 완전히 끝장날 터였다.

"네 수술?"

강현의 냉혹한 시선이 차민우의 얼굴에 내리꽂혔다.

"환자 심장이 멈추기 직전인데 내 수술, 네 수술을 따지고 있나? 차 선생, 자네 눈에는 저 피가 안 보이나 보지?"

"이건... 이건 마취과에서 혈압 조절을 못 해서 혈관이 터진 거야! 그리고 기구가 불량이었다고! 기구가 미끄러져서 어쩔 수 없이..."

민우는 패닉에 빠져 주변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바둥거렸다. 비겁하고 추악한 본성이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서 여과 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강현은 이미 피칠갑이 된 환자의 흉부 절개 부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떠오른 생명의 장부가 실시간으로 환자의 내부를 투시했다.

[‘생명의 장부’ 미세 분석 가동.] [사용 중인 도구: 국산 보급형 마이크로 니들 홀더.] [상태: 금속 피로도로 인한 팁(Tip) 부분 미세 균열 92% 진행.] [예측: 다음 봉합 시도 시 팁이 파손되어 상행 대동맥(Ascending Aorta)을 완전히 찢어발길 것임. 대동맥 파열로 인한 즉사 유발율 99.8%.]

강현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강태윤이 쥐고 있는 니들 홀더를 가리켰다.

"그 손에 든 도구, 당장 놓아."

"뭐, 뭐라고?"

"들리지 않나? 그 기구의 조인트 부분에 미세 균열이 가 있어. 그 상태로 한 번만 더 대동맥 벽을 찌르면 팁이 부러지면서 대동맥이 완전히 가로로 찢어진다. 그러면 이 환자는 수술대 위에서 즉사야."

강현의 서슬 퍼런 목소리가 수술실 안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개소리 마! 이게 얼마나 정밀한 기구인데 균열이 가 있다는 거야? 눈에 보이지도 않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

차민우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러나 강현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한 선생."

강현이 뒤에 서 있던 한서희를 불렀다.

"예, 예?"

"이 환자의 진짜 병력을 모두에게 읽어줘. 저 바보들이 숨기려 했던 진짜 차트 내용을."

한서희는 침을 꿀꺾 삼켰다. 그녀는 일전에 바벨 워드의 극비 시스템을 해킹하듯 뒤져 알아내었던 환자 X의 정보를 머릿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림을 억누르며 수술실에 울려 퍼졌다.

"환자... 우병갑. 58세. 단순 대동맥류가 아닙니다. 마르판 증후군(Marfan Syndrome) 환자입니다. 이미 두 차례의 인조혈관 치환술을 받았고, 혈관 벽이 극도로 얇아져서 스텐트 그라프트(TEVAR) 시술은 절대 금기증(Contraindication)에 해당합니다. 혈관 벽이 종잇장보다 얇아서 미세한 자극에도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수술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민우의 안색이 하얗게 흙빛으로 변했다. 마르판 증후군. 유전적으로 결합 조직이 약해져 혈관이 쉽게 파열되는 치명적인 질환. 그런 환자에게 무리하게 스텐트를 밀어 넣으려 했으니 혈관이 버틸 리가 없었다. 그것은 명백한 의료 과실이자 살인 행위였다.

"이, 이 사실을 네가 어떻게..."

강태윤의 손에서 니들 홀더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강현의 말대로 기구의 조인트 부분을 자세히 보니, 정말로 머리카락보다 얇은 미세한 실금이 가 있었다. 만약 강현의 경고가 없었다면, 그는 방금 전 그 기구로 대동맥을 찔렀을 것이고, 환자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을 터였다.

그때, 격리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 사내가 들이닥쳤다.

"이게 무슨 소란이야!"

흉부외과 과장 김태섭이었다. 그는 수술실의 피바다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백강현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자, 그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백강현! 네놈이 왜 여기에 있어? 감히 기조실장님의 허락도 없이 VIP 구역에 한 걸음을 들여놓아? 당장 보안요원 불러서 끌어내!"

김태섭이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그의 등 뒤로 보안요원들이 들이닥치려 했다.

강현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천천히 걸어가 김태섭의 코앞에 멈춰 섰다. 강현의 눈동자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과장님."

강현이 오직 김태섭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낮고 건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과장님 방 우측 벽면에 있는 최고급 이탈리아제 가죽 개인 캐비닛. 그 안쪽 이중 바닥을 들추면 나오는 검은색 가죽 파우치 기억하십니까?"

김태섭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정지했다. 그의 얼굴에서 모든 감정이 지워지고, 오직 극도의 공포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거기에 보관해 두신 보안 태블릿 PC. 비밀번호는 과장님 사모님 생일과 첫사랑 이름의 이니셜 조합인 '0912*88#' 맞습니까? 그 안에 지난 5년간 제약사들로부터 받은 30억 상당의 리베이트 장부와, 대리 수술을 지시했던 유령 수술(Ghost Surgery) 일지가 아주 예쁘게 암호화되어 있더군요."

"너, 너... 그걸 어떻게..."

김태섭의 입술이 미친 듯이 파르르 떨렸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꺽꺽거리는 괴상한 소리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회귀 전, 백강현을 파멸로 몰고 갔던 그 추악한 비밀의 열쇠를 강현은 이미 쥐고 있었다.

"지금 당장 나를 여기서 쫓아내시면, 10분 뒤에 그 태블릿의 모든 데이터가 대검찰청 특수부와 언론사 사회부 기자들 메일함으로 자동 전송되도록 설정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과장님?"

강현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것은 악마의 미소와도 같았다.

김태섭은 다리에 힘이 풀려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수술대 모서리를 잡고 버텼다. 그의 이마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이 수술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자신의 평생 쌓아 올린 지위와 명예, 그리고 목숨줄이 이 새파란 펠로우의 손끝 하나에 달려 있었다.

"과, 과장님! 어서 이 자를 끌어내야..."

차민우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김태섭의 소매를 붙잡았다.

착-!

"시끄러워! 조용히 해!"

김태섭이 돌연 차민우의 뺨을 거세게 후려쳤다. 수술실 안에 명쾌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차민우는 뺨을 감싸 쥐며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김태섭을 바라보았다.

"백... 백 선생. 자네가 집도하게. 모든 전권은 자네에게 넘긴다."

김태섭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짜내듯 말했다. 그의 어깨는 이미 패배자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과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환자는 기조실장님이 직접..."

"닥치라고 했지! 당장 수술실에서 나가, 차민우! 강태윤!"

김태섭의 악에 받친 고함에 차민우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노와 굴욕감으로 온몸을 떨며 강현을 노려보았지만, 강현은 이미 그들을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었다.

"비켜."

강현이 차민우의 어깨를 무력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민우는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멸균복이 바닥의 피와 먼지로 오염되는 순간이었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강현이 수술대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집도의의 그것이었다.

"한 선생, 베타딘 소독하고 스크럽 준비해. 지금부터 완전 개흉 후 상행 대동맥 및 대동맥궁 인조혈관 치환술(Ascending & Total Arch Graft Replacement)로 전환한다."

"예! 알겠습니다!"

한서희는 외침과 동시에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강현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깃들어 있었다.

강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열망을 느꼈다. 과거의 생에서,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해 소모품처럼 버려졌던 환자들. 그리고 자신을 파멸로 몰고 갔던 자들의 눈앞에서, 그는 가장 완벽한 의학적 실력으로 그들의 심장을 쥐 흔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살린다. 내 눈앞에 있는 환자는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는다.'

강현은 차가운 메스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그의 시야 속에 떠오른 '생명의 장부'를 향해 명령했다.

'장부 가동. 초인적 정밀 재건 능력 활성화.'

그러나 그 순간, 예상치 못한 붉은색 경고 창이 그의 온 시야를 가득 메우며 격렬하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경고: 신뢰 포인트(Trust Point) 부족!] [현재 보유 포인트: 150 PT] [요구 포인트: 1,500 PT] [상태: 자원 부족으로 인한 초과 인출(Overdraft) 강제 집행.] [대가: 급성 협심증(Acute Angina) 유발 및 영구적 생명력 감소 패널티가 즉시 부과됩니다.]

[강제 진행하시겠습니까?]

강현의 턱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포인트가 부족하다. 당연했다. 아직 바벨 워드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충분한 신뢰를 쌓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환자는 지금 당장 메스를 대지 않으면 30초 내에 심정지로 사망한다. 자신의 목숨과 환자의 목숨을 저울질해야 하는 극한의 선택의 순간.

강현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마음속으로 승인을 눌렀다.

'진행해.'

[승인 완료. 신뢰 장부 적자 전환.] [현재 신뢰도 잔액: -1,350 PT] [경고: 대가가 즉시 청구됩니다.]

그 순간이었다.

강현이 메스를 환자의 흉부에 가져가 대동맥을 절개하려는 찰나, 그의 가슴속 한가운데를 무겁고 뜨거운 쇠창이 관통하는 듯한 극심한 격통이 습격했다.

"윽...!"

강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하얗게 멀어지고, 심장이 터져 나갈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려 멸균복을 축축하게 적셨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백 선생? 왜 그러십니까?"

이상함을 감지한 한서희가 다급하게 물었다.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메스를 쥔 그의 손끝이 보이지 않게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통증 속에서, 환자의 대동맥에서는 여전히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었다.

이 손을 멈추는 순간, 환자도 죽고 자신도 죽는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강현은 다시 한번 메스에 힘을 주며 환자의 가슴속으로 손을 뻗었다.

과연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는 이 죽음의 적자를 견뎌내고 환자를 살려낼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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