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너, 그 무릎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냐?"

자욱한 증기 사이로 들어찬 목소리는 눅눅하면서도 날카로웠다. 샤워실 입구에 기대선 마커스 밀러가 기태를 빤히 내려다본다. 그의 오른쪽 무릎에 단단히 조여진 검은색 네오프렌 보호대가 뜨거운 열기 속에서 유독 이질적으로 도드라진다.

기태는 젖은 유니폼 상의를 손에 쥔 채 움직임을 멈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힌다. 기태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다. 회귀하기 전, 수없이 겪었던 부상의 트라우마가 척추를 타고 서늘하게 흘러내린다. 하지만 겉으로는 단 한 터럭의 동요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기태가 건조한 목소리로 받아친다.

"모르긴 뭘 몰라, 이 영악한 꼬맹이 녀석아."

밀러가 픽 웃으며 한 걸음 다가온다. 거대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박감이 샤워실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기태의 왼쪽 다리, 정확히 슬개건 부근을 투박한 손가락 끝으로 툭 찌른다.

"앗."

기태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좁아진다. 찌릿한 통증이 올라온다.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 경고: 외부 자극으로 인한 슬개건 마찰계수 일시적 상승] - 현재 무릎 슬개건 마찰계수: 0.81 (위험 범위 진입)

"거봐라, 임마. 속이려고 해도 이 늙은이 눈은 못 속여. 네놈이 코트 위에서 달릴 때 오른쪽 다리에 비정상적으로 무게중심을 싣는 거, 내 눈엔 아주 똑똑히 보인단 말이지. 슛을 던질 때도 착지할 때 왼쪽 무릎에 가해지는 충격을 최소화하려고 허리를 억지로 비틀고 있어. 안 그래?"

밀러의 눈동자 속에 깊은 독기가 서린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조롱이 아니었다. 젊은 날, 정상의 문턱에서 무릎이 박살 나 우승 반지를 놓쳐버린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처절한 광기다. 기태는 그 눈빛의 본질을 단번에 알아차린다. 자신과 같은 부류의 냄새. 코트 위에서 영혼을 팔아서라도 승리를 구걸하려는 미치광이의 눈빛이다.

"그래서요?"

기태가 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마커스를 똑바로 올려다본다.

"스톤 단장에게 찌르기라도 할 겁니까? 동양인 가드 녀석 무릎이 시한폭탄이라고?"

"하! 내가 그 뚱뚱한 대머리 꼰대 녀석 좋은 일을 왜 해 주냐?"

밀러가 이빨을 드러내며 껄껄 웃는다. 그의 웃음소리가 샤워실 타일 벽에 부딪혀 웅웅 울린다.

"난 내 무릎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기 전에 딱 한 번, 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그 번쩍이는 반지라는 걸 손가락에 끼워보고 싶을 뿐이야. 그런데 저 밖의 머저리 가드 놈들은 패스할 줄도 모르는 이기주의자 천지란 말이지. 하지만 너는 달라."

밀러가 기태의 어깨를 툭 친다.

"너는 코트를 수학 공식처럼 풀더군. 네 손끝에서 나가는 공은 기가 막히게 수비가 없는 곳으로만 흘러가. 비즈니스를 하자고, 꼬맹이. 너는 네 무릎을 아끼고, 나는 내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거지. 서로가 서로의 소모품이 되어주는 거야. 어때, 꽤 수지맞는 장사 아니냐?"

기태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간다. 동료를 믿지 못하는 기태에게 이보다 더 깔끔하고 매력적인 제안은 없다. 감정 낭비 없는 철저한 비즈니스 파트너십.

"좋습니다. 조건은 하나입니다. 코트 위에서 제 슛 궤적을 방해하지 마십시오."

"걱정 마라. 네가 슛을 쏠 수 있게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고 더러운 벽이 되어줄 테니까."

밀러가 제 오른쪽 무릎 보호대를 거칠게 다시 조여 맨다. 그 모습을 보며 기태는 머릿속 상태창을 띄운다.

[시스템 동기화 완료: 파트너 마커스 밀러] - 전술 연계 시 피로도 감소율: 35% 예상 - 활성화 제한 시간 연장 효과 기대

두 사람의 무릎 통증 수치가 기묘하게 공명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서로의 상처를 알아본 두 명의 패배자가, 가장 차가운 계약으로 묶이는 순간이었다.

***

라스베이거스 콕스 파빌리온 체육관.

서머리그 공식 예선 1라운드의 막이 올랐다. 관중석은 이미 미 전역에서 몰려든 NBA 스카우터들과 광적인 팬들의 함성으로 터져나갈 듯했다.

"기태 강! 저 동양인 가드가 지난번 트라이아웃에서 모리스를 발랐다며?" "쳇, 요행이겠지. 진정한 실전은 오늘부터다!"

체육관을 가득 채운 불신과 기대의 시선들 속에서 기태는 코트 위에 섰다.

오늘의 상대는 피지컬과 진흙탕 수비로 악명 높은 '라스베이거스 센티넬스'. 특히 기태의 매치업 상대인 포인트 가드 데릭 바넷은 195cm의 탄탄한 체격에 거친 파울을 일삼는 난폭한 수비수였다.

삑-!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팀은 난장판이 되었다.

서머리그는 쇼케이스 무대다. 모두가 정식 계약을 따내기 위해 눈이 뒤집혀 있었다. 같은 팀의 슈팅 가드 녀석은 하프라인을 넘자마자 기태의 패스 요구를 무시하고 무리한 돌파를 감행하다가 블록슛을 당했다.

"패스해라, 머저리 자식아!"

밀러가 백코트를 하며 소리쳤지만, 아군은 이미 분열되어 있었다. 각자 제 기록을 챙기기에 바빠 수비는 뒷전이었고, 공격 전술은 실종된 지 오래였다. 1쿼터 중반, 점수는 순식간에 8대 17로 벌어졌다.

"거봐라, 동양인 꼬맹이! 네가 설 자리는 없다!"

데릭 바넷이 기태의 가슴을 팍 밀치며 이죽거렸다. 심판의 눈을 피해 팔꿈치로 기태의 갈비뼈를 툭툭 건드리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기태의 심박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한다.

- 현재 심박수: 138 bpm - 동맥 산소 포화도(SpO2): 94%

'이대로 난사전에 휘말리면 체력만 갈려 나간다. 한 번에 끝내야 해.'

기태가 마커스 밀러와 눈빛을 교환했다. 밀러가 능글맞게 윙크를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기태가 공을 몰고 하프라인을 넘어섰다. 바넷이 곧바로 몸을 밀착하며 거칠게 압박해왔다. 숨이 턱 막히는 압박 속에서 기태가 머릿속의 스위치를 켠다.

[초정밀 궤적 분석 상태창 활성화] - 실시간 동맥 산소 포화도 감소 시작 (초당 -0.5%) - 붉은색 최적 슈팅 궤적 생성 중...

기태의 시야에 바넷의 발 위치와 무게중심의 사각지대가 붉은색 선으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동시에, 오른쪽에서 거대한 장벽이 들이닥쳤다.

쿵!

마커스 밀러가 완벽한 각도로 스크린을 걸었다. 바넷의 몸이 밀러의 단단한 가슴에 부딪혀 튕겨 나간다.

"어딜 가려고, 친구? 여긴 일방통행이야."

밀러가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넷의 진로를 완벽하게 차단했다.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교묘하게 바넷의 유니폼을 잡아끌며 수비 회복 시간을 0.5초 더 지연시키는 베테랑의 더티 플레이였다.

그 찰나의 순간, 기태의 눈앞에 완벽한 붉은 궤적이 림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슈팅 성공 확률: 100%]

기태는 주저하지 않고 튀어 올랐다.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슛 폼. 손끝을 떠난 공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가른다.

서어억!

그물망이 경쾌하게 뒤집히는 소리가 체육관에 울려 퍼진다.

"오 마이 갓! 기태 강의 깨끗한 3점포! 마커스 밀러의 환상적인 스크린이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찌르는 듯 고조된다.

"좋아, 꼬맹이! 기가 막히게 들어가는구먼!"

밀러가 기태와 스치며 손바닥을 부딪친다.

이것이 그들의 '체력 안배형 계약 플레이'였다. 기태가 홀로 코트를 종횡무진 누비며 체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밀러가 베테랑의 노련함으로 가장 효율적인 공간을 만들어내면, 기태는 상태창을 단 1.5초만 활성화하여 확실한 득점을 꽂아 넣는다.

- 현재 심박수: 125 bpm - 동맥 산소 포화도(SpO2): 96% (안정적)

산소 소비량이 평소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무릎에 가해지는 로드도 최소화된다. 기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철저한 계산대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상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3쿼터 후반, 기태와 밀러의 콤비 플레이에 완전히 농락당한 데릭 바넷의 눈이 뒤집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태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바넷은, 기태가 다시 한번 탑에서 공을 잡자 이성을 잃고 달려들었다.

스르륵.

기태가 가볍게 볼을 펌프 페이크하자 바넷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기태는 옆으로 한 보 물러나며 슛 동작을 취했다. 그 순간, 공중에서 내려오던 바넷이 고의적으로 발을 기태의 착지 지점 밑으로 들이밀었다.

농구에서 가장 치명적인 부상을 유발하는 비열한 파울, 일명 '발 넣기(Zaza Rule)'였다.

그대로 착지했다간 기태의 왼쪽 무릎 인대는 완전히 파열될 것이 뻔했다.

"위험해!"

에밀리 정이 관중석에서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 기태의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퍽!

마커스 밀러가 심판의 사각지대를 완벽하게 이용해 바넷의 옆구리를 거칠게 들이받았다. 동시에 밀러는 특유의 넉살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마치 중심을 잃고 넘어지는 듯한 할리우드 액션을 취했다.

"어이쿠! 발이 미끄러졌네!"

"크학!"

바넷은 밀러의 단단한 팔꿈치에 허리를 직격당해 코트 바닥으로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쇠파이프로 얻어맞은 듯한 타격에 바넷은 허리를 움켜쥔 채 비명을 질렀다.

삑-!

심판의 휘슬이 울렸지만, 파울은 오히려 수비 방해를 한 바넷에게 선언되었다. 밀러의 교묘한 페인트 동작에 심판마저 속아 넘어간 것이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짓거리야!"

센티넬스의 감독이 벤치에서 펄펄 뛰며 항의했지만, 밀러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뻔뻔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감독님, 나이가 들어서 발목에 힘이 안 들어가서 그래요. 미안하게 됐수다, 하하!"

밀러가 바닥에 쓰러진 바넷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 파트너 다리에 장난질 한 번만 더 해봐라. 다음번엔 네 커리어를 끝내줄 테니까."

바넷은 밀러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압도되어 감히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침을 삼켰다.

기태는 묵묵히 밀러를 바라보았다. 이 영악하고 더러운 베테랑의 보호막이 생각보다 훨씬 쓸모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이어진 프리드로우 라인.

기태가 가볍게 공을 던져 림을 가른다.

서어억!

경기 종료 부저가 울렸다. 98대 82. 완벽한 압승이었다.

***

경기가 끝난 후, 라커룸 복도.

에밀리 정이 태블릿을 들고 밝은 표정으로 기태에게 다가왔다.

"기태 씨, 방금 승리로 예선 1라운드 수당과 보너스가 입금됐어요. 그리고 스카우터들의 평점도 수직 상승 중이에요. 특히 마커스 밀러와의 온코트 마진(On-Court Margin) 지표가 리그 최상위권입니다."

기태는 입금 내역을 확인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에밀리. 장부 정리도 완벽하군요."

"이게 다 내가 몸값을 올리기 위해 깡패 노릇을 해준 덕분 아니겠냐, 꼬맹이?"

밀러가 젖은 수건을 목에 걸친 채 능글맞게 걸어왔다. 그의 이마에는 여전히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약속한 지분은 칼같이 정산해주십시오, 밀러 씨."

"당연하지. 난 돈과 반지 외에는 관심 없으니까."

두 사람이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치려는 찰나.

복도 저편에서 무겁고 위압적인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기태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굳은 표정의 구단 단장 하워드 스톤이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마치 거대한 야수 같은 풍채를 자랑하는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201cm의 압도적인 신장, 터질 듯한 근육질의 체구. 이번 드래프트 전체 1순위 후보이자, 기태가 넘어야 할 거대한 벽.

잭슨 칼터였다.

칼터는 기태를 마치 벌레 보듯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하워드 스톤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기태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 강기태 선수. 오늘 경기는 제법 볼만하더군요. 하지만 진짜 괴물이 어떤 건지 보여주기 위해 내 특별한 손님을 데려왔습니다."

칼터가 기태의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거대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아귀 힘만으로도 사람의 뼈를 으스러뜨릴 수 있을 것 같은 위압감이 복도 전체를 지배한다.

"네가 그 동양인 요행수냐?"

칼터의 목소리가 복도의 좁은 벽 사이로 웅웅 울렸다.

기태는 칼터의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 상태창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새로운 경고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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