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거꾸로 솟구치며 고막을 짓누르는 고주파 음이 귓청을 찢었다.
머릿속에서 미래 법률 대장의 페이지가 강제로 뜯겨 나가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정수리를 강타했다.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던 대리석 복도의 백색 광원들이 붉은 핏빛으로 번지더니, 단 1초 만에 완전한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끝이 차디차게 식어 내렸고, 이마에서는 비정상적인 식은땀이 흘러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구 내부의 미세혈관이 터져 눈꺼풀 틈새로 끈적한 액체가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 강태윤 변호사. 안 들어가고 거기서 뭐 해? 이사회 시작한다."
백설희의 목소리였다. 바로 1미터도 되지 않는 오른쪽 뒤편. 그녀의 구두 굽이 대리석 바닥을 신경질적으로 두드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고막을 때렸다.
태윤은 벽을 짚으려던 손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 버린 척 가죽 서류 가방을 쥔 손목에 힘을 주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올 정도의 통증을 자아내서야 간신히 터져 나오려던 신음을 이빨 사이로 삼킬 수 있었다.
"강 변호사?"
백설희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의심의 전조였다. 그녀는 유능하지만 부하의 사소한 이상 행동도 용납하지 않는 칼 같은 여자였다.
이대로 1초만 더 지체하면 실명 사실이 발각된다. 한백의 사냥개로 쓰이다 버려지던 전생의 궤도가 다시 머릿속을 스쳤다.
그 순간, 거친 가죽 냄새와 함께 묵직한 손길이 태윤의 어깨를 강하게 낚아챘다.
"아이고! 백 대표님! 이 친구 이거 또 도졌네, 도졌어!"
윤재필의 목소리였다. 능글맞으면서도 다급함이 서린 전직 강력부 검사의 목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윤재필은 태윤의 어깨를 반쯤 감싸 안으며 그를 강제로 돌려세웠다.
"얘가 어젯밤에 대표님이 지시하신 강성그룹 내부 지분 변동 서류를 아주 한 글자도 안 빠뜨리고 밤새 처보느라 저혈압이 왔습니다. 안 그래도 아침부터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더니만, 문 앞에서 기절이라도 하려나 봅니다. 야, 강 변호사! 정신 차려!"
윤재필이 태윤의 뺨을 가볍게 툭툭 치며 백설희를 향해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대표님, 이사회 서기록 작성해야 하는데 요 상태로 들여보냈다가 강 상무님 보시는 앞에서 침이라도 흘리면 큰일 나지 않겠습니까? 제가 옆 소회의실에서 긴급 처방 약 좀 먹여서 딱 2분 만에 대가리 똑바로 돌려놓고 들여보내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계십시오!"
백설희가 손목시계를 흘깃 내려다보는 소리가 들렸다. 사각거리는 실크 블라우스의 마찰음.
"2분이야. 강한찬 상무 성격 알지? 이사회 시작하고 서기 변호사 자리 비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서류판 날아간다."
"걱정 마십시오! 제가 이 바닥 똥개 출신 아닙니까. 시간 철저합니다!"
윤재필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윤의 목줄을 잡듯 덜미를 움켜쥐고 옆 소회의실로 사정없이 끌고 들어갔다.
쾅!
소회의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걸쇠가 잠겼다.
태윤은 바닥에 거꾸러졌다. 어둠뿐인 세계에서 사지의 감각이 흐릿해져 갔다. 뇌세포가 실시간으로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열감이 두개골 내부를 헤집어 놓았다.
"야, 강태윤! 정신 차려, 이 새끼야! 눈 똑바로 떠!"
윤재필이 태윤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태윤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헤맸다.
"눈 안 보이지? 지금 완전 맹탕이지?"
윤재필의 다급한 숨결이 뺨에 닿았다. 태윤은 대답 대신 윤재필의 옷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손끝이 비정상적으로 떨렸다.
"…약, 내놔."
"기다려, 이 새끼야. 안 그래도 화청 장부 털 때 그쪽 전용 주치의 처방전 라인에서 빼돌려 둔 거 있으니까."
윤재필이 품 안의 안주머니를 거칠게 뒤적였다. 유리 앰플이 서로 부딪치며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한백의 핵심 파트너들과 그들의 극비 주치의인 '최 박사'만이 공유하는 특수 뇌신경 촉진제, 일명 '안티 뉴로-S'였다. 10년 뒤 한백의 고위층들이 뇌 기능 저하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 마비를 해결하기 위해 흡입하던 극비의 약물.
윤재필이 스프레이 필터가 달린 작은 유리병의 캡을 거칠게 벗겨냈다.
"들이마셔! 깊게!"
윤재필이 태윤의 코 밑에 약물을 들이밀고 밸브를 강하게 눌렀다.
치이익ㅡ!
빙하의 조각을 코로 들이마신 듯한 기괴할 정도의 차가운 통증이 비강을 뚫고 뇌하수체로 직행했다.
"커헉! 흑……!"
태윤의 척추가 활처럼 팽팽하게 꺾였다. 온몸의 모공이 일제히 열리며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머릿속을 지배하던 지옥 같은 고주파 소음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둠뿐이던 시야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흐릿한 회색빛 윤곽선들이 복원되기 시작했다. 완전한 회복은 아니었다. 색채는 사라지고 오직 흑백의 점과 선으로만 이루어진 가혹하고 건조한 세계가 눈앞에 드러났다.
사물의 경계선이 이중, 삼중으로 겹쳐 보였고, 조금만 시선을 빠르게 돌려도 잔상이 길게 남았다.
"보이냐?"
윤재필의 얼굴이 흑백의 점묘화처럼 흐릿하게 보였다. 그의 초조해하는 얼굴 근육의 떨림이 고스란히 시야에 들어왔다.
"……70% 정도만."
태윤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주워 쓰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소리에는 이미 조금 전의 비명이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차갑고 단단한 을의 가면이 다시 그의 얼굴 위에 얹어졌다.
"가자."
"미친놈. 그 눈으로 들어가겠다고? 강한찬 그 개 또라이 새끼 눈치 채면 바로 모가지 날아가."
"눈치를 채게 만들지 않으면 돼."
태윤은 비틀거리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정장의 매무새를 다듬고 손목시계를 맞췄다.
시각이 온전치 않다면 다른 감각을 극대화하면 그만이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회귀 전 수십 번도 넘게 드나들었던 강성그룹 31층 대회의실의 완벽한 물리적 레이아웃이 3D 그래픽처럼 박혀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태윤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윤 검사."
"왜."
"밖에서 대기해. 신호 주면 바로 움직이고."
"돈이나 제대로 입금해라, 강 변호사."
태윤은 대답 대신 문을 열고 한 걸음을 내딛었다. 흐릿한 흑백 세계의 복도를 지나, 굳게 닫힌 이사회장의 육중한 참나무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
대회의실 내부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중앙의 거대한 타원형 마호가니 테이블을 중심으로 강성그룹의 사외이사들과 상임이사들, 그리고 상석에 앉은 강한찬 상무가 보였다. 그 옆에는 한백의 총괄대표 백설희가 거만한 자세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태윤은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단상 구석의 서기 변호사석에 착석했다.
눈을 감았다.
시각적 잔상을 차단하자 오히려 온갖 소리가 고막을 통해 뇌 속으로 정밀하게 입력되었다.
왼쪽 세 번째 자리의 사외이사 박용식이 펜을 초조하게 돌리는 소리.
마주 보고 있는 김태성 이사가 헛기침을 하며 안경을 닦는 소리.
그리고 상석에서 가죽 의자를 삐걱거리며 거만하게 몸을 흔드는 강한찬의 거친 호흡 소리까지.
"그럼, 제14차 임시 이사회를 시작하지."
강한찬의 비서실장이 사회를 보며 마이크를 잡았다.
"금일 상정된 안건은 강성그룹의 미래 핵심 동력 확보를 위한 '중소기업 특허 기술 및 특허권 무상 양도 승인의 건'입니다. 대상 기업은 (주)세양테크이며, 양도 가액은……."
형식적인 낭독이 이어졌다.
세양테크. 민세아의 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지키려 했던, 그리고 강성그룹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탈하려 하는 원천 기술의 소유권이었다.
한백은 이 기술 강탈을 '합법적 영업양수도'라는 껍데기로 포장하기 위해 온갖 법적 꼼수를 동원해 이사회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의 있으신 이사님 계십니까?"
비서실장의 질문에 회의실 내부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이사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이미 강한찬의 서슬 퍼런 독재 아래에서 누구 하나 반대의 목소리를 낼 용기가 없었다. 찬성 표를 던지고 거액의 거마비를 챙기면 그만인 일이었다.
"없으시면 찬반 거수를……."
"잠시만요."
차분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이사회장의 정적을 깨뜨렸다.
모든 시선이 단상 구석의 서기석으로 쏠렸다. 백설희의 미간이 좁혀졌고, 강한찬은 턱을 치켜들며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태윤은 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떴다.
여전히 흑백의 흐릿한 형체만 보였지만, 그는 정확히 강한찬이 앉아 있는 상석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강태윤 변호사. 지금 뭐 하는 거지?"
백설희가 낮게 경고했다. 그녀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태윤의 목을 칠 기세였다.
하지만 태윤은 굽히지 않고 서류 가방에서 한 부의 문서를 꺼내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넣었다. 그 서류는 민세아가 남긴 암호화 USB와 대장의 기록을 대조해 작성한 극비 문서였다.
"강성그룹 정관 제34조 및 상법 제397조의2에 의거, 금일 상정된 안건은 이사회의 특별결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각한 이해상충 방지 의무 위반 소지가 있어 보고드립니다."
태윤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서류를 보지도 않고, 오직 머릿속에 기억된 법률 조항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읊조렸다.
<br> <p align="center"><b>[상법 제397조의2 (회사의 기회 및 자산의 유용 금지)]</b></p> <p align="center">① 이사는 이사회의 승인 없이 직무상 알게 된 회사의 정보를 이용하거나</p> <p align="center">회사의 기회를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위하여 사용하여서는 아니 된다.</p> <p align="center">② 제1항의 의무를 위반하여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경우,</p> <p align="center">해당 이사 및 찬성한 이사들은 회사에 대하여 연대하여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p> <br>
"이게 무슨 개소리야?"
강한찬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테이블을 내리치는 둔탁한 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저 서기 쪼다 새끼가 미쳤나? 백 대표, 저 새끼 한백 소속 맞지? 당장 안 끌어내고 뭐 해!"
백설희가 차가운 걸음걸이로 태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태윤의 어깨를 억누르며 귓가에 속삭였다.
"강태윤, 죽고 싶어? 네가 지금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리는지 잊은 모양이네."
태윤은 백설희의 위협을 가볍게 흘려보내며, 테이블 위의 서류를 한 장 더 넘겼다. 흐릿한 흑백의 시야 속에서 사외이사 박용식과 김태성의 실루엣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포착되었다.
사냥감들이 덫 근처에서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제 덫의 줄을 잡아당길 차례였다.
"사외이사 박용식 님."
태윤의 나직한 부름에 박용식 이사가 흠칫 놀라며 서류를 쥐고 있던 손을 떨었다.
"예, 예? 왜 나를……."
"그리고 상임이사 김태성 님."
태윤은 눈을 감았다.
시각을 완전히 차단하자, 머릿속 대장의 데이터가 더욱 선명하게 뇌리에 불을 밝혔다.
그들이 숨겨둔 가장 치명적인 비밀. 강한찬의 기술 강탈에 묵인해 주는 대가로 한백의 우회 루트를 통해 지급받았던 스위스 가명 계좌의 내역들.
태윤은 천천히 단상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테이블 앞으로 걸어갔다. 시야가 흐릿해 발끝의 감각에 의존해 걸었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기이할 정도로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두 사람의 바로 뒤편에 선 태윤이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오직 두 사람과 주변의 몇몇 이사들만이 들을 수 있는 아주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스위스 율리우스 베어(Julius Baer) 은행. 가명 계좌명 '블루 아일랜드'."
김태성 이사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계좌 번호의 끝자리 네 자리는…… 8 9 0 2."
"……!"
"그리고 박용식 이사님. 유니온 방크(UBS)의 가명 계좌 '레드 힐'. 끝자리 네 자리는 4 4 1 9. 맞으십니까?"
박용식 이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그는 뇌졸중이라도 온 사람처럼 입술을 부르르 떨며 태윤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태윤의 감긴 눈꺼풀이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흡사 악마의 미소와도 같은 기괴함이었다.
"그 계좌들로 지난달 14일, 강성그룹 페이퍼 컴퍼니인 '골드 크레스트'로부터 각각 15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이 송금된 사실을 금융감독원 특수외환조사과가 이미 포착했습니다. 만약 오늘 이 안건에 찬성 표를 던지신다면……."
태윤은 두 사람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그 즉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수재 혐의로 긴급 체포될 예정입니다. 대기 중인 검찰 수사관들이 이 건물 로비에 와 있거든요."
"이, 이…… 미친……."
김태성 이사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물컵을 집으려다 바닥에 떨어뜨렸다.
쨍그랑!
유리잔이 산산조각이 나며 이사회장의 고요를 박살 냈다.
"무슨 일이야! 김 이사, 왜 그래!"
강한찬이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김 이사는 강한찬의 눈을 피하며 사색이 된 채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이번 안건에 반대합니다! 아니, 기권하겠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나, 나도! 나도 기권하겠네! 이사회 일정을 연기해야 해!"
박용식 이사마저 허겁지겁 서류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사회장은 순식간에 동요의 도가니로 변했다. 다른 사외이사들 역시 두 사람의 비정상적인 발작과 태윤의 기묘한 침묵 속 압박을 눈치채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것들이 진짜 돌았나!"
강한찬이 폭발했다. 그는 테이블 위에 있던 고가의 크리스탈 명패를 집어 던져 벽에 박살을 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태성! 박용식! 너희들 내가 돈을 어떻게 줬는데 감히 이따위로 나와? 한백! 백 대표!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백설희는 강한찬의 광기 어린 포효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동자는 오직 단 한 사람, 눈을 감은 채 유령처럼 서 있는 강태윤만을 쏘아보고 있었다.
"강태윤…… 네 짓이구나."
백설희의 목소리에는 억눌린 분노와 함께, 처음으로 소모품에 불과했던 부하 직원에게 느끼는 기묘한 전율이 담겨 있었다.
태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여전히 흑백으로 흐릿하게 보이는 백설희의 실루엣을 향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순종적이고 나약한 '을'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표님. 저는 그저 한백의 서기 변호사로서, 강성그룹이 입을 수 있는 법적 리스크를 사전에 방지하고자 조언해 드린 것뿐입니다."
"닥쳐!"
강한찬이 테이블을 넘어 태윤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대회의실의 무거운 참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짙은 네이비색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선명한 골드 컬러의 검찰 마크가 빛나고 있었다.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입니다."
맨 앞선 검사가 공무원증을 치켜들며 외쳤다. 수사관들이 순식간에 이사회장을 에워쌌다.
"강성그룹 임시 이사회 현장에서 발생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및 배임 혐의로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합니다. 아울러……."
검사의 시선이 문 뒤에서 덜덜 떨며 서 있던 한 사내에게 닿았다.
"거기 뒤에 숨어 계신 윤재필 전 검사님. 오랜만입니다? 참고인 신분으로 임의동행해 주셔야겠습니다."
수사관 두 명이 윤재필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아 꺾었다. 윤재필은 태윤을 향해 배신감과 당혹감이 뒤섞인 눈빛을 보냈지만, 태윤은 그저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야가 다시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뉴로세타 약효의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흑백의 세계 속에서, 태윤은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이제 다음 판으로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