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칼터의 거대한 손바닥이 강기태의 오른손을 완전히 덮어씌웠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었다. 악수를 나누는 척하며 손가락 마디마디를 으스러뜨릴 기세로 힘을 꽉 움켜쥐는 압박. 굵은 힘줄이 솟구친 칼터의 팔뚝이 미세하게 떨릴 때마다, 기태의 손등 뼈에서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일었다.
"네가 그 동양인 요행수냐?"
칼터가 이빨을 드러내며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렸다. 201센티미터의 거구가 뿜어내는 그림자가 기태의 시야를 어둡게 가로막는다.
기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음 한 자락 내뱉지 않았다. 과거 무릎이 부서지던 순간의 지옥 같은 고통에 비하면 이깟 악력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태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계산기가 빠르게 두드려진다.
'여기서 손을 빼며 약한 모습을 보이면 스카우트들의 평가 장부에 감점 요인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억지로 힘 대 힘으로 맞서다간 손가락 관절의 미세 인대가 손상된다. 손실 대비 이익이 전혀 없는 싸움이다.'
그 순간, 기태의 망막 위로 투명한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상태창이 강렬하게 명멸했다.
[상대 분석 완료: 잭슨 칼터 (Jackson Carter)] - 신체 스펙: 201cm / 105kg - 무게 중심: 오른발 뒤꿈치 편향 (64%) - 실시간 돌파 궤적: 좌측 45도 사각지대 발생 (진입 성공률 92.4%)
눈앞에 칼터의 발밑을 기점으로 뻗어 나가는 선명한 붉은색 선들이 보였다. 기태는 칼터의 손아귀 안에서 힘을 완전히 빼버렸다. 상대가 가하는 물리적 압력을 그대로 흘려보내며, 오히려 그의 손날 쪽 빈틈으로 손가락을 미끄러뜨려 비틀었다.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악력의 작용점을 분산시키는 정밀한 신체 제어였다.
칼터의 미간이 좁아졌다. 으스러져야 할 얇은 뼈가 미꾸라지처럼 힘을 흘려내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이, 1순위 도련님. 고사리손 부러뜨리겠어."
그때 마커스 밀러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밀러가 칼터의 두꺼운 팔뚝을 툭툭 치며 어깨를 으쓱였다.
"드래프트도 안 끝난 애송이가 벌써부터 은퇴한 노장처럼 손아귀 힘 자랑질이야? 하워드 단장님, 애들 관리 좀 잘하셔야겠습니다. 코트 밖에서 상해 사고라도 나면 구단 보험료가 꽤나 깨질 텐데요?"
하워드 스톤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스톤은 칼터를 가볍게 뒤로 물려 세우며 기태를 내려다보았다.
"칼터는 그저 가벼운 인사를 건넸을 뿐이네, 마커스. 그리고 강기태 선수, 오늘 경기는 요령이 좋았더군. 하지만 진짜 NBA의 피지컬 앞에서도 그런 얕은수가 통할지 두고 보겠네. 예선 2라운드 상대가 마침 칼터의 팀이니까."
스톤은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을 던진 뒤, 칼터를 데리고 복도 저편으로 걸어갔다. 칼터는 멀어지면서도 기태를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기태는 붉게 자국이 남은 오른손을 가만히 쥐었다 폈다 했다.
"고맙습니다, 밀러 씨."
"고마우면 다음 경기에서도 내 스크린 잘 타 먹기나 해. 아주 뼈가 시리다, 뼈가 시려."
밀러가 오른쪽 무릎 보호대를 거듭 조이며 내뱉었다. 그의 능글맞은 표정 뒤로,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가는 메마른 독기가 기태의 눈에 포착되었다. 무릎 부상이라는 같은 흉터를 공유하는 자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갈증에 가득 찬 맹수의 눈빛이었다.
***
같은 시각, 라스베이거스 서머리그 구단 단장실.
사방이 통유리로 된 방 안에서 하워드 스톤이 신경질적으로 태블릿 화면을 두드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잭슨 칼터의 이름이 적힌 정밀 메디컬 리포트가 띄워져 있었다.
[경고: 대상자의 심전도 파형 비정상. 심근 비대증 징후 감지. 인위적인 신체 오버클럭 약물(PED) 복용 의심 수치 검출.]
"쯧, 미련한 놈. 적당히 빨았어야지."
스톤이 혀를 차며 보고서 파일을 드래그해 비밀 폴더 깊숙한 곳에 처박아 버렸다. 이 메디컬 리포트가 이사회나 언론에 유출되는 날에는,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올린 드래프트 1순위 마케팅과 구단의 미래가 통째로 날아간다.
그는 서랍을 열어 개인용 보안 USB를 꽂은 뒤, 다른 문서 하나를 불러왔다.
[강기태(Ki-Tae Kang) 신체 능력 및 생리학적 가치 저하 보고서] - 아시아인 골격의 선천적 한계성 분석. - 고교 시절 무릎 슬개건 파열 이력으로 인한 재발 위험성 85% 이상. - 리그 평균 이하의 윙스팬 및 맥스 버티컬 점프 수치 기록.
스톤의 손가락이 전송 버튼 위에서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근본 없는 옐로우 가드가 이 신성한 코트를 휘젓는 꼴은 못 보지. 농구는 괴물들의 스포츠다."
이사회 전송 완료를 알리는 알림음이 단장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스톤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솟아올랐다.
***
"가만히 있어요. 힘주지 말고."
경기 대기실의 낡은 벤치 위. 에밀리 정이 기태의 오른손목을 붙잡고 흰색 탄력 붕대를 정밀하게 감아 나갔다. 그녀의 손길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손목 관절 각도가 3도만 틀어져도 슛 릴리즈 타이밍이 영점 몇 초씩 밀려요. 칼터 그 무식한 인간 때문에 장부에 손실이 발생하면 곤란하니까요."
"철저하군요, 에밀리."
"제 수수료가 걸린 몸값이잖아요."
에밀리가 마지막 매듭을 지으며 기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그리고 기태 씨, 방금 구단 프런트 라인을 통해 흥미로운 정보를 하나 샀어요."
"정보입니까?"
"하워드 스톤이 칼터의 메디컬 리포트를 극비로 분류해 숨겼더군요. 단순히 부상 이력을 숨기는 수준이 아니에요. 불법 약물 조작 가능성이 아주 농후해요. 칼터의 그 비정상적인 근육 팽창과 폭발적인 스피드, 아무래도 약물의 힘을 빌린 오버클럭 같아요."
기태의 눈이 가늘어졌다.
"스톤이 그걸 덮어주고 있다?"
"네. 그리고 대신 기태 씨의 신체 능력을 깎아내리는 위조 보고서를 이사회에 뿌렸죠. 철저하게 기태 씨를 주저앉히고 칼터를 띄우려는 심산이에요. 그러니까 절대 저 무식한 약물 괴물과 힘으로 정면충돌하지 마세요. 우리 장부는 가성비와 영리한 승리를 원해요."
"알고 있습니다. 내 몸은 나보다 내 머리가 더 잘 계산하니까."
기태는 붕대가 감긴 손목을 가볍게 돌려보았다. 조임의 정도가 아주 완벽했다.
그의 시야 아래로 다시 한번 생존형 피로도 장부가 떠올랐다.
================================= [강기태 - 생체 자원 장부] - 현재 심박수: 68 bpm (안정) - 슬개건 마찰계수: 1.02 (정상 범위) - 동맥 산소 포화도: 99% - 가용 활성화 시간: 180초 (안전 한계선) =================================
'2라운드 경기 시간은 총 40분. 내가 시스템을 직접 가동할 수 있는 시간은 단 3분뿐이다. 그 외의 시간은 철저하게 마커스의 스크린과 사각지대 침투로 연명해야 한다.'
기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육관 문틈 사이로 수많은 관중의 함성 소리와 중계진의 다급한 마이크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
"자! 라스베이거스 서머리그 예선 2라운드! 오늘 최고의 빅매치가 시작됩니다! 전체 1순위 후보 잭슨 칼터가 이끄는 블루 팀, 그리고 지난 경기에서 놀라운 슛 감각을 보여준 동양인 가드 강기태의 화이트 팀이 맞붙습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강기태 선수에 대한 스카우트들의 관심이 뜨거운데요, 과연 오늘 칼터의 압도적인 피지컬 앞에서도 그 슈팅이 통할지가 관건입니다!"
쿵! 쿵! 쿵!
코트가 울렸다. 잭슨 칼터는 경기 시작과 동시에 야수처럼 코트를 질주했다. 가공할 탄력으로 리바운드를 따내고, 터질 듯한 이두박근으로 화이트 팀의 골밑을 유린했다.
"비켜라, 이 약골들아!"
콰앙!
칼터가 화이트 팀의 센터를 힘으로 밀어붙이며 투핸드 덩크를 내리꽂았다. 관중석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점수는 어느새 18 대 12로 블루 팀의 리드.
체력 안배를 위해 전반 내내 철저히 조력자 역할만 하던 기태가 볼을 소유했다. 탑 부근에서 볼을 키핑하며 템포를 조절하자, 관중석에서 야유와 기대가 뒤섞인 소음이 일었다.
스으윽.
기태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다름 아닌 잭슨 칼터였다. 201센티미터의 거구가 양팔을 넓게 벌리며 기태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했다.
"어디 쏴 봐, 이 옐로우 몽키 새끼야. 네 그 느려터진 슛 폼으로 내 블록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아?"
칼터가 이빨을 드러내며 도발했다. 그의 거친 숨결에서 비정상적인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눈동자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줄기의 핏대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에밀리의 말대로 오버클럭 약물의 영향이 분명했다.
기태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숫자로만 가득 차 있었다.
'칼터의 윙스팬 215cm. 리액션 속도 0.18초. 내 점프 높이로는 정면 슛을 쏠 경우 블록당할 확률 87%.'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기태는 드리블을 낮추며 오른쪽으로 돌파하는 척 상체를 흔들었다. 칼터가 비웃으며 거대한 몸짝을 오른쪽으로 밀어붙였다. 엄청난 운동에너지였다. 정면으로 부딪쳤다간 기태의 약한 무릎이 먼저 박살 날 판이었다.
'지금이다.'
기태의 안구 속에서 붉은 선들이 폭발하듯 뻗어 나갔다.
[시스템 활성화 - 초정밀 사각지대 분석] - 동맥 산소 포화도 저하 개시 (98%... 95%...) - 젖산 수치 상승률: +2.4% / sec - 상대 시각 인지 사각지대 검출: 좌측 하단 15도 영역.
칼터가 오른쪽 돌파를 막기 위해 체중을 싣는 순간, 그의 왼쪽 시야 아래쪽에 선명한 붉은색 구멍이 뚫렸다. 인간의 안구 구조상, 그리고 칼터의 거대한 체구와 강한 전방 주시 성향 때문에 발생하는 순간적인 시각적 사각지대였다.
기태의 신체가 거짓말처럼 뒤로 꺾였다. 비하인드 더 백 드리블과 동시에, 칼터의 왼쪽 사각지대로 몸을 낮게 굽히며 파고들었다.
"뭐...?"
칼터의 시야에서 기태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앞에 있던 존재가 찰나의 순간 그림자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사각지대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이다.
스아악!
기태는 칼터의 겨드랑이 밑, 완벽한 사각지대를 통과하며 골밑으로 진입했다. 칼터가 뒤늦게 상체를 돌리려 했으나, 이미 무게 중심이 무너진 상태였다.
"이 자식이...!"
칼터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손을 휘둘렀지만, 기태는 이미 림을 향해 솟구친 뒤였다.
공중에서 공을 쥔 오른손을 아래에서 위로 부드럽게 퍼 올리는 언더핸드 레이업. 백보드의 사각 모서리를 정확히 맞춘 공이 그물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서어억!
"오 마이 갓! 보셨습니까! 강기태! 잭슨 칼터의 완벽한 밀착 수비를 비웃듯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로 미끄러져 들어가 득점에 성공합니다!"
"경이로운 유연성과 정밀함입니다! 칼터는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멍하니 서 있군요!"
체육관이 떠나갈 듯한 함성으로 진동했다. 관중석의 스카우트들이 일제히 태블릿에 무언가를 받아적기 시작했다. 하워드 스톤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기태는 코트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둔탁한 충격이 무릎을 타고 올라왔지만, 철저한 충격 흡수 착지로 부하를 최소화했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칼터를 향해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백코트했다. 냉혹할 정도로 무감각한, 오직 성공률만을 따지는 냉혈한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태가 중앙선을 채 넘기도 전이었다.
따끔.
가슴 깊은 곳에서 정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다.
동시에 시야 전체가 붉은색 경고등으로 가득 차며 차가운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경보: 심폐 기능 한계 도달 우려] - 현재 심박수: 178 bpm - 동맥 산소 포화도: 84% (급격한 저하) - 근육 젖산 수치: 88% (과부하 위험) ※ 경고: 다음 쿼터 시스템 사용 제한 필수. 무리한 활성화 지속 시 영구적인 근육 파열 및 심전도 정지 위험 발생.
기태의 발걸음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턱밑까지 차오르는 뜨거운 숨결이 목구멍을 찢을 듯이 아파 왔다.
다음 쿼터는 칼터의 팀이 총공세를 펼칠 시간이었다. 그 지옥 같은 코트 위에서, 시스템의 도움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