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강태윤 변호사님."

송태수 실장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붉은 밀랍 봉투가 엘리베이터의 형광등 불빛을 받아 기괴한 핏빛으로 일렁였다.

"백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지금 즉시 '화청' VIP 룸으로 이동하십시오. 대표님께서 직접 기다리고 계십니다."

귓가에 꽂히는 송 실장의 목소리와 함께, 태윤의 관자놀이를 찌르는 이명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뇌수를 송곳으로 헤집는 듯한 통증. 미래 법률 대장을 연달아 조회한 대가였다. 8화에서 급하게 왼쪽 팔뚝에 찔러 넣었던 정맥 주사, '뉴로세타-D'의 약효가 벌써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뉴로세타-D.'

한백의 창업주 일가가 대물림되는 희귀 뇌신경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스위스 제약사에 의뢰해 극비리에 개발한 특수 뇌압 강하제. 극심한 신경 마비와 실명 전조 증상을 강제로 억누르고 시신경을 일시적으로 개방하는 기적적인 효능이 있었지만, 그 대가로 심장 박동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키고 고막을 찢는 듯한 이명을 남기는 금단의 약물이었다. 회귀 전, 한백의 온갖 추잡한 비밀을 청소하며 이 약물의 보관처를 알아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태윤은 완전한 맹인이 된 채 검찰청 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터였다.

태윤은 가쁜 숨을 삼키며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비굴하리치만큼 완벽한, 을(乙)의 미소였다.

"대표님께서 직접 저 같은 신입을 부르시다니 영광입니다. 송 실장님, 바로 모시겠습니다."

태윤의 뒤에 서 있던 윤재필이 씹고 있던 담배를 잘게 짓이기며 태윤의 옷자락을 슬쩍 잡아당겼다. 걱정과 경고가 뒤섞인 눈빛이었지만, 태윤은 가볍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지금은 백설희의 덫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할 타이밍이었다.

검은색 세단은 서초동의 번잡한 대로를 벗어나 삼청동 깊숙한 숲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장벽처럼 둘러친 곳에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한옥. 대한민국 정재계의 추악한 거래가 밀담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곳, 사설 비밀 클럽 '화청(華晴)'이었다.

디딤돌 위에 구두를 벗고 들어선 한옥 독방은 사방이 옻칠한 원목과 은은한 한지 창으로 마감되어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침향나무 탁자 너머, 백설희 한백 총괄대표가 연한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손목에서 번쩍이는 파텍 필립 시계의 초침이 가차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앉아라, 태윤아."

백설희는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이 탁자에 닿는 가벼운 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신입 주제에 제법 큰 사고등을 치고 다니더구나. 이사회장에서 강한찬 사장을 주저앉힌 것도 모자라, 이번엔 검찰청에서 최진엽이를 데리고 놀아?"

그녀의 눈동자가 태윤을 꿰뚫을 듯 향했다. 오만함과 냉혹함이 서린 시선 속에는 먹잇감을 탐색하는 맹수의 잔인함이 깃들어 있었다.

태윤은 무릎을 꿇듯 바닥에 바짝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대표님. 한백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그리고 대표님 가시는 길에 작은 걸림돌이라도 치우고자 미천한 재주를 부렸을 뿐입니다."

"미천한 재주라……."

백설희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렸다.

"최진엽이가 한백 비공개 자산 신탁 펀드의 고문직을 수용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독종 같은 검사 새끼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최 검사의 아킬레스건을 조금 건드렸을 뿐입니다. 그가 미래에 저지를 실수를 제가 미리 '예방'해 주겠다고 제안했지요. 결국 검사도 인간이고, 권력 앞에서는 을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말은 잘하는구나."

백설희가 흘깃 시계를 보았다. 3초. 그녀가 타인에게 허용하는 인내심의 한계였다.

"하지만 태윤아. 사냥개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짖고 물어뜯는 것은 재롱이 아니라 반역이다. 네가 최진엽이의 목줄을 쥔 순간, 네 손에 쥔 게 한백을 향한 칼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니?"

긴장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송태수 실장이 문가에서 은밀하게 손을 양복 안주머니로 가져가는 것이 태윤의 시야 주변부에 걸렸다.

태윤은 품 안에서 낡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었다.

"그 칼날을, 대표님께 바치고자 가져왔습니다."

"이게 뭐지?"

"윤재필 전 검사가 사채 시장을 전전하며 모은, 한백 상층부와 명동 사채 왕들의 커넥션이 담긴 화청의 간이 장부 조각과 로비 명단입니다."

백설희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이것은 윤재필이 자신의 퇴직금이자 생명줄처럼 은닉해 두었던 결정적 카드였다. 태윤은 회귀 전의 기억을 통해 윤재필이 이 장부를 어디에 숨겼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를 무혐의로 빼내 주는 대가로 이미 손에 넣은 상태였다.

태윤은 머리를 바닥에 더 깊이 조아리며 속삭였다.

"대표님께서 한백의 총괄 대표 자리에 오르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누구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백 대표님의 대표 취임을 반대하며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이사회 내부의 원로 파트너들, 특히 김태성 시니어 파트너를 비롯한 구세력들이지요. 이 장부에는 그들이 명동 사채업자들을 통해 어떤 식으로 비자금을 세탁하고 뇌물을 수수했는지 날짜와 금액, 계좌번호까지 상세히 적혀 있습니다."

백설희가 천천히 서류 봉투를 가져갔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와 함께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서류 내용을 훑었다.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그녀의 차가운 눈빛에 기묘한 희열과 탐욕이 서리기 시작했다.

"김태성이가…… 화청에서 이런 짓을 벌이고 다녔단 말이지?"

"예, 대표님. 이 장부만 있으면 그들을 사법처리하는 것은 물론, 한백에서 단 한 푼의 퇴직금도 주지 않고 영구 제명할 수 있습니다. 대표님의 손을 더럽힐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이 칼을 쥐고 그들을 도려내겠습니다."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칼을 빌려 사람을 해친다. 태윤은 백설희에게 원로 파트너들을 가차 없이 쳐낼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을 쥐여준 것이었다. 동시에 자신은 그녀의 가장 유용하고 충성스러운 사냥개임을 증명해 보였다.

백설희는 서류를 덮고 태윤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태윤아. 너 정말 쓸 만한 사냥개구나. 그래, 김태성이 그 늙은이가 요즘 내 눈 밖에 나긴 했지."

"대표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자들은 제가 치우겠습니다."

"좋다. 이 건은 네가 전권을 가지고 처리해라. 필요한 자금과 인력은 송 실장에게 말하면 지원해 주마."

백설희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뒤,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강성그룹 건은 어떻게 생각하니? 강한찬 사장이 이사회에서 체면을 구기긴 했지만, 여전히 강성의 후계 구도는 확고하다. 내가 기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헬리오스'가 완성되면 강성그룹의 상속세는 완벽하게 증발할 것이다. 한백과 강성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거지."

'프로젝트 헬리오스.' 강성그룹의 상속세를 우회 증여와 해외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합법적으로 무력화하려는 백설희의 야심작이었다.

태윤은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그는 다시 한번 뇌리에 잠들어 있는 '미래 법률 대장'을 깨웠다. 관자놀이가 터질 것 같은 통증과 함께 눈앞이 순간적으로 암전되었지만, 이빨을 악물고 대장의 페이지를 넘겼다.

[ 대법원 2029. 11. 14. 선고 2029두58412 판결 ] 국외 특수관계법인을 이용한 변칙 증여 및 상속세및증여세법 제45조의2(명의신탁재산의 증여의제) 적용 사건. 피고 법무법인 한백이 설계한 '프로젝트 헬리오스'는 조세회피처의 다단계 신탁 구조를 활용하였으나, 실질과세원칙에 의거하여 사돈 기업의 우회 증여로 판단됨. 징벌적 증여세 1조 2천억 원 부과 및 관련 변호사법 위반으로 한백 조세팀 전원 형사 처벌.

완벽한 설계 오류였다. 백설희가 자랑하는 이 기획은 결국 3년 뒤 대한민국 사법 역사상 유례없는 징벌적 과세와 한백의 몰락을 가져올 시한폭탄이었다.

하지만 태윤은 이 오류를 지적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도록 부추겨야 했다.

태윤은 고개를 들고 눈을 빛냈다.

"대표님의 기획은 완벽하십니다. 다만, 세무 당국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초기에 강성바이오의 지분을 해외 신탁에 양도하는 규모를 기존 설계보다 두 배 이상 늘리시는 것이 안전할 듯합니다. 규모가 클수록 오히려 합법적인 해외 투자로 위장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백설희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녀는 태윤의 제안을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는 듯하더니, 이내 감탄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규모를 늘려 합법적 투자로 위장한다라…… 과연, 발상의 전환이구나. 네 말이 맞다. 어설프게 쪼개는 것보다 한 번에 크게 움직이는 게 낫겠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태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태윤아. 이제부터 너를 내 직속 스페셜 어쏘(Special Associate)로 임명하겠다. 파트너 변호사들의 눈치 볼 필요 없다. 오직 나에게만 보고하고 내 지시만 따라라."

"과분한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대표님. 뼈가 가루가 되도록 뛰겠습니다."

태윤은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싸늘하게 읊조렸다. '그래, 백설희. 더 크게 벌려라. 더 깊이 파라. 네가 판 무덤이 깊을수록 네가 떨어질 때 비명조차 들리지 않을 테니까.'

독방을 나온 태윤의 걸음걸이는 당당했으나, 그의 귓가에는 여전히 삐- 하는 이명이 멈추지 않았다. 뉴로세타-D의 부작용으로 온몸의 신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지만, 복수의 카타르시스가 그 고통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한옥 복도를 지나 화청의 넓은 마당으로 나서는 순간이었다.

정원의 어스름한 조명 아래, 고급 정장 상의를 거칠게 풀어헤친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뒤편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덩치 큰 사내 대여섯 명이 위압적인 기세로 태윤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강성그룹의 후계자, 강한찬이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입술은 분노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임시 이사회에서 태윤의 농간으로 사외이사들을 잃고 후계 구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그의 광기가 폭발하기 직전이었다.

"강태윤."

강한찬이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가래침을 뱉으며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유리 크리스탈 재떨이가 들려 있었다.

"이 시궁창 같은 을 새끼가 감히 내 뒤통수를 쳐? 네가 백설희 치맛자락 밑에 숨어 있으면 살 줄 알았냐?"

강한찬의 살기 어린 시선이 태윤의 심장을 겨누었다. 주변을 둘러싼 경호원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오기 시작했다.

태윤은 떨어지는 시력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의 눈앞이 다시 한번 붉고 흐릿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약효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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