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현 선생이십니까?"
이사장실 비서실장의 나직한 목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갈랐다. 가슴팍에서 반짝이는 금빛 배지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일렁였다. 윤 감사실장의 굳은 얼굴과 오 의원의 의아한 시선이 강현의 등에 와닿았다.
기득권의 가장 깊은 곳, 서지훈 이사장이 마침내 꼬리를 물었다.
강현은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셔츠 소매에 묻은 핏자국을 털어내며 비서실장을 똑바로 응시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백강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잠시 정리할 것이 있습니다. 과장실에 들렀다 가도록 하지요."
비서실장의 미간이 아주 미세하게 좁아졌다. 이사장실의 호출을 받고 지체하겠다는 펠로우는 병원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미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복도 끝, 흉부외과 과장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금 전 오 의원 부친의 수술방에서 강현에게 완벽하게 굴복당한 과장 김태섭은 아직 이 방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수술 후 처리와 감사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강현은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치스러울 정도로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뒤편, 김태섭이 자랑하는 최고급 개인 캐비닛이 우뚝 서 있었다. 회귀 전, 김태섭이 파멸할 때 세상에 드러났던 비밀. 병원 내 온갖 비리와 제약사 리베이트의 온상이었던 그 실체가 지금 이 캐비닛 안에 잠들어 있다.
강현은 캐비닛 오른쪽 하단, 무늬처럼 정교하게 숨겨진 이중 바닥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딸칵, 작은 마찰음과 함께 비밀 패널이 열리며 검은색 보안 태블릿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면에 손을 대자 암호 입력창이 떴다.
과거 언론을 떠들썩하게 장식했던 김태섭의 치명적인 암호 패턴. 강현은 망설임 없이 화면 위에 손가락을 놀렸다.
[ 0 9 1 4 * * ]
김태섭이 처음으로 불법 대리 수술을 집도해 환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던 그날의 날짜였다.
지잉, 가벼운 진동음과 함께 태블릿의 잠금이 해제되었다. 화면 가득 쏟아지는 불법 리베이트 장부와 이사회 임원들의 로비 내역서들. 서지훈 이사장에게 보낼 상납금의 흐름까지 고스란히 담긴 판도라의 상자였다.
강현은 태블릿의 데이터를 자신의 개인 클라우드로 신속하게 전송했다. 동기화가 100%에 도달하는 것을 확인한 후, 그는 태블릿을 원래 위치에 정밀하게 되돌려 놓았다.
‘김태섭, 네가 내 사냥개가 되어야만 하는 진짜 이유다.’
이것으로 서지훈과의 독대를 위한 단단한 방패이자, 언제든 가슴을 꿰뚫을 수 있는 창을 쥐었다. 강현은 가운을 단정히 추스르고 이사장실이 위치한 본관 12층으로 향했다.
***
본관 12층 이사장실의 문은 거대한 통유리로 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서울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압도적인 전망이 펼쳐졌다.
그 전망을 등지고 선 사내, 서지훈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단정하게 넘긴 그는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수술실의 무영등보다 차가웠다.
"백강현 선생."
서지훈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기묘한 중압감을 품고 있었다.
"과장 승인도 없는 무심폐기 관상동맥 우회술이라니. 자네가 한 짓이 우리 병원의 체계를 얼마나 흔들었는지 알고 있나?"
"체계보다 환자의 생명이 우선이라 판단했습니다."
강현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서지훈의 눈을 마주 보았다.
"환자는 협심증 단계를 넘어 심근경색 직전이었습니다. 체계를 지키느라 발만 동동 굴렀다면, 오 의원의 부친은 지금 영안실에 있었을 겁니다."
서지훈이 가볍게 콧방귀를 꼈다. 그는 책상 앞으로 걸어와 강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의사는 영웅이 아니야. 자네 같은 천재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지. 자신의 메스 끝에서 생사가 결정된다고 믿는 오만함."
서지훈의 손가락이 책상 위의 서류철을 톡톡 두드렸다.
"의료는 시스템이다.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통제된 질서가 필요하지. 자네의 그 돌출 행동은 질서를 망가뜨리는 바이러스와 같아."
"그 질서라는 것이, 특정 권력자들의 안위와 이익만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바이러스 아닙니까?"
일순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비서실장의 호흡이 멈추는 소리가 들릴 듯했다. 서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살기 어린 이성이 번뜩였다.
보통의 의사들이라면 이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관용을 구했을 터였다. 하지만 강현은 오히려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자신이 쥔 패와, 회귀 전 겪었던 서지훈의 파멸 공식을 완벽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당당함이었다.
서지훈은 강현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마치 쓸 만한 사냥개인지, 아니면 즉시 도살해야 할 늑대인지를 저울질하는 눈빛이었다.
이윽고 서지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재미있군. 아주 건방져."
그는 서류철 하나를 집어 강현의 가슴팍에 툭 던지듯 건넸다.
"그 완벽주의가 어디까지 통하는지 보고 싶구나. 신관 20층으로 가라."
강현의 눈이 미세하게 커졌다.
"바벨 워드 말씀이십니까?"
"그래. 정재계의 거두들이 모이는 곳이자, 우리 병원의 심장부지. 그곳의 전담 펠로우로 자네를 임명하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곳이다. 기계처럼 완벽하게 환자를 살려내든지, 아니면 그곳에서 완전히 부서져 나가든지. 선택은 자네의 실력에 달렸다."
서지훈은 그것이 강현을 파멸로 이끌 화려한 단두대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극도의 스트레스와 정치적 압박이 도사리는 바벨 워드에서, 천재라는 껍데기가 어떻게 깨지는지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강현의 입가에는 미세한 미소가 걸렸다.
"기꺼이 들어가겠습니다."
그곳은 서지훈이 구축한 권력의 요새이자, 동시에 백강현이 찬탈해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니까.
***
신관 20층.
일반 병동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대리석 바닥에 발소리조차 흡수되는 듯한 기묘한 정적이 흐르는 곳. 이곳이 바로 대한민국 0.1%의 권력자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VIP 격리 병동, ‘바벨 워드’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강현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시스템이 새로운 영역을 인식합니다.] [‘바벨 워드(Babel Ward)’ 영역 동기화 완료.] [주변 환자들의 ‘생명의 장부’를 스캔합니다.]
화려한 시각적 이펙트와 함께, 강현의 시야가 급변했다.
복도를 따라 굳게 닫힌 VIP 병실들의 문 위로,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빛 반투명 장부들이 도열하듯 떠올랐다. 일반 병실의 푸르스름한 장부들과는 격이 다른 규모였다.
[환자: 대성그룹 회장 이학수 / 잔여 수명: 1년 2개월] [잠재 신뢰도 획득 가능치: 15,000 SP]
[환자: 전 국무총리 정인권 / 잔여 수명: 8개월] [잠재 신뢰도 획득 가능치: 18,000 SP]
눈이 멀 것 같은 황금빛 숫자들이 강현의 뇌리를 때렸다. 이곳에 누워 있는 환자 한 명 한 명이 지닌 사회적 영향력만큼,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신뢰도’ 자원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가 바로 노다지였군.’
강현의 심장이 거칠게 고동쳤다. 과거 구하지 못한 환자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가득 찬 가슴속에, 새로운 권력의 청사진이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이들의 생명줄을 쥐고 흔들 수만 있다면, 서지훈의 목을 죄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머, 백강현 선생 아니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흉부외과 3년차 전공의 한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차가운 성격의 그녀였지만, 펠로우에 불과한 강현이 바벨 워드에 나타난 것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여기엔 어쩐 일이에요? 여긴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오늘부로 바벨 워드 전담으로 발령받았습니다."
"네? 펠로우가 바벨 전담이라니요? 말도 안 돼요. 여긴 스태프급 이상만 집도권을 갖는 곳인데……."
서희가 황급히 차트를 품에 안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녀의 눈빛에는 놀라움과 함께, 이곳의 살벌한 정치 역학 관계를 잘 아는 이 특유의 걱정이 서려 있었다.
그때, 복도 저편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우리 흉부외과의 자랑인 백강현 선생이 드디어 입성하셨군!"
단정한 가운 차림에 세련된 안경을 쓴 사내. 명문 의사 가문 출신의 엘리트이자, 강현을 향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라이벌 차민우였다. 그는 겉으로는 누구보다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사장님의 파격적인 인사라니, 정말 대단해. 축하하네, 백 선생."
민우는 강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살갑게 굴었지만, 강현의 눈은 민우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손톱 밑이 피가 나도록 뜯겨 있는 흔적. 질투와 분노를 억누르느라 스스로를 학대하는 차민우의 고질적인 버릇이었다.
"과찬이십니다, 차 선생."
"아, 마침 잘 됐군. 자네의 바벨 워드 입성을 기념해서 내가 아주 귀한 선물을 준비했네."
민우가 비서에게 신호를 보내자, 가죽으로 정교하게 마감된 검은색 케이스가 전달되었다. 민우는 자랑스럽게 케이스를 열어 보였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특주 제작한 신형 미세 수술 기구(Micro-instrument) 세트네. 티타늄 합금으로 제작되어 초정밀 혈관 봉합에 이보다 좋은 장비는 없지. 우리 과에서도 오직 나만 쓰던 것인데, 자네에게 특별히 양도하겠네."
케이스 안에는 은빛으로 은은하게 빛나는 핀셋과 니들 홀더(Needle holder)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한서희의 눈이 커졌다.
"이건…… 구하기도 힘든 최고급 수술 도구잖아요? 차 선생님이 이걸 정말 주시는 건가요?"
"그럼. 우리 흉부외과의 협동을 위해서 이 정도는 기꺼이 내놓아야지."
민우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강현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강현의 시선은 그 은빛 도구들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붉은색 경고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생명의 장부’ 정밀 분석 가동.] [도구 분석: 독일제 특주 마이크로 니들 홀더 (결함 발견)] [상태: 금속 내부 미세 균열(Micro-crack) 존재율 87%] [위험도: 극상. 15g 이상의 인장력 가해질 시 팁(Tip) 부분 파손 및 미끄러짐 발생 가능.]
강현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역시 차민우였다. 겉으로는 호의를 베푸는 척하면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수술 과실을 유도하려는 비열한 함정. 수술 중 아주 미세한 혈관을 봉합할 때 이 니들 홀더가 부러지거나 미끄러진다면, 환자의 혈관은 찢어지고 대량 출혈로 사망에 이르게 된다. 모든 책임은 집도의인 강현이 지게 될 터였다.
‘머리를 썼군, 차민우.’
강현은 내색하지 않고 기구 세트를 정중히 받아 들였다.
"감사합니다, 차 선생. 아주 요긴하게 쓰이겠군요."
"천만에. 백 선생의 완벽한 수술에 도움이 된다면 기쁜 일이지."
민우는 강현이 함정에 빠진 줄도 모르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었다. 강현은 케이스를 닫아 서희에게 건넸다.
"한 선생, 이 기구들을 깨끗이 소독해서 내 개인 캐비닛에 보관해 두십시오. 아주 특별한 순간에 쓰게 될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서희는 기쁜 표정으로 기구 케이스를 품에 안았다. 최고급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단순한 기쁨이었지만, 강현의 머릿속에는 이미 이 결함 있는 무기를 역으로 이용해 차민우의 목을 칠 완벽한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이이이이이이-!
바벨 워드의 고요한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복도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적색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붉은 불빛을 뿜어냈다. 안내 데스크의 간호사들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201호 격리실! 환자 바이탈 떨어집니다! 어레스트(Arrest) 가능성 있습니다!"
201호 격리실.
한서희가 이전에 혼잣말로 언급했던, 바벨 워드 최고의 극비 구역이자 베일에 싸인 불치병 환자 '환자 X'의 병실이었다.
서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민우 역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강현은 거침없이 201호 격리실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시야 속에서, 격리실 문 너머로 거대한 적자 상태의 생명의 장부가 붉은 피처럼 타오르며 폭발적인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마침내, 진정한 사투의 서막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