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아아앙!
낙하하는 거석이 바닥을 짓누르며 뿜어낸 불꽃이 지하 1층의 고풍스러운 석조 벽면을 검게 그을렸다. 수천 년의 먼지를 머금은 공기가 순식간에 뜨겁게 팽창했다. 붉은 화염은 마치 굶주린 맹수처럼 연단의 계단을 타고 올라와 소년의 발밑을 집어삼킬 듯 넘실거렸다.
"퇴로가…… 차단되었어."
유리아가 마른침을 삼키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가는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며 품에 안은 마법 서적을 더욱 세차게 껴안았다.
공기 중의 산소가 급격히 연소하며 숨통을 조여 왔다. 하지만 시우의 시선은 오직 제단 위의 소실된 고대 좌표 석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무너지는 천장도, 사방을 포위하는 화염도 부차적인 변수에 불과했다.
쿵! 쿵! 쿵!
귓가에 들리는 심장 소리가 기묘할 정도로 느렸다. 분당 마흔 번. 생명 활동을 위협하는 저체온증의 족쇄가 차갑게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폐부 깊은 곳에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비린 피의 온기가 입술 사이로 번졌으나, 시우는 손등으로 그것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위로 오직 푸른빛의 기하학적 수식들만이 쉴 새 없이 명멸했다.
"비켜서십시오, 에온!"
베아트리스가 장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녀의 검끝이 뿜어내는 은빛 오라가 붉은 열기를 가르려 했으나, 팽창하는 차원의 잔류 열에너지는 고전적인 마나의 장벽을 비웃듯 무서운 속도로 그녀의 방어막을 잠식했다. 가열된 공기가 팽창하며 만들어내는 기압차가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을 부르고 있었다.
시우의 머릿속에서 물리학적 연산이 극도로 가속되었다.
'자유 낙하하는 잔해의 평균 질량은 대략 120킬로그램. 가속도는 중력 가속도 상수를 따르지만, 왜곡된 제어 방어문의 척력이 마찰 계수를 불규칙하게 요동치게 만들고 있어.'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눈동자를 더 크게 뜨고 대기 중의 분자 운동을 시각화했다.
오래전, 아카데미의 어두운 방 안에서 구리 동전을 굴렸을 때가 있었다. 마찰열로 인해 소실되던 $3.14 \times 10^{-6}$ 줄(J)이라는 극미한 에너지의 손실 수치. 기성 마법사들이 '마나의 소멸' 혹은 '자연의 섭리'라 부르며 무시했던 그 미세한 오차가 머릿속에서 거대한 역산의 실타래가 되어 풀려나갔다.
손실된 에너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형태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시우는 오른손을 가볍게 뻗었다. 아무런 영창도, 거창한 마법진의 전개도 없었다. 다만 대기 중에 흩어진 분자들의 운동 에너지를 강제로 구속하기 시작했다.
"……역학적 평형 상태를 유도한다."
나직한 독백과 함께 소년의 손가락 끝에서 보이지 않는 파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국소적인 기압을 급격히 압축하여 공기 분자들을 빽빽하게 밀착시켰다. 낙하하는 돌덩이들의 가속도가 공기의 조밀한 저항막에 부딪히며 급격히 감쇄하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슥.
귀를 찢을 듯한 폭음 대신, 모래성이 무너지듯 부드러운 마찰음이 서고 안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잔해들이 허공에서 속도를 잃고 시우가 서 있는 반경 3미터 바깥으로 비껴가며 떨어졌다. 완벽한 물리적 불침번이 그를 감싸 안은 형국이었다.
"말도 안 돼……."
베아트리스의 검끝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비친 광경은 상식을 완전히 이탈해 있었다. 붕괴하는 유적의 한복판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정물화처럼 고요했다. 떨어지는 돌과 뿜어져 나오는 화염이 마치 보이지 않는 투명한 돔에 가로막힌 것처럼 소년의 머리 위에서 굴절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마력을 폭발적으로 방출해 막아낸 것이 아니었다. 소년은 단지 대기 자체의 성질을 바꾸어, 자연의 붕괴를 제어하고 있었다.
"유리아. 5번 석판의 종단 수치를 받아 적어."
시우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너무나 무감정해서, 이 아수라장이 마치 아카데미의 조용한 강의실인 것 같은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어? 아, 응! 알았어!"
유리아는 넋을 잃고 있다가 황급히 양가죽 종이와 마법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필체가 떨리는 손끝을 따라 거칠게 흔들렸지만, 시우가 읊는 숫자의 나열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좌표 축선 보정치, 0.00342. 엔트로피 손실 계수, 1.414. 공간 복제 공식의 오차율은……."
시우는 말을 잇는 와중에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에 눈살을 찌푸렸다.
심장이 멈추려는 듯한 기색과 함께 손끝에서부터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정리된 엔트로피의 시선'이 가져오는 대가. 생물학적 엔트로피의 강제적 지불은 그의 수명을 매 초마다 깎아내고 있었다.
베아트리스는 소년의 안색이 창백하다 못해 푸르게 질려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입술은 이미 검붉게 변해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서려 그대로 얼어붙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눈동자는 흐려지지 않았다. 지성에 대한 집착, 혹은 고향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광기 어린 집념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위해 저토록 자신을 파괴하는가.'
그녀의 가슴팍에 걸린 연성 펜던트가 기이한 잔향을 내며 공명하기 시작했다. 시우의 체온이 급격히 떨어질 때마다, 펜던트의 내부 마력 회로가 소리 없이 요동치며 열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 미완성된 고정이론의 찌꺼기였으나, 소년의 절대영도에 반응해 스스로 형태를 바꾸어가는 중이었다.
"다 적었어, 에온! 하지만 이 공식은……."
유리아가 적어 내려간 수식의 끝자락을 바라보며 안색을 굳혔다. 연금술의 기초를 마스터한 그녀의 눈에도, 이 공식이 내포한 위험성은 선명하게 보였다.
"이건 단순한 차원 이동이 아니야. 시공간의 장벽을 넘기 위해선, 시전자의 존재 자체를 우주의 정보 값으로 변환해야 해. 그 과정에서 소모되는 에너지가…… 시전자의 생명력 그 자체를 직접적인 연료로 삼고 있어."
"알고 있어."
시우가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는 석판에 손을 얹은 채, 내부에 각인된 고대 마법 문명의 실패작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들은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관에 사로잡혀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착각 속에 방대한 마나만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열역학의 관점에서 볼 때, 차원을 비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양적인 마나가 아니라 질적인 엔트로피의 통제였다. 그리고 그 통제의 열쇠는 결국 연산자의 생명 활동을 제동하는 것으로만 얻을 수 있었다.
"인과율의 등가교환이지. 질량을 가진 물체를 다른 차원으로 전송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생명체의 유기적 결합 에너지로 대체하는 것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다면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네 몸이 먼저 부서질 거라고!"
유리아가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시우가 보여준 학문적 무결함에 매료되어 여기까지 왔지만, 그 결말이 한 소년의 자멸이라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라 저주에 불과했다.
"계산상으로는 가능해. 단지 오차 범위를 줄여 효율성을 99.9%까지 끌어올리면, 지불해야 할 생명력의 총량도 최소화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이 유적의 좌표가 필요했던 거다."
시우는 석판의 마지막 문양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찌이이잉!
석판이 푸른빛을 뿜으며 시우의 마력 배선과 완전히 동조했다. 머릿속의 천체 좌표계가 마지막 조각을 찾아 맞물리는 느낌이 들었다. 90%. 이제 단 한 단계의 미세 보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 순간, 서고를 둘러싸고 있던 화염의 장벽이 극도로 팽창했다. 붉은 불길이 하얗게 변하며 지옥의 아가리처럼 그들을 덮쳐왔다. 고대 방어 체계의 마지막 폭주이자, 침입자를 멸절하려는 유적의 자폭 시도였다.
"꺄악!"
유리아가 머리를 감싸 쥐며 주저앉았다. 베아트리스조차 이번만큼은 막아설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검을 바닥에 꽂은 채 마력 장벽의 밀도를 높였다.
지옥 같은 열기가 피부를 태울 듯이 엄습해 오는 찰나.
"시끄럽군."
시우의 차가운 음성이 나지막하게 물리 법칙의 지배를 선언했다.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는 스스로 감소하지 않는다. 하지만 강제적인 외부 계의 개입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소년이 가볍게 발을 구르며 손바닥을 대리석 바닥에 밀착시켰다.
화아아악!
순간, 주변의 모든 빛과 열이 단 일 초 만에 소멸했다.
붉게 타오르던 화염이 거짓말처럼 검은 연기로 화하더니, 이내 그 연기마저도 공중에서 얼어붙어 바스라졌다. 대기 중의 열에너지를 완전히 빼앗긴 공간은 순식간에 절대영도($-273.15^\circ\text{C}$)에 수렴하기 시작했다. 무너져 내리던 거대한 돌가루들과 타오르던 불꽃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급격히 동결되어, 서로 엉겨 붙기 시작했다.
쿠구구구묵!
얼어붙은 파편들이 거대한 얼음 기둥이 되어 무너지는 천장을 단단하게 지탱했다. 불바다였던 전장은 단숨에 은백색의 얼음 궁전으로 탈바꿈했다. 서고 전체를 파괴하려던 폭발의 에너지가, 시우의 절대적인 열 소멸 제어에 의해 오히려 유적을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지탱대로 변모한 것이다.
"하아…… 하아……."
시우가 입을 열자 하얀 김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속눈썹에는 이미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비현실적인 고요함 속에서, 베아트리스는 오한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잔혹하리만치 무감정하고 완벽한 물리 수렴 제어.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세상을 구성하는 규칙 자체를 자신의 입맛대로 주무르는 군주의 권능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이 세계를 얼려버릴 파멸의 존재인가.'
그녀는 더 이상 그를 단순한 낙제생 에온으로 볼 수 없었다. 이 소년의 내면에는 온 세상을 얼어붙게 만들고도 남을 냉혹한 진리가 도사리고 있었다.
"공식의 전사는 끝났다."
시우가 석판을 품에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걸음걸이는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명징했다.
"가자. 이곳은 곧 완전히 붕괴할 거다."
그가 얼어붙은 잔해 사이로 만들어진 얼음 계단을 밟고 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유리아와 베아트리스는 홀린 듯 그 뒤를 따랐다. 붉은 화염의 지옥을 지나 얼어붙은 침묵의 계단을 오르는 길은,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걷는 것처럼 기묘한 엄숙함을 자아냈다.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의 끝자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침내 봉인 구역을 벗어나 아카데미의 본관 지하로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바스락.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차가운 마찰음이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시우가 걸음을 멈추었다. 베아트리스 역시 본능적으로 장검을 고쳐 잡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슬며시 드리워진 횃불의 그림자 너머로, 수십 명의 무장한 성기사들이 반원형으로 포진해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은 황실 소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특별 종교 재판소의 문장, 즉 마왕과 이단을 멸절하기 위해 조직된 광신적 집단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서, 은빛 투구 사이로 타오르는 듯한 안광을 뿜어내는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대검이 바닥을 쓸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결국 예언의 봉인을 풀고 기어 나오는군, 더러운 마왕의 찌꺼기여."
가차 없는 처단자, 이단심문관 발락의 목소리가 지하 통로의 천장을 차갑게 울렸다. 그의 뒤로 늘어선 성기사들의 무기가 일제히 시우의 심장을 향해 겨누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