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수술실의 공기는 무겁고 서늘했다. 헤파필터를 거쳐 뿜어져 나오는 층류 송풍기의 기계음만이 규칙적으로 정적을 깨뜨렸다.

"네놈이 지금 무슨 소릴……."

김태섭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며 강현의 얼굴과 허공을 번갈아 헤맸다. 강현이 던진 나지막한 한마디는 비수처럼 정확히 김태섭의 가장 깊숙한 급소를 꿰뚫었다. 최고급 가죽 캐비닛 속의 깊은 비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그 치부가 어떻게 이 새파란 펠로우의 입에서 흘러나왔단 말인가.

하지만 김태섭은 이내 붉게 충혈된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위기를 목청으로 덮으려는 얄팍한 발악이었다.

"보안요원들! 뭐 하고 서 있어! 이 정신 나간 놈이 수술실을 무단 점거하고 헛소리까지 지껄이는데, 당장 끌어내지 않고!"

가장 덩치가 큰 보안요원이 조심스럽게 강현에게 다가섰다. 강현은 피가 묻은 수술 장갑을 천천히 벗어 던지며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김태섭의 목덜미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냥감이 덫에 걸렸을 때 보여주는 전형적인 발버둥이었다.

그때, 수술실의 무거운 자동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시 열렸다.

"아버님! 아버님은 어떻게 되셨습니까!"

단정한 정장 차림이지만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사내였다. 그의 뒤로 수행원으로 보이는 비서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사내의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이 지역의 유력 정치가이자 야당의 실세인 오창수 의원이었다.

"의원님, 이곳은 수술실 제한 구역입니다!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수간호사가 다급히 가로막았으나, 오 의원의 눈에는 오직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노부의 모습과 반짝이는 바이탈 모니터뿐이었다.

[HR 75bpm. BP 115/75mmHg. SpO2 99%]

대동맥 박리 및 파열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기계음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평온한 박자로 수술실을 채우고 있었다. 찢어진 상행 대동맥을 인조혈관으로 완벽히 치환하고 출혈을 잡아낸 결과였다. 인공심폐기를 쓰지 않고 심장이 뛰는 상태에서 진행한 무심폐기 수술(Off-Pump surgery)이었기에, 환자의 전신 상태는 오히려 일반 수술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살아 계셔…… 살아 계시는군요."

오 의원의 무릎이 꺾이듯 주저앉았다. 그는 수술대 옆에 서 있는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의 초록색 수술복은 사방으로 튄 붉은 피로 얼룩덜룩하게 젖어 있었다. 이 수술이 얼마나 처절한 사투였는지를 온몸으로 증명하는 흔적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아버님을 살려주신 겁니까?"

오 의원이 강현의 거친 손을 두 손으로 꽉 맞잡았다. 그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뜨거운 눈물이 강현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졌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타 병원에서는 이송 도중에 사망할 확률이 90%가 넘는다고 포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님을 이렇게 살려주시다니……."

그 순간, 강현의 시야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장막이 떠올랐다.

[환자 및 보호자의 진실된 신뢰가 감지되었습니다.] [신뢰 자원(Trust Point)이 급격히 상승합니다.] [+500 TP] [+800 TP] [현재 보유 신뢰도: 1,550 TP] [알림: 적자 상태에서 탈피하여 흑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심장 과부하 경고가 해제됩니다.]

가슴을 쥐어짜던 지독한 협심증의 통증이 썰물처럼 씻겨 내려갔다. 영구적인 수명 감소의 위기에서 비로소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강현은 얕은 숨을 내쉬며 안도의 숨을 들이켰다. 회귀의 대가로 지불해야 했던 생명의 빚. 환자를 살리고 그들의 신뢰를 얻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심장도 숨을 쉴 수 있었다. 이 잔혹하고도 정직한 생명의 장부는 강현에게 단순한 힘이 아닌, 매 순간 생사경을 넘나들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이었다.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환자분의 심장이 강해서 버텨주셨습니다."

강현의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오 의원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아닙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한국대병원 흉부외과에 이런 귀한 의사분이 계셨다니……."

오 의원이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며, 김태섭의 얼굴은 점차 흙빛으로 변해갔다. 보안요원들은 이미 강현에게서 손을 떼고 멍하니 서 있었다. 지역 정계의 거물이 손을 붙잡고 우는 의사를 강제로 끌어낼 배짱을 가진 자는 이곳에 없었다.

* * *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와 함께 안경을 치켜쓰며 등장한 인물은 기획조정실 산하 감사실장 윤문수였다. 김태섭이 강현을 확실하게 매장하기 위해 수술 도중 미리 호출해 둔 인물이었다.

"윤 실장! 잘 왔네!"

김태섭이 구세주를 만난 듯 윤 실장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 백강현 펠로우 녀석이 과장의 집도 지시를 무시하고 무단으로 수술실을 점거해 집도했네! 이건 명백한 월권이자 의료법 위반, 병원 규정 위반이야! 당장 징계위원회를 소집해서 파면 절차를 밟아야 하네!"

윤 실장은 안경 너머로 수술실 내부를 차갑게 훑어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강현,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오 의원,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김태섭. 상황 파악은 빨랐다. 하지만 원칙 수호가 그의 임무였다.

"백강현 선생. 김 과장님의 말씀이 사실입니까? 승인되지 않은 독단적 집도였습니까?"

강현은 대답 대신 김태섭을 빤히 바라보았다. 김태섭의 눈 밑 경련이 더욱 심해졌다. 강현이 아까 제 귓가에 속삭였던 말이 그의 머릿속을 사정없이 헤집어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과장님 캐비닛 안에 있는 그 물건.'

강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윤 실장님. 병원 규정에 따른 절차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징계위원회에 정식으로 회부되기 전에 김 과장님과 단둘이 잠시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말이냐! 난 너 같은 규칙 파괴자와 나눌 대화 따윈 없다!"

김태섭이 비명을 지르듯 반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섞여 있었다.

"과장님 방에 있는 최고급 가죽 캐비닛 말입니다."

강현이 나지막이, 그러나 수술실 안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명확한 어조로 받아쳤다.

"그 안쪽 패널을 뜯어내면 나오는 이중 금고. 비밀번호가 아마…… 과장님 사모님 생일이 아니라, 다른 분의 생일인 0912였던가요?"

"너, 너……!"

김태섭의 숨이 턱 막혔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0912. 그 비밀번호는 김태섭이 남몰래 만나고 있는 내연녀의 생일이자, 오직 자신만이 설정해 둔 극비의 숫자였다. 그것을 이 새파란 펠로우가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잠깐이면 됩니다, 과장님. 여기서 다 털어놓는 것보다, 옆의 소회의실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편이 과장님의 '남은 의사 수명'에 이롭지 않겠습니까?"

강현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김태섭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저 녀석은 진짜 무언가를 알고 있다. 단순한 찍어맞추기가 아니다.

"윤 실장…… 잠시, 잠시만 대기해 주게. 내 이 녀석과 개인적으로 정리할 문제가 있어서 그렇네."

김태섭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기어들어 갔다. 윤 실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10분 드리겠습니다."

* * *

수술실 옆의 작은 참관인 대기실. 문이 닫히자마자 김태섭은 강현의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네놈이 어떻게 그걸 알아! 대체 정체가 뭐야! 누가 뒤를 봐주는 거냐!"

강현은 가볍게 김태섭의 손목을 쳐냈다. 탁, 하는 매서운 소리와 함께 김태섭의 손이 허공에 붕 떴다.

"목소리 낮추십시오. 밖에서 다 듣습니다."

강현은 자신의 수술복 주머니에서 얇은 기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검은색 가죽 케이스에 싸인 태블릿 PC였다.

그것을 본 김태섭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이건……!"

"익숙하시죠? 과장님의 캐비닛 깊숙한 곳에서 잠자고 있던 물건입니다."

강현이 태블릿의 화면을 켰다. 회귀 전의 기억을 되살려 입력한 해제 코드로 인해 잠금장치는 이미 무력하게 풀려 있었다. 화면 위에 재생 대기 중인 동영상 파일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강현은 그중 하나를 터치했다.

화면 속에서 한 남자가 환자의 가슴을 열고 수술을 진행하고 있었다. 수술복을 입은 남자의 얼굴은 김태섭이 아니었다. 국내 최고 의료기기 납품업체인 '대진메디텍'의 영업 팀장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김태섭은 팔짱을 낀 채 하품을 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어이, 박 팀장. 봉합 좀 꼼꼼하게 해라. 지난번처럼 실 풀려서 재수술 들어오면 골치 아프니까." - "걱정 마십시오, 과장님. 한두 번 해봅니까. 그나저나 이번에 새로 들어온 카테터 리베이트 건은 사모님 계좌로 송금해 두었습니다."

화면 속 김태섭의 목소리가 대기실의 정적을 깨우며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 이건…… 조작이야! 악마의 편집이라고!"

김태섭이 태블릿을 빼앗으려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강현은 가볍게 몸을 피하며 태블릿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화면에는 엑셀 파일 하나가 실행되어 있었다.

[2021-2023년도 대진메디텍 리베이트 내역 및 대리 수술 일지]

환자의 이름, 수술 날짜, 집도한 대리 수술업자의 인적 사항, 그리고 김태섭의 차명 계좌로 입금된 구체적인 액수까지 소수점 하나 틀리지 않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회귀 전, 강현 역시 이 침묵의 카르텔의 희생양이었다. 김태섭의 대리 수술 사고를 독박 쓰고 병원에서 비참하게 쫓겨났던 기억. 그 끔찍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강현은 회기 직후 김태섭이 VIP 라운지에서 사교 모임을 갖는 틈을 타 그의 방에 잠입해 이 태블릿을 확보해 두었던 것이다.

"조작인지 아닌지는 보건복지부와 검찰에서 판단하겠죠."

강현이 태블릿을 품에 넣으며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대리 수술 교사, 의료법 위반,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최소 실형 5년입니다. 의사 면허 박탈은 당연한 수순이고요."

"강, 강현아……."

김태섭의 다리가 스르륵 풀렸다. 대리 수술과 뇌물 수수. 이 두 가지만으로도 그의 의사 인생은 물론이고 사회적 생명 자체가 완전히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가 평생을 바쳐 쌓아 올린 권력과 부가 단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툭.

김태섭의 무릎이 차가운 대기실 바닥에 닿았다. 그는 강현의 바지깃을 붙잡았다. 비굴하기 짝이 없는 눈물이 그의 자글자글한 주름 사이로 흘러내렸다.

"내가 잘못했다…… 내가 미쳤었어. 제발 그것만은 덮어다오. 네가 원하는 건 뭐든 해 줄게. 펠로우 정교수 임용? 정식 스태프 발령? 내가 이사장님께 말씀드려서 당장 처리해 주마!"

강현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비굴한 사냥개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자는 과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자다. 하지만 지금은 살기 위해 하급 의사의 발밑에서 기고 있다.

"약속하십시오."

강현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첫째, 이번 수술은 전적으로 제가 집도한 것으로 처리하고, 이에 대한 징계 논의는 완벽히 무효화합니다."

"그래, 당연하지! 아주 훌륭한 응급 수술이었다고 내가 직접 보고서를 쓰마!"

"둘째, 앞으로 제가 하는 그 어떤 수술과 환자 처치에 대해서도 과장님은 간섭하지 않습니다. 제가 요구하는 장비와 인력은 군말 없이 지원하십시오."

"하, 하겠네! 흉부외과의 모든 전권을 네게 실어 주마!"

"마지막으로."

강현이 허리를 숙여 김태섭의 귀에 속삭였다.

"과장님은 제 개가 되는 겁니다. 제가 짖으라고 하면 짖고, 물라고 하면 무는 사냥개."

김태섭은 침을 삼켰다. 굴욕감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알겠네. 시키는 대로 하겠네."

강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았다. 수술방의 침묵의 카르텔을 박살 내고, 첫 번째 반격을 완벽한 승리로 장식한 순간이었다.

* * *

대기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는 여전히 윤 감사실장과 오 의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태섭은 붉어진 눈가를 애써 감추며 윤 실장에게 다가갔다.

"윤 실장, 징계위는 소집하지 않는 걸로 하겠네. 백강현 선생의 수술은 급박한 상황에서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네. 병원의 위상을 높인 처사야."

윤 실장은 의아한 눈빛으로 김태섭과 강현을 번갈아 보았으나, 피해 당사자여야 할 과장이 저렇게 나오니 더는 추궁할 명분이 없었다.

"……과장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상황이 정리되자 오 의원이 다시 한번 강현의 손을 잡으며 고마움을 표했고, 이내 환자의 회복실 이송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주변을 둘러싼 긴장감이 마침내 누그러지는 듯했다.

바로 그때였다.

복도 저편에서 구두 굽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의 가슴팍에 달린 금빛 배지는 일반 의료진의 것과 격이 달랐다.

병원 이사장실 직속 비서실장이었다.

그의 등장에 윤 감사실장조차 허리를 급히 굽혀 인사했다. 비서실장은 주위의 인물들을 완전히 무시한 채, 오직 강현만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백강현 선생이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비서실장의 눈빛에는 그 어떤 감정도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서지훈 이사장님께서 지금 당장 본관 12층 이사장실로 올라오라고 하십니다."

서지훈.

그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강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병원의 절대적인 지배자이자, 대한민국 의료계의 정점에 선 괴물. 그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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