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이새끼들이 진짜 돌았나! 당장 안 놔?!"

강한찬의 비명과 비서들의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대회의실의 대리석 바닥을 어지럽게 두드렸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 수사관들이 윤재필의 팔을 꺾어 누르는 와중에도, 태윤의 시야는 잉크가 번지듯 빠르게 탁해지고 있었다. 회백색으로 흐려진 시야 너머로 백설희의 날카로운 턱선이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머리통을 송곳으로 쑤셔 파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미래 법률 대장을 과도하게 조회한 대가였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감각과 함께 목구멍에서 비린 뜨거운 피 냄새가 올라왔다.

"강 변호사, 안색이 왜 그래?"

백설희가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지만, 태윤은 대답하는 대신 입술을 깨물어 붉은 핏방울을 터뜨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숨기기 위해 이사회장의 묵직한 참나무 문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지금 쓰러지면 모든 설계가 무너진다.

태윤은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겨 복도 끝 화장실로 향했다.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거울 앞에 주저앉았다. 시야는 이미 암흑에 가까운 잿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더듬거리는 손으로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작은 은색 실린더를 꺼냈다.

그 안에는 라벨조차 붙어 있지 않은 청색 주사액이 들어 있었다.

'뉴로세타-D(Neuroseta-D).'

한백의 총괄대표 백설희를 비롯한 극소수의 로열패밀리들만이 조용히 복용하는 독일제 특수 뇌신경 차단제였다. 회귀 전, 태윤은 한백의 온갖 더러운 심부름을 도맡으며 이 약물의 존재와 입수 경로를 알아뒀다. 한백이 설립한 의료재단의 VIP 임상시험용이라는 명목하에 극비리에 수입되는 물건으로, 뇌압을 급격히 낮추고 망막 신경의 혈류를 강제로 개방하는 효과가 있었다.

태윤은 주저 없이 앰플 끝을 부러뜨려 일회용 주사기로 용액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왼쪽 팔뚝의 정맥에 망설임 없이 바늘을 찔러 넣었다.

차가운 액체가 혈관을 타고 뇌로 직행하는 순간, 온몸의 근육이 비틀리는 듯한 경련이 일어났다. 입안에서 쇠 맛이 강하게 돌며 턱관절이 딱딱 부딪쳤다.

"하아, 사……."

거친 숨을 몰아쉬자, 감겼던 눈꺼풀 아래로 빛이 다시 스며들기 시작했다. 회색빛 안개가 걷히고 거울 속 자신의 초췌한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대장의 페널티로 인한 일시적 실명을 강제로 유예시킨 것이다. 부작용으로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상관없었다. 눈이 보인다면, 사냥은 계속할 수 있었다.

태윤은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쳐 맸다. 거울 속의 남자는 다시 비굴하고 순종적인 '을'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강성그룹 본사 12층에 마련된 임시 수사 지휘실.

캐비닛과 책상들이 급조된 취조실로 변해 있었고, 윤재필은 양손에 수갑을 찬 채 철제 의자에 구겨지듯 앉아 있었다. 그 앞에는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 최진엽 부부장검사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서 있었다.

"윤재필 선배님. 왕년에 칼잡이로 날리셨던 분이 어쩌다 이런 대기업 뒷배나 봐주는 시정잡배가 되셨습니까? 한백의 사설 클럽 '화청'의 장부, 그거 어디 있습니까?"

최진엽이 볼펜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내가 모르는 걸 어떻게 말하냐, 최 검사야. 난 그냥 은퇴하고 푼돈이나 버는 브로커일 뿐이야."

윤재필이 이빨 사이에 낀 고춧가루를 퉤 뱉으며 건들거리자, 최진엽의 미간이 좁아졌다.

바로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태윤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손에는 따뜻한 캔커피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최진엽의 수행 수사관이 제지하려 했으나, 태윤은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검사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강성그룹 이사회 대리인으로 참석했던 법무법인 한백의 강태윤 변호사라고 합니다. 조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저희 측 참고인인 윤재필 씨와 잠시 독대할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최진엽이 콧방귀를 꼈다.

"한백? 지금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될지도 모르는 참고인을 한백 변호사한테 넘기라고요? 장난합니까?"

태윤은 허리를 더 깊게 숙였다.

"아닙니다, 검사님. 제발 오해를 풀어주십시오. 저는 한백의 하찮은 어쏘 변호사일 뿐입니다. 위에 계신 백설희 대표님 지시로 온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 무식한 윤재필 씨가 검찰의 엄중함을 모르고 입을 다물고 있길래, 제가 설득해서 협조하게 만들려고 왔습니다."

태윤은 윤재필을 향해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윤재필 씨!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됩니까? 검사님이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하세요! 당신이 한백의 비밀 장부 조각을 사채 시장에서 입수했다는 소문, 나도 들었습니다. 그걸 왜 숨깁니까? 당장 검사님께 내놓고 선처를 구하세요!"

윤재필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태윤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배신감을 느낀 듯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강 변호사, 너 이 새끼가 미쳤나……!"

"시끄럽습니다! 검사님 앞입니다!"

태윤이 윤재필의 말을 매섭게 자르며 최진엽을 돌아보았다.

"검사님, 보시다시피 이 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자를 설득할 카드가 있습니다. 한백 상층부에서도 이 자가 가진 장부 조각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거든요. 제가 이 자의 입을 열어 장부를 검사님께 바치겠습니다. 대신, 저 건방진 윤재필이 아닌 '진짜 몸통'을 잡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진엽의 눈빛에 탐욕스러운 호기심이 서렸다. 한백의 비밀 클럽 '화청'의 비자금 명단은 검찰 내에서도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는 치트키와 같았다.

최진엽은 수사관들에게 손짓했다.

"잠시 나가 있어."

수사관들이 퇴실하고 문이 닫히자, 취조실 안에는 오직 세 사람만이 남았다. 최진엽은 책상에 기대어 앉아 팔짱을 꼈다.

"강 변호사라 했나? 꽤 싹싹하네. 그래, 한백의 꼬리치고는 제법 제안이 그럴듯해. 어떻게 설득하겠다는 거지?"

태윤은 비굴하게 웃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를 지웠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뉴로세타-D의 약효 덕분에 시야는 흐려지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 미래 법률 대장이 조용히 구동되기 시작했다.

``` [대장 검색 결과: 최진엽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 부부장검사)] - 2018년 4월: 강성그룹 사외이사 취임 예정 (퇴임 후 전관예우) - 2020년 11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배임) 및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로 기소 - 판결 요지: 강성바이오 주가 조작 공모 및 사외이사 권한 남용, 징역 7년 선고 ```

태윤은 천천히 의자를 당겨 최진엽의 맞은편에 앉았다. 비굴하게 숙이고 있던 어깨가 꼿꼿하게 펴졌다.

"최 검사님. 화청의 장부를 손에 넣으면 청와대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최진엽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라고?"

"그 장부, 검사님이 감당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백설희 대표가 왜 그걸 사채 시장에 흘러가게 뒀을까요? 그 안에 든 이름들 절반이 현직 사법부 고위직과 대검 부장들입니다. 검사님이 그걸 터뜨리는 순간, 검찰 조직 전체가 검사님을 적으로 돌릴 겁니다. 옷을 벗는 수준이 아니라, 실종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 자식이 지금 협박하는 거야?"

최진엽이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하지만 태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직하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협박이 아니라 컨설팅입니다. 검사님의 진짜 목표는 옷을 벗은 뒤의 삶 아닙니까? 정년퇴임 해봐야 변호사 개업해서 서초동에서 구걸해야 하는 신세. 하지만 강성그룹 사외이사 자리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최진엽의 기세가 뚝 꺾였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강성그룹 측과 은밀하게 퇴임 후 자리를 논의하고 있던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저는 한백의 변호사입니다, 검사님. 강성의 안방 사정까지 전부 꿰뚫고 있는 사람입니다."

태윤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강성그룹 강한찬 부회장이 제안한 사외이사 자리, 독이 든 성배입니다. 강한찬은 2018년에 강성바이오 주가 조작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검사님이 사외이사로 들어가서 도장을 찍는 순간, 징역 7년짜리 실형 선고서에 서명하는 꼴이 됩니다."

태윤은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최진엽의 앞에 밀어 놓았다. 그것은 강성바이오의 향후 3년간의 합병 계획서와 사외이사 날인란이 표시된 가상 공소장이었다. 미래 법률 대장의 판결문을 토대로 태윤이 직접 재구성한 '미래의 덫'이었다.

"이게…… 뭐야?"

"검사님이 감당해야 할 미래의 판결문입니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배임죄. 공범으로 엮여 추징금만 50억이 넘을 겁니다."

최진엽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서류에 적힌 날짜와 강성바이오의 합병 비율은 현재 극비리에 검토 중인 내부 문건의 수치와 소름 끼치도록 일치했다. 단순한 블러핑이 아니라는 것을 최진엽의 본능이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이 장부 조각을 그냥 묻으라고?"

"아닙니다."

태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장부는 검사님이 가지십시오. 하지만 그걸 터뜨리는 대신, 백설희 대표와 '딜'을 하십시오. 한백이 관리하는 비공개 자산 신탁 펀드가 있습니다. 화청의 명단에 있는 VIP들이 출자한 비밀 펀드죠. 검사님이 장부를 돌려주는 대가로, 그 펀드의 자문 고문 자리를 요구하십시오. 매년 합법적인 자문료 명목으로 10억씩 검사님의 해외 계좌로 송금될 겁니다. 주가 조작으로 감옥에 갈 일도 없고, 옷을 벗은 뒤에도 평생 VIP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최진엽은 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다 태윤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에 멈췄다.

"백설희가…… 그런 거래를 받아들일까?"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백 대표님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보다 돈으로 입을 막는 것을 훨씬 선호하시는 분이니까요. 그리고 그 거래의 연결고리는, 여기 있는 윤재필 씨가 맡을 겁니다."

태윤이 윤재필을 가리켰다. 윤재필은 태윤의 신들린 듯한 판짜기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최진엽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눈앞의 서류를 천천히 접어 자신의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윤재필 전 검사는…… 단순 참고인 조사 후 혐의없음으로 석방한다. 장부는 내가 임의제출 받은 것으로 처리하지."

"현명한 선택이십니다, 검사님."

태윤은 다시 허리를 굽히며 비굴한 '을'의 가면을 썼다.

"저희 한백은 언제나 검사님의 든든한 동반자가 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 * *

수사 지휘실 문을 열고 나온 복도는 한산했다. 압수수색으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윤재필은 수갑을 풀고 자유의 몸이 되어 태윤의 뒤를 따랐다.

"야, 강태윤."

윤재필이 담배를 꺼내 물며 나직하게 불렀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너 진짜 괴물 같은 놈이구나. 최진엽 그 독종 같은 새끼를 말 몇 마디로 구워삶아? 강성바이오 주가 조작 계획은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거야?"

태윤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알 필요 없습니다. 윤 선배님은 그 장부 조각이나 잘 간수하십시오. 아직 백설희의 목을 죄기에는 타이밍이 이릅니다. 최진엽이 백설희와 접촉할 때까지, 선배님은 납작 엎드려 계셔야 합니다."

"알았어, 인마. 내가 누군데. 근데 너…… 몸은 괜찮냐?"

윤재필의 시선이 태윤의 왼쪽 팔뚝에 머물렀다. 소매 사이로 핏자국이 살짝 번져 있었다. 뉴로세타-D를 급하게 주사하느라 생긴 상처였다.

"상관없습니다."

태윤은 냉랭하게 말을 자르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태윤의 몸이 굳었다.

안에는 단정한 감색 정장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백설희 총괄대표의 그림자이자, 한백의 모든 은밀한 뒷일을 처리하는 직속 비서실장 송태수였다.

송 실장은 차가운 눈빛으로 태윤을 바라보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의 손에는 붉은색 밀랍으로 봉인된 고급 종이 봉투가 들려 있었다.

"강태윤 변호사님."

송 실장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백 대표님의 지시입니다. 지금 즉시 '화청' VIP 룸으로 이동하십시오. 대표님께서 직접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가 건넨 봉투 안에는 황금색 문양이 선명하게 박힌 '화청 강제 호출장'이 들어 있었다.

최진엽과의 거래가 성사되기도 전에, 백설희가 먼저 움직인 것이다.

송 실장의 뒤편으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세 명이 태윤의 퇴로를 막아서듯 도열했다.

태윤은 봉투를 움켜쥐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의 귓가로, 뉴로세타-D의 약효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는지 삐- 하는 이명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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