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로

눈앞이 캄캄했다.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안구 뒤쪽의 미세한 모세혈관들이 순식간에 수축하며 뇌신경을 사정없이 옥죄는 감각. 머릿속을 송곳으로 사정없이 벼려내듯 쑤셔대는 극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강 변호사님?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민세아의 찌르는 듯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어깨에 닿는 느낌이 나자마자, 태윤은 거칠게 그 손을 쳐냈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그는 제 손바닥으로 눈가를 쓸어내렸다. 손끝에 축축하고 뜨거운 액체가 묻어났다. 피였다.

"건드리지 마십시오."

갈라진 목소리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미래 법률 대장을 조회할 때마다 뇌세포가 타들어 가는 대가. 현실의 인과율을 비틀어 오차가 커질수록 페널티의 강도와 실명 지속 시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당장 내일 오전 9시로 앞당겨진 강성그룹의 임시 이사회. 민세아 아버지의 특허 기술을 합법적으로 강탈하고 한백의 비자금 사설 펀드로 수백억 원의 리베이트를 송금하는 마지막 날인이 찍히는 날이다.

"시간이 없군요, 민세아 씨."

태윤은 보이지 않는 초점으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내일 아침, 강성그룹의 심장부를 도려내러 갑니다. 당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 합의서가 완성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판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보이지도 않으면서 무슨 수로 판을 깨겠다는 거예요? 당장 병원부터 가야……."

"이건 단순한 질병이 아닙니다. 내가 치러야 할 형벌이자, 지불해야 할 정당한 대가일 뿐이지."

태윤은 비틀거리며 차체에 몸을 기댄 채, 입가에 고인 핏방울을 소매로 닦아냈다.

눈앞은 여전히 칠흑 같은 암흑이었지만, 머릿속의 미래 법률 대장은 그 어느 때보다 명 또렷하게 붉은색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이 판을 완전히 뒤집기 위해서는 한백의 심장부로 직접 걸어 들어가야 했다. 그것도 가장 비굴하고 무해한 '을'의 가면을 쓴 채로.

***

밤 11시 15분. 서초동 법조타운 이면에 위치한 '임앤파트너스 신경외과'.

이곳은 표면적으로는 고급 척추·신경 전문 병원이었지만, 실상은 법무법인 한백의 파트너 변호사들과 정재계 VIP들이 극비리에 마약성 진통제와 미승인 약물을 처방받는 사설 대피소였다. 원장 임준형은 한백의 의료소송 자문위원이자, 총괄대표 백설희의 개인 주치의이자 최측근이었다.

딸깍.

꺼져 있던 원장실의 스탠드 불빛이 켜지며 임준형의 찌푸려진 얼굴이 드러났다.

"신입이 이 시간에 예의도 없이 여길 왜 찾아와? 백 대표님 지시도 없이."

임준형은 책상 너머로 태윤을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태윤은 여전히 초점이 흐릿한 눈을 반쯤 감은 채, 품 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대리석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스르륵.

종이가 미끄러지는 소리에 임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이내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너…… 이거 어디서 났어?"

"선배님이 백 대표님의 차명 비자금 계좌로 매달 리베이트를 송금해 온 내역서입니다. 송금책은 강성그룹 재무팀의 박만길 상무였고, 필터링은 한백의 사설 펀드가 맡았더군요."

태윤의 목소리는 지독하리만큼 차분했다.

"이게 세상에 알려지면 선배님의 의사 면허는 물론이고, 한백에서 쌓아 올린 파트너 자격까지 통째로 날아갈 텐데. 안 그렇습니까?"

"이 미친 새끼가…… 협박하는 거냐?"

임준형이 서류를 구기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분노와 공포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태윤은 오히려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협박이라니요. 저는 을입니다, 선배님. 그저 살려달라고 애걸하러 온 것뿐입니다."

태윤이 비틀거리며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그의 코끝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대리석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제 뇌가 지금 터질 것처럼 아픕니다. 눈도 제대로 안 보이고요. 선배님이 백 대표님께 처방해 주시는 그 약물, '뉴로세타' 세 앰플만 주십시오. 그럼 이 서류의 원본은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라질 겁니다."

"뉴로세타는 미승인 약물이야! 부작용이 어떤지 알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죽기 아니면 살기니까요."

태윤이 흐릿한 눈으로 임준형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 서린 서늘한 광기에 질린 임준형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 하나 더."

태윤이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 9시, 강성그룹 임시 이사회. 그 자리에 저를 서기 변호사로 추천해 주십시오. 백 대표님께는 제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자원했다고 보고하시면 됩니다. 사냥개가 사냥터에 가겠다는데, 마다할 주인이 있겠습니까?"

임준형은 이 미친 신입 변호사의 기행에 압도당했다. 협박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사냥개라 칭하며 납작 엎드리는 태도. 이 기괴한 불균형이 그를 더 두렵게 만들었다.

결국 임준형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 뒤편의 개인 금고를 열었다. 파란색 약물이 담긴 주사기 앰플과 함께, 수술용 메스처럼 차가운 침묵이 방 안을 채웠다.

***

새벽 1시 30분. 서초동의 한 지하 주차장.

뉴로세타를 투여받은 태윤의 시야가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뇌 신경이 찌릿하게 떨리는 이물감은 여전했지만, 흐릿하던 민세아의 얼굴이 명확하게 눈에 들어왔다.

"미쳤어요? 진짜 미친 사람 같아요, 당신."

민세아가 차창에 기댄 채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물었다. 태윤은 그녀가 건넨 서류 뭉치를 훑어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미치지 않고서는 한백과 강성을 상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자, 민세아 씨. 이제 당신이 연출해야 할 무대입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당신이 스파이가 되는 겁니다."

민세아의 담뱃불이 순간 멈칫했다.

"스파이?"

"한백의 내부 기밀문서를 훔쳐 강성그룹의 경쟁사에 팔아넘기려다 덜미가 잡힌 파렴치한 변절자. 그게 내일 아침 당신이 뒤집어써야 할 죄명입니다. 강한찬의 비서실에 기밀 유출 정황이 담긴 가짜 이메일과 IP 로그를 심어두었습니다."

태윤은 냉혹하게 말을 이었다.

"강한찬은 오만하고 잔인한 자입니다. 그 자는 자신이 완벽하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상황에서만 안심하죠. 당신이 비참하게 붙잡혀 무릎을 꿇는 순간, 강한찬은 이 이사회가 자신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고 확신할 겁니다. 사냥꾼이 방심해야 덫을 깊숙이 밟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난…… 진짜로 잡혀 들어가는 거잖아!"

민세아의 목소리가 격앙되어 떨렸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몬 원수들에게 무릎을 꿇고 범인 누명까지 쓰라니,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태윤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 힘에 민세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믿으십시오. 형사 고소는 제가 법적으로 무력화시킵니다. 강한찬이 승리감에 취해 방심하는 바로 그 순간이, 그 자의 목줄을 끊어버릴 유일한 타이밍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자들의 심장에 대못을 박고 싶지 않습니까?"

민세아는 태윤의 지독하고 냉혈한 눈빛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인간적인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철저하게 계산된 복수의 톱니바퀴만 굴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알았어."

민세아가 이를 악물며 담배를 바닥에 비벼 껐다.

"그 새끼들이 가장 높은 곳에서 떨어질 수만 있다면, 기꺼이 흙탕물에 구르지."

태윤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좋은 자세입니다."

***

태윤은 홀로 남겨진 차 안에서 다시 한번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서 푸른빛의 미래 법률 대장이 펼쳐졌다. 뉴로세타의 약효 덕분에 통증은 억제되어 있었지만, 시신경이 미세하게 떨리는 전조는 여전했다. 그는 서둘러 핵심 키워드를 입력했다.

[검색어: 강성그룹 임시 이사회 강한찬 부실 채권 및 차명 주식]

스르륵, 대장의 페이지가 넘어가며 원래 역사에서의 판결문과 수사 기록들이 망막 위에 쏟아졌다.

<center> **서울중앙지방법원 2026. 4. 12. 선고 2025고합1098 판결** 【피고인】 강한찬 【주문】 피고인을 징역 5년에 처한다. 【이유】 피고인은 강성건설의 부실 채권 400억 원을 홍콩 소재 페이퍼 컴퍼니 '골드 크레스트(Gold Crest)'에 헐값으로 매각하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강성그룹 사외이사 3명(김태만, 최진우, 박종식)에게 이사회 찬성 대가로 차명 주식 총 15만 주를 배분한 사실이 인정된다. </center>

태윤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강한찬이 이사회 전날 밤, 비밀리에 처분하려 한 부실 채권의 해외 유통 경로와 이사진의 차명 주식 내역이 고스란히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이사회에서 특허 강탈 안건이 통과되는 순간, 이 사외이사들의 차명 주식은 합법적인 투자 수익으로 둔갑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설계를 주도한 것이 바로 한백의 백설희였다.

"이미 쳐놓은 거미줄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구나."

태윤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장을 닫았다.

***

새벽 3시, 강성그룹의 사설 영빈관 '청풍헌'.

화려한 샹들리에 아래, 정재계 인사들과 한백의 파트너 변호사들이 모여 이사회 전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흐르는 가운데, 최고급 위스키와 시가 연기가 허공을 채웠다.

백설희는 수억 원대를 호가하는 브레게 시계를 흘깃거리며 강한찬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 특허 양도 건이 마무리되면, 상무님의 후계 구도는 사실상 완성되는 겁니다."

"백 대표 덕분에 아주 손쉽게 가네. 민세아 그 기집애 아비가 자살할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말이야. 하하하!"

강한찬이 오만한 웃음소리를 터뜨리며 위스키를 들이켰다.

그때, 검은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강태윤이 서류 가방을 든 채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고개를 바짝 숙인, 전형적인 말단 어쏘 변호사의 모습이었다.

백설희가 흘깃 태윤을 쳐다보았다.

"강태윤 변호사. 임 원장이 자네를 적극 추천하더군. 궂은일도 군말 없이 잘 처리한다고."

"대표님을 모실 수만 있다면, 어떤 비바람이 불어도 셰퍼드처럼 짖으며 뛰겠습니다."

태윤은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허리를 90도로 꺾었다.

강한찬이 그 모습을 보며 코방귀를 꼈다.

"한백에는 왜 이렇게 굽실거리는 새끼들밖에 없냐? 사내놈이 자존심도 없이."

강한찬이 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려다, 실수로 고가의 한정판 듀퐁 라이터와 담뱃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툭, 타일 바닥을 구른 담뱃갑이 강한찬의 구두 끝에 멈춰 섰다.

주변의 한백 파트너 변호사들이 순간 멈칫하며 눈치만 보던 그 찰나.

스윽.

강태윤이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대고 기어가다시피 하며, 담뱃갑과 라이터를 양손으로 정중히 받쳐 들었다. 그의 행동에는 단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강무님의 고귀한 손을 더럽히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이런 비천한 일은 저희 같은 을들이 해야 마당합니다."

태윤은 고개를 조아린 채, 담뱃갑을 강한찬의 손높이에 맞춰 정중히 올렸다.

연회장에 일시적인 정적이 흐르는 듯했으나, 이내 강한찬의 얼굴에 기괴한 희열이 서렸다. 그는 태윤의 손에서 라이터를 낚아채듯 가져가며 미친 듯이 폭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으하하하! 야, 백 대표! 이 새끼 진짜 골 때리는 놈이네! 야, 너 이름이 뭐라고?"

"강태윤이라고 합니다, 상무님."

"그래, 태윤이. 마음에 든다, 새끼. 한백에 이런 싹싹한 개새끼가 있어야 일할 맛이 나지. 내일 이사회 때 서기 잘 써라. 한 자라도 틀리면 손가락을 잘라버릴 테니까."

강한찬이 구두 끝으로 태윤의 어깨를 툭툭 쳤다.

"뼈를 깎는 심정으로 받아 적겠습니다."

태윤은 비굴하리만큼 환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백설희는 그 모습을 보며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쓸모 있는 소모품을 하나 건졌다는 듯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태윤이 무릎을 꿇고 바닥을 기던 그 짧은 찰나, 강한찬의 정장 안주머니에서 미세하게 흘러나온 해외 보안 OTP 토큰의 일련번호를 태윤의 눈이 완벽하게 스캔했다는 것을.

그 번호는 조금 전 미래 법률 대장에서 확인한 홍콩 페이퍼 컴퍼니 '골드 크레스트'의 인출 승인 코드와 정확히 일치했다.

'웃어라, 강한찬. 네가 내일 쥐게 될 것은 왕좌가 아니라 단두대의 밧줄이니까.'

태윤은 가슴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윤재필의 화청 사설 장부 조각을 매만졌다. 모든 패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

다음 날 오전 8시 50분. 강성그룹 본사 31층 대회의실 앞 복도.

삼엄한 경비 속에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이 복도 전체를 짓누르고 있었다.

회의실 문 앞에는 한백의 총괄대표 백설희와 강성그룹의 상무 강한찬이 거만한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윤은 서류 가방을 꽉 쥔 채 이사회장 입구에 섰다.

이제 10분 뒤면 이사회가 시작된다. 판을 엎어버릴 준비는 끝났다.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 태윤은 가만히 눈을 감고 머릿속의 대장을 불러냈다.

'강성그룹 임시 이사회 최종 찬반 시나리오 재정렬 검색.'

그 순간.

뇌리 속에서 웅장하게 울려 퍼져야 할 대장의 목소리 대신, 날카로운 고주파 소음이 고막을 찢어발기듯 파고들었다.

피이이이익ㅡ!

"아윽……!"

태윤의 머리가 망치로 얻어맞은 듯 뒤로 꺾였다. 뉴로세타의 약효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소진된 것이었다.

왼쪽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실핏줄이 터진 눈에서 흘러내린 피였다. 눈앞의 화려한 대리석 복도와 경호원들의 실루엣이 순간 붉은 핏빛으로 물들더니, 이내 칠흑 같은 암흑으로 변해버렸다.

완전한 실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등 뒤로 가죽 구두의 묵직한 발소리가 다가왔다.

"어이, 강태윤 변호사. 안 들어가고 거기서 뭐 해? 이사회 시작한다."

백설희의 싸늘한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려왔다.

태윤은 어둠 속에서 굳어버렸다. 회의실 문을 열어야 할 서기 변호사의 눈앞에는 오직 끝없는 심연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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