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한 횃불 그림자가 지하 통로의 화강암 벽면을 따라 길게 일렁였다.
지상에서 불어오는 눅눅한 흙내음과 지하 서고 깊은 곳에서 배어 나온 고대의 먼지 향이 기묘하게 뒤섞인 경계선. 그곳에 선 이단심문관 발락의 대검 끝이 바닥을 긁을 때마다 소름 끼치는 쇠붙이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은빛 투구 새로 번뜩이는 그의 안광은 사냥감을 앞둔 맹수의 그것보다 집요했고, 그가 이끄는 성기사단이 뿜어내는 살기는 좁은 복도를 가득 메워 숨 쉴 구멍조차 내주지 않았다.
귀환 좌표의 단서가 새겨진 고대 석판을 품에 안은 시우의 시야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두근. 두근.
느렸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에서 모래주머니를 매단 것처럼 무겁고 더디게 뛰었다. 분당 마흔 번도 되지 않는 박동. '정리된 엔트로피의 시선'을 사용해 유적의 폭발을 절대영도로 동결시킨 대가는 시우의 혈관을 얼려 서서히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입술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변했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결국 예언의 봉인을 풀고 기어 나오는군, 더러운 마왕의 찌꺼기여."
발락의 목소리는 지하 통로 전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추와 같았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물리적인 위압감이 공기를 타고 밀려들었다. 성기사단의 신성 마력이 자아내는 보이지 않는 한기가 시우의 굳어가는 신체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그 압박 속에서 시우의 무릎이 꺾이려던 찰나였다.
"에온!"
유리아가 다급하게 비명을 지르며 시우의 곁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공포로 덜덜 떨리고 있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유리아는 품 안에서 은색으로 빛나는 정밀한 연금술용 실린더를 꺼내 들었다. 실린더 내부에는 투명하도록 맑은 청색의 액체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며칠 전, 시우가 아카데미의 낡은 칠판 위에 단 세 줄로 증명해 낸 '열역학 제2법칙 기반의 보정식'을 바탕으로 유리아가 밤을 새워 정제해 낸 신종 연금 결합액 정제물이었다. 기하학적 대칭에만 집착하며 무려 42%의 마나 손실을 내던 황실 공식의 오차를 시우의 논리로 완전히 걷어내고, 무결한 분자 결합을 통해 정제율을 99.98%까지 끌어올린 기적의 산물.
"이걸…… 이걸 쓰면 돼요! 당신이 고쳐준 수식대로, 불순물을 완벽하게 걸러냈어요. 심장의 부하를 강제로 상쇄할 수 있을 거예요!"
유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실린더 끝의 은침을 꽉 쥐었다. 그녀의 시선이 시우의 창백한 얼굴과 수척해진 뺨에 머물렀다. 이 경이로운 소년은 자신의 생명을 깎아내며 우주의 무결한 진리를 증명하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를 마왕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멸시할지언정, 유리아에게 시우는 미개한 세상에 내려온 수학적 구세주이자 유일한 진리의 빛이었다.
"조금 아플 거예요."
유리아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녀는 시우의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을 향해 망설임 없이 은침을 찔러 넣었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청색의 액체가 시우의 흉부로 빠르게 주입되었다.
"……!"
시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차가운 불꽃이 혈관을 타고 심장으로 곧장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주입된 무결한 정제액은 시우의 심장 근육 세포 수준에서 발생하는 과도한 열역학적 붕괴와 극저온화 현상을 정밀하게 차단하기 시작했다. 분자 단위로 계산된 연금 결합이 체내의 엔트로피 소모를 중화하고, 죽어가던 심장 세포에 강제적인 활성을 부여했다.
두근! 두근! 두근!
분당 마흔 번 이하로 멎어가던 심장 소리가 단단하고 규칙적인 소리를 내며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굳어 가던 손끝에 미약한 온기가 돌았고, 시야를 가리던 하얀 안개가 걷혔다. 영구적인 수명 단축이라는 가혹한 대가가, 유리아의 손을 통해 완벽하게 제어되며 반감되는 순간이었다.
시우는 가만히 제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흉부에 박힌 은침을 뽑아내는 유리아의 손끝에 붉은 피 한 방울이 묻어났다. 유리아는 그 피를 닦아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전율 어린 눈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은 공포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감히 신의 영역이라 여겼던 생명 제어의 수식을, 이 소년의 수식 하나로 현실에 구현해 냈다는 학구적인 희열과 구원감의 순수한 발로였다.
그 순간, 시우의 목덜미 부근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베아트리스가 참관 중 착용하고 있던, 고대 연성 기하학의 정수가 담긴 펜던트였다. 시우의 체내에서 마나와 연금 정제액이 결합하며 발생한 기묘한 파동에 호응하듯, 그녀의 펜던트가 스스로 웅웅거리며 미세하게 진동했다. 베아트리스는 가슴팍의 펜던트를 손으로 감싸 쥐며 의아한 눈빛으로 시우를 응시했다.
'이 반응은 대체……? 단순한 연금액의 주입이 아니야. 그의 파동이 펜던트의 고정이론과 공명하고 있어.'
그녀는 침을 삼켰다. 이 기이한 소년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그는 지금 세상의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무언가를 행하고 있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발락이 대검을 비스듬히 치켜들며 차갑게 물었다.
그의 눈에 비친 시우의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가슴에 정체불명의 침을 꽂고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자비한 고통 속에서도 눈썹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마치 남의 몸을 관찰하듯 차분하게 자신의 가슴을 쓸어내릴 뿐이었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육체. 감정이 거세된 듯한 명징한 눈동자. 그리고 주변의 공기를 얼려버리는 이질적인 마나의 흔적.
발락의 확신은 더욱 굳어졌다.
'인간의 껍데기를 썼으나, 내면은 완전히 비어 있군. 저것은 고통도, 공포도 모르는 인외의 존재…… 예언서에 기록된 동토의 마왕이 틀림없다.'
"이단심문소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발락의 대검 위에 푸른빛의 신성 투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지하 통로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음이 사방을 메웠다.
"그 육신에 깃든 사악한 영혼을 멸하고, 재앙의 씨앗을 도려내겠다!"
쿠웅!
발락이 바닥을 박찼다. 그의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속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파괴적인 참성이 시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대검의 궤적을 따라 지하 통로의 돌벽이 깎여 나가며 무시무시한 풍압이 발생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베아트리스조차 검을 뽑아 막아서기에는 발락의 투기가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시우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다.
'정리된 엔트로피의 시선'이 발락의 참격을 격자로 나누어 분석했다. 대검의 운동 에너지, 주변 공기의 마찰 계수, 그리고 투기가 발산하는 열에너지의 흐름이 수학적인 수식으로 치환되어 눈앞에 그려졌다.
시우는 차분하게 오른손을 뻗었다. 입 밖으로 나오는 영창은 없었다. 단지 머릿속에서 완벽한 열역학적 공식을 재구성할 뿐이었다.
'진동 에너지를 0으로 수렴시킨다.'
시우의 손끝이 허공을 가볍게 튕겼다.
그 순간,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발락의 대검이 시우의 코앞 십 센티미터 거리까지 육박했을 때, 대검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급격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한 빙결 마법이 아니었다. 대검의 진행 방향에 존재하는 공기 분자들의 모든 물리적 운동과 진동을 강제로 정지시키는 '절대영도화'의 발현이었다.
열운동이 정지한 공기는 물리적인 부피를 잃고 극도로 압축되어, 마치 보이지 않는 초고점도의 액체 혹은 끈적한 늪처럼 변모했다.
스으으으으……!
무시무시한 기세로 짓쳐 들던 발락의 대검이, 시우의 손끝 앞에서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대검의 끝부분은 마치 투명한 조청에 가로막힌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그리고 극도로 느린 속도로 진동할 뿐이었다. 대검에 실려 있던 파괴적인 운동 에너지가 공기의 열운동 소멸로 인해 갈 곳을 잃고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이, 이것은……?!"
발락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무리 강력한 방어 마법이라도 강철의 대검과 신성 투기의 파괴력을 정면으로 받으면 파편이 튀거나 충격이 전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 시우가 펼친 것은 방어막이 아니었다. 자신의 검이 가진 '속도'와 '힘'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공에 고정되어 소멸해 버린 기분이었다.
시우는 손가락을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휘익!
점성이 극대화되었던 공기가 급격하게 팽창하며, 발락의 공격 각도를 완전히 이분(二分)하여 빗겨 나가게 만들었다. 대검의 참격은 시우의 어깨너머 허공을 갈랐고, 궤도가 완전히 뒤틀린 대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발락의 신체가 옆으로 크게 비틀거렸다.
콰앙!
발락의 대검이 시우의 옆벽을 강타하며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시우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정적.
지하 통로에는 오직 발락의 거친 숨소리와, 그가 파괴한 벽면에서 떨어지는 돌가루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성기사단은 자신들의 수장이 단 한 번의 영창도, 마법진의 전개도 없이 무심히 뻗은 소년의 손짓 하나에 완벽하게 저지당하는 모습을 보고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것은 마법의 범주가 아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자연의 법칙 자체를 비웃는, 그야말로 '마왕'의 권능 그 자체였다.
"검을 거두십시오, 이단심문관 발락!"
그 침묵을 깨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아트리스가 장검을 완전히 뽑아 들고 시우와 발락의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그녀의 검끝은 황실의 기사답게 올곧았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단호함이 서려 있었다.
발락은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얼굴은 굴욕과 분노, 그리고 광신적인 적개심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베아트리스 영애. 황실의 기사가 마왕의 환생을 비호하겠다는 건가? 이 자는 고대의 금기를 풀고 금서의 서고를 침범했다. 이것만으로도 즉각 처형감이다!"
발락이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붉은 인장이 찍힌 양피지 문서가 펼쳐졌다. 황제와 원로원의 직인이 찍힌, 즉각적인 체포 및 수색 영장이었다.
"황립 기사단의 이름으로 명한다! 저 이단자를 결박하라! 저항할 시에는 즉각 사살한다!"
성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고쳐 잡으며 압박해 들어왔다. 공기가 다시 한번 팽팽하게 얼어붙는 일촉즉발의 순간.
베아트리스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의 품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인장 패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제국 황가에서 오직 소수의 고위 수호 기사에게만 하사하는 '황가 전속 중재권'의 상징이었다.
"이 자는 단순한 침입자가 아닙니다. 아카데미 지하의 유적 붕괴를 막고, 황실의 자산인 '공허의 서고'를 수호한 핵심 증인입니다!"
베아트리스의 목소리가 좁은 통로를 당당하게 울렸다.
"황립 기사단 소속 베아트리스 안할트의 명예를 걸고, 이 자의 신병은 황가 전속 중재 절차에 따라 아카데미 원로원과 황실 재판소의 공동 심문으로 이관할 것을 강제 편립합니다! 이단심문소라 할지라도, 황가의 전속 관할권을 무시하고 사사로이 즉결 처형을 집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 선언에 발락의 눈썹이 험하게 꿈틀거렸다. 황가 전속 중재권. 그것은 교단이나 이단심문소의 초법적인 권한마저 일시적으로 정지시킬 수 있는, 황실의 가장 강력한 사법적 방패였다.
"베아트리스…… 감히 기사 가문의 명예를 더러운 마왕에게 바치겠다는 말이냐!"
발락의 대검이 노골적인 살기를 띠며 베아트리스를 향했다.
하지만 베아트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서, 시우는 여전히 감정이 배제된 맑은 눈으로 발락과 베아트리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아카데미 본관으로 향하는 최단 경로와, 품에 안은 고대 석판의 수식을 해독하기 위한 계산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대치는 팽팽했고, 지상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세 사람의 옷자락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과연 이 지하 통로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황실의 심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음모의 시작인가. 시우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친 횃불의 불꽃이 기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