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유리아가 떨리는 손으로 마왕의 상징과 같은 보정 연금식을 받아든 순간, 시우의 머릿속은 오직 차원 이동의 기하학적 좌표만을 그리고 있었다. 양피지 끝자락을 타고 흐르는 희미한 잉크 향 너머로, 소년의 시선은 이미 아카데미의 가장 깊고 어두운 심연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 잠겨 있을 불완전한 세계의 좌표들. 집으로 가기 위한 유일한 열쇠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사흘이 흘렀다.

가을의 끝자락에 선 라그랑주 황립 마법 아카데미의 교정은 붉게 물든 낙엽들이 석조 회랑을 따라 쓸쓸히 구르는 계절을 지나고 있었다. 한낮인데도 태양은 제 빛을 잃은 채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중앙 대연무장은 최종 실기 평가를 참관하려는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풍스러운 고딕 양식의 첨탑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그곳에서, 수많은 학생과 교수진이 숨을 죽인 채 연무장 중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자가 에온인가?"

"대강당에서 이상한 마법을 썼다던 낙제생..."

"소문이 무성하더군. 영창도 없이 불을 끄고 공간을 얼렸다던데."

학생들의 수군거림이 서늘한 가을바람을 타고 건조하게 흩어졌다. 그들의 시선 끝에는 낡은 학원복을 입은 채 멍하니 서 있는 시우가 있었다. 시우는 주변의 수군거림도, 자신을 향한 경계 어린 눈초리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독하게 느린 맥박.

가슴속에서 분당 마흔 번을 간신히 넘기며 뛰는 심장은 생물학적 엔트로피를 대가로 지불한 마법의 반동이었다. 몸이 서서히 얼어붙어 가는 저체온 상태였지만, 시우의 이성은 그 고통마저도 숫자로 치환해 내며 차분하게 가동되고 있었다.

연무장 중앙에는 거대한 마력 차단 결계가 웅장한 빛을 뿜으며 서 있었다. 고대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네 개의 마법석이 사각의 경계를 이루며, 그 안쪽의 공간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었다. 황실 마법사단이 사용하는 최상급 제어 결계, '아이기스의 성벽'이었다.

단상 위, 귀족적인 자태를 뽐내며 앉아 있는 엘리아스 교수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그의 손가락이 화려한 금장 반지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에온. 네가 대강당에서 부린 기만책이 우연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기스의 성벽'을 파괴해 증명해 보아라. 황실의 권위가 깃든 결계다. 어설픈 편법은 통하지 않지."

엘리아스의 목소리에는 뼈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시우를 합법적으로 파멸시키기 위해 이 결계의 내부 마나 순환 경로를 미세하게 뒤틀어 놓았다. 일단 마력을 주입하는 순간, 결계는 마나를 폭주시켜 시전자의 마력 회로를 찢어버릴 터였다. 그것은 마법학의 완벽함을 맹신하는 엘리아스가 준비한 잔혹한 덫이었다.

시우는 그 독기 어린 시선을 느끼지도 못한 채, 그저 묵묵히 결계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그의 무심한 눈동자에는 엘리아스의 권위도, 관중들의 경외도 담기지 않았다. 오직 눈앞의 물리 현상만이 투명한 수식으로 분해되어 보일 뿐이었다.

'구조가 조잡하군.'

시우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의 시야가 푸르게 반전되었다. 골든핑거, '정리된 엔트로피의 시선'이 활성화되는 순간이었다.

동시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쿵. 쿵. 박동수가 기형적으로 느려지기 시작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며 손끝이 하얗게 질려갔지만, 시우는 안면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극심한 저체온증은 그가 치러야 할 생명력의 대가였다.

시우의 망막 위로 결계를 구성하는 마나의 흐름이 열역학적 수식으로 정렬되었다. 제국 마법사들이 위대하다고 칭송하는 웅장한 결계는, 그의 눈에는 사방으로 에너지를 흘리고 있는 구멍 난 물독에 불과했다. 특히 결계의 핵심 조율부인 네 모퉁이의 구리 합금 마법석.

시우는 문득 자신이 이 세계에 처음 눈을 떴을 때, 어두운 방 안에서 관측했던 구리 동전의 마찰열 손실 수치를 떠올렸다.

'구리 합금의 미시기하학적 마찰 오차율, 0.0032%.'

그것은 이 세계의 정밀 마법 도구들이 가진 근본적인 결함이었다. 마나가 흐를 때 발생하는 열에너지. 그 열에너지가 구리 내부에서 마찰을 일으키며 누출되는 미세한 경로가 시우의 시선에 붉은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영창을... 하지 않는 건가?"

"또 저 태도군. 오만하기 짝이 없어."

지켜보던 학생들이 침을 삼켰다.

시우는 장황한 주문을 외우는 대신, 뇌 세포를 풀가동해 그 0.0032%의 오차 경로를 역추적했다. 그 미세 마나 유출 경로를 따라 결계의 내부 에너지를 냉각하여 구조적 연결부를 파괴하는 계산식.

그가 해야 할 일은 마법을 부딪쳐 결계를 깨부수는 무식한 짓이 아니었다. 그저 구리 마법석 내부에서 흐르는 열에너지를 완벽하게 회수하는 것. 단 1g의 잉여 에너지도 남기지 않고, 분자의 운동 에너지를 제로(0)로 수렴시키는 것뿐이었다.

시우가 천천히 오른손을 뻗었다. 손끝이 허공을 가볍게 짚었다.

아무런 마력의 파동도, 장엄한 광휘도 없었다.

그러나 순간, 연무장 전체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스스스스-.

소리 없는 한파가 대지를 쓸고 지나갔다. 관중석의 학생들이 자신도 모르게 옷깃을 여몄다. 입을 열 때마다 하얀 김이 서리태처럼 뿜어져 나왔다. 가을의 온기가 순식간에 박탈당한 공간은 기괴한 정적에 휩싸였다.

"어...?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하늘을 봐!"

공중에서 하얀 액체 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공기 중의 산소와 질소가 극도의 저온을 견디지 못하고 액화되어 내리는 기괴한 현상이었다. 투명한 액체 이슬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얼어붙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엘리아스가 자랑하던 '아이기스의 성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웅장하게 일렁이던 황금빛 결계가 순식간에 빛을 잃었다. 결계의 표면을 타고 푸르스름한 성에가 끼기 시작하더니, 이내 거대한 얼음 장벽처럼 변해갔다. 아니, 그것은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분자 간의 결합력이 완벽히 정지당해, 스스로의 무게조차 지탱하지 못하는 극저온의 결정체였다.

쩍, 쩌적.

"말도 안 돼..."

엘리아스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가 심혈을 기울여 조작해 둔 결계의 마나 폭주 기전은 작동조차 하지 못했다. 폭주할 마나의 '열역학적 활성화 에너지'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마나의 움직임마저 정지시키는 절대영도의 지배 아래에서는 그 어떤 마법적 기믹도 무의미했다.

시우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겼다.

바스스스스-.

그것은 붕괴라기보다 소멸에 가까웠다. 거대한 결계가 단 한 줌의 폭발음도 없이, 마치 고운 모래성처럼 사르르 무너져 내렸다. 얼어붙은 결계의 파편들이 대지 위로 떨어지며 먼지처럼 흩어졌다. 정치적 압박을 가하던 거대한 결계가, 단 1g의 잉여 에너지 낭비 없이 완벽히 결빙 응축되어 모래처럼 깨어지는 파괴력 앞에 연무장은 침묵했다.

"힉...!"

단상 위의 엘리아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의 다리가 눈에 띄게 덜덜 떨리더니, 이내 의자 아래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의 고급 실크 바지 가랑이 사이로 축축한 얼룩이 빠르게 번져 나갔다.

지독한 공포가 그의 이성을 완전히 마비시킨 것이었다. 평생을 바쳐 배운 마학의 상식이, 소리 없는 한파 한 자락에 모래처럼 바스러지는 광경을 목격한 대가였다. 그를 지탱하던 자존심과 학문적 위상은 이미 시우가 불러온 절대영도의 심연 속으로 침몰해 있었다.

연무장은 죽음보다 더한 침묵에 잠겼다.

"마나의... 파동이 없었어."

원로원의 한 원로가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움켜쥐었다.

"주문도, 서클의 전개도 없이 어떻게 결계의 에너지를 통째로 소멸시킨단 말인가? 이것은 마법이 아니다. 이것은..."

그의 눈동자에 짙은 공포가 서렸다.

"그분의 권능이다. 세상을 영원한 동토로 만들고 마력을 삼켜버릴... 종말의 마왕."

"예언이 맞았어! 에온, 저 자가 바로 환생한 마왕이다!"

참관석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학원장단은 마법 파동 없이 한순간에 물리적으로 붕괴해 사방이 얼어붙은 연무장을 보며, 이것을 마왕의 명백한 전장 장악이라고 낙인찍었다. 학생들은 시우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닿을까 두려워하며 일제히 뒤로 물러섰다. 그들에게 시우의 무표정한 얼굴은 자비 없는 절대자의 군림으로 비쳤다.

하지만 시우는 그들의 공포에는 하등 관심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결계의 붕괴 과정에서 관측된 공간 왜곡률... 역시 고대 공식의 상수를 대입하면 차원 안정성이 급격히 올라가는군.'

그는 조용히 자신의 주머니 속 노트를 떠올리며 만족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그 무심하고도 오만한 듯한 태도가 주변인들의 오해를 한층 더 견고하게 다졌다.

"마왕을 구속하라!"

연무장의 침묵을 깨고, 철갑을 두른 아카데미 수호 기사단이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그들의 검이 시우를 향해 푸르게 빛났다.

"정체를 밝혀라, 사악한 존재여!"

기사단장이 소리치며 시우의 목덜미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목을 압박하는 순간에도 시우는 덤덤했다.

그러나 그 순간,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타는 듯한 통증이 치밀어 올랐다.

"욱...!"

시우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과도하게 사용한 골든핑거의 반동. 그의 심장은 이제 거의 멎을 듯이 느리게 뛰고 있었고, 극심한 저체온증이 그의 생명력을 사정없이 갉아먹고 있었다. 하얗게 얼어붙은 연무장의 대지 위로, 소년이 토해낸 붉은 선혈이 기괴할 정도로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흩뿌려졌다.

시우는 비틀거리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칼을 쥔 기사들의 경악 어린 눈동자가 어른거렸다.

그가 토해낸 붉은 선혈은 연무장의 얼어붙은 바닥에 닿자마자 기이한 형태로 변해갔다. 액체로서 흘러내려야 할 피가, 표면장력을 유지한 채 그대로 얼어붙어 붉은 결정으로 화한 것이다. 마치 고결한 루비를 흩뿌려 놓은 듯한 그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광경은,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에 서늘한 공포를 한 층 더 깊게 새겨 넣었다.

"피마저... 얼어붙는가."

기사단장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마주한 존재는 인간의 상식으로 규정할 수 없는 심연이었다. 상대를 상하게 하기도 전에 스스로의 피를 얼려버릴 만큼 차가운 마력의 군주. 그들이 아는 예언 속 마왕의 묘사와 너무도 정확히 일치했다.

"물러서지 마라! 저자는 지금 마력을 과사용해 폭주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구금해라!"

바닥에 주저앉아 바지를 적신 엘리아스가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자신의 비열한 음모가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초조함이 섞여 있었다. 그의 외침에 기사들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시우의 포위망을 좁혔다.

"에온 님...!"

관중석의 장벽을 넘어, 유리아가 기사들을 향해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아카데미의 규율과 단단한 철갑을 두른 수호병들이었다. 그녀가 품에 안은 양피지, 시우가 적어준 그 완벽한 수식이 가을바람에 날카롭게 펄럭였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소년을 향한 맹목적인 염려와, 그 무결한 지성에 대한 갈망이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다.

그 소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베아트리스는 홀로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가슴팍에 걸린 연성 펜던트가 기묘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시우가 뿌려놓은 절대영도의 파동에 반응하듯, 미세한 온기를 뿜어내며 붉은빛을 명멸하는 유물. 그녀는 기사들의 칼끝 너머로 보이는 시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마왕... 이라고?'

그녀의 눈에 비친 소년은 세상을 파멸시킬 군주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심장이 멈춰가는 것조차 지극히 덤덤한 눈으로 관조하는, 기이할 정도로 고독한 학자의 얼굴이었다. 소년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얇은 학원복 너머로 비치는 쇄골 부근은 이미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아 있었다. 저것은 지배자의 여유가 아니다. 스스로의 생명을 땔감 삼아 불을 지피는, 미련하고도 위태로운 구도자의 초상이었다.

시우의 뇌는 이미 생존을 위한 최종 연산에 돌입해 있었다.

분당 서른두 번.

심장의 펌프질이 멈추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뇌로 가는 산소 공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동맥 부근의 열손실을 최소화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에워싼 철검의 서늘한 칼날들을 보면서도, 그저 목을 감싸 쥔 손가락 끝에 미세한 열운동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0.02칼로리... 이 정도의 에너지만 재배치하면 의식은 유지할 수 있다.'

타인들이 자신을 무어라 부르든, 어떤 눈으로 바라보든 상관없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 불합리한 오차투성이 세계를 벗어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더는 움직이지 마라, 에온. 황립 마법 법정에 서게 될 것이다."

기사단장이 무거운 걸음을 내딛으며 마침내 시우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시우가 서 있는 연무장 중앙의 바닥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그것은 마법에 의한 파괴가 아니었다. 절대영도에 도달한 극저온의 공기가 대리석 바닥의 분자 구조를 완전히 수축시켰고, 급격한 온도 차를 견디지 못한 암반이 스스로 비명을 지르며 균열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대한 균열은 시우의 발끝에서 시작되어, 연무장 전체를 동강 낼 듯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새 사이로, 지상에서는 결코 느껴질 수 없는 이질적이고도 고색창연한 마력의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오직 먼지 쌓인 시간 속에 묻혀 있던 고대의 냄새.

지하 깊은 곳, 봉인된 '공허의 서고'가 소년이 만들어낸 차가운 심연에 반응하여 그 무거운 빗장을 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 힘은 대체...!"

기사단장이 균열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파동에 밀려 비틀거렸다.

사방이 무너져 내리는 혼돈 속에서, 시우의 몸이 균열의 어둠 속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떨어지는 그 순간에도 소년의 파란 눈동자는 오직 지하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왜곡된 수식의 광채만을 좇고 있었다.

과연 그는 이 심연의 끝에서 집으로 돌아갈 좌표를 찾아낼 수 것인가. 아니면 그를 마왕이라 확신하는 이들의 칼날에 먼저 심장을 꿰뚫릴 것인가.

어둠이 소년을 삼키기 직전, 베아트리스의 펜던트가 폭발하듯 붉은빛을 뿜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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